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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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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2
깨72 4/8 22-23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성서 기록은 현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시들은 물론, 언덕, 산, 계곡, 우물, 강, 광야, 바다 등이 성경 기록에 자주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실제 발생하였던 지역을 가 본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을 상상하기에 더욱 유리하다.

‘이스라엘’ 주재 「깨어라!」 통신원은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여행하면서 그 점을 뚜렷하게 느꼈다. 우리도 그 통신원과 함께 여행을 해 보게 되면 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고대 사건들의 실제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욥바’(지금은 ‘야포’라고 함)는 ‘텔아비브’의 교외 남쪽에 있다. 고대 항구 지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보면 옛날의 여러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 항구를 통하여 ‘솔로몬’의 성전에 사용된 ‘레바논’의 백향목 목재가 들어왔었다. 예언자 ‘요나’는 이곳에서 자기의 임명을 회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제 1세기에는 이 도시에 그리스도인 회중이 설립되어 있었다. ‘선행하는 일이 많은’ ‘도르가’(‘다비다’)라는 여자가 그 회중과 연합했었다. 바로 이곳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 여자가 죽었을 때에 다시 살렸다.—사도 9:36-42.

기원 36년에 사도 ‘베드로’가 이곳에 머문 사실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그의 집은 해변에 있었다. (사도 9:43; 10:6) 그리스도교국의 어느 교회가 기원 18세기에 지은 조그마한 집을 소유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장소가 ‘시몬’의 집터였다고들 주장한다. 그러나 원래의 그 집터를 확인하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밖으로 달린 계단을 타고 편편한 지붕 위에 올라가 보면 사도 행전 10장에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6시더라”라고 기술된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베드로’가 비‘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합당함을 알리는 환상을 받은 것은 ‘시몬’의 집 지붕에서였다.—사도 10:9; 15:14.

이 환상을 본 다음 ‘베드로’는, ‘고넬료’의 하인 두명과 병졸 한명을 따라 북쪽으로 여행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군 장교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갔다. (사도 10:23) 그곳 ‘가이사랴’에서 할례받지 않은 최초의 이방인이 그리스도인 신자가 되었다.

‘야포’와 ‘텔아비브’를 출발하여 ‘사론’ 평야를 지나면 왼편에는 모래 언덕과 지중해의 푸른 물이 번갈아 보인다. 오른편 저 건너에는 ‘사마리아’ 언덕이 있다.

북으로 차를 몰고 가니 감귤 나무들, 포도원, 채소밭, 양어장, 밀밭 등이 온 들판에 깔려 있다. ‘야포’를 떠난지 한 시간도 채 못되었는데 ‘가이사랴’에 도착한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왕래하면서 적어도 이 ‘가이사랴’를 세번 통과하였으며, 그곳 그리스도인 회중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사도 9:30; 18:22; 21:8-16) 뿐만 아니라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고(기원 56년부터 58년까지), 그 후에는 상선을 타고 ‘로마’로 향하였다.—사도 23:23-27:1.

성서에는 또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급사한 사실과 ‘벨릭스’와 ‘베스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가이사랴’는 이처럼 ‘로마’ 시대의 유명한 도시로서, 행정부의 수도였고, 군사 주둔지였고, 또한 번화한 무역 항구였다.

그러나 역사깊은 이 지역에서 오늘날 무엇을 보게 되는가? 십자군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모래를 깊이 파서 ‘로마’ 시대의 건축물도 다수 발굴하였다.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갈 때에 통해서 간 도로가 바로 ‘로마’ 시대의 판석(板石)으로 포장되어 있고 말 발굽이 미끌어지지 않도록 판석에 줄이 파져 있다. 옛날에는 이 도로가 항구로 내려가는 중심 도로였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이 도시를 방문할 때에 이 길을 왕래하였을 것이다.

항구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서 높은 곳에 올라가 발굴해 놓은 구역을 내려다 본다. 그곳은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로마’ 사원과 다른 ‘로마’ 건물들이 발굴된 곳이다. 이 언덕 위에서 보면 ‘로마’ 시대의 이 도시가 얼마나 광범했는가를 알 수 있다. 후기 십자군 시대의 도시는 고대 이 도시의 약 6분의 1정도 밖에 차지하지 못하였다.

이 항구를 살펴보면, 이 툭트이고 모래가 많은 해안선을 인공적으로 막아서 거대한 항구를 만든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세퍼스’는 커다란 방파제와 광범한 부두를 만들기 위하여 거대한 바위 덩이를 물속에 집어 넣은 사실을 기술하였다. 이곳에 서서 어부들이 낚시줄을 드리우고 어린이들이 모래 해변에서 물장구를 치는 것을 보니 1,900년 전의 일들이 상상된다.

이곳 회중의 형제들이 이곳에 모여 떠나는 방문자들에게 작별의 인사로 손을 흔들고, ‘바울’과 ‘실라’와 ‘바나바’와 같은 여행하는 봉사자들을 환영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바울’과 ‘누가’는 이 근방 어디에 서서 ‘로마’에 갈 배를 기다렸을 것이다. ‘로마’에서 ‘바울’은 재판석에 앉은 ‘가이사’ 앞에서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던 것이다. ‘가이사랴’의 해변에 서서 과거를 회상해 보는 것은 실로 흥미롭다.

그러나 아직도 볼 것이 더 있으므로 계속 보기로 하자. 계단식 좌석이 있는 원형 극장들은 ‘로마’ 도시들의 특징이었다. ‘헤롯’은 이 도시에도 그러한 극장을 하나 건축하였는데, 그것의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1960년 이전에는 모래 속에 뭍혀 있었는데, 이제는 발굴하여 보수하였기 때문에 여름 날 저녘 같은 때에는 음악회나 다른 연극을 하기도 한다. 이런 형태의 극장은 음향 효과가 대단히 좋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사람도, 다시 건축한 이 무대 위에 서서 이야기하는 우리의 대화를 힘 안들이고 들을 수 있다.

성서 연구생들에게 흥미거리 한 가지는, 1961년에 이 극장을 발굴하면서 한 개의 비석을 발견한 사실이다. 거기에 ‘라틴’어 비문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던 당시의 ‘로마’ 총독 곧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한 비문으로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또 하나의 흥미있는 것은 원래 도시 지역의 북쪽 변두리에 있는 건축물이다. 그것은 잘 보존된 수로(水路)로서, 먼 곳에 있는 샘에서 도시의 우물과 샘에 물을 보급하던 물길이었다. ‘아아취’로 받혀 있고 경사가 완만하게 만들어져 있는 그 수로는 기술면에 있어서 걸작품이다. 모래 언덕이 그것을 최근까지 완전히 덮어 침식당하지 않도록 잘 보존해 주었다.

고고학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유물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만도 흥미가 있고, 성서 기록과 모두 부합되기 때문에 성서 기록이 신뢰성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소식은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심중한 주의를 기울여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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