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국의 30년 전쟁의 반향
현 20세기에 ‘가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당신도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간단히 역사 한편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관한 역사로는 17세기(1618-1648)에 독일을 휩쓸었던 30년 전쟁이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막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의 ‘가톨릭’ 교회의 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붙인 것은 30년 전쟁이 돌발하기 101년 전 1517년 10월 31일이었다. 그 개혁으로 인하여 연속적인 투쟁이 발생되어 여러 해를 끌었다. 결국 정치 문제는 1552년에 ‘파사우’ 조약에 의해 해결된 것같이 보였고, 다음에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은 종교적인 문제를 취급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스페인’계 황제이며, ‘프로테스탄트’를 완강히 반대하던 ‘찰스’ 5세는 협잡과 힘으로 ‘루터’교를 멸절하려다가 실패하여 이러한 조약에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강화 조약에서 ‘루터’파 제후(諸候)들이 획득한 양보 가운데는 각 군주(君主)는 자기가 영방(領邦)에 대한 종교를 자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등의 종교적 자유였다. 자기 군주가 가진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자기와 동일 종교를 가진 군주가 다스리는 곳으로 자유로이 이사할 수 있었다. 또한 ‘루터’ 교도들은 제국 법원의 판사도 되었다. 개종시키는 일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주교나 수도원장이 자기 종교를 변경하면 그의 영지(領地)에 대한 소유권은 ‘가톨릭’ 교회가 가진다는 점도 있었다.
이 조약의 결과, 어느 ‘라인’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연속 네번이나 바꾸던가 아니면 다른 제후가 다스리는 곳으로 이사해야만 하는 예도 있었다. 이 조약의 또 다른 약점은 ‘루터’파가 아닌 ‘프로테스탄트’ 즉 ‘칼벵’ 교도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함에 대하여 ‘루터’파와 ‘가톨릭’교 양편에 다 잘못이 있었다.
1519년 황제의 위에 오른 ‘찰스’ 5세는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된 이듬 해인 1556년에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2년 후에 사망하였다. 그 후에 일어난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들은 ‘프로테스탄트’의 번영을 막을 의양이 없었으며, 그중 한 황제는 상당한 호의를 가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신 가톨릭 백과 사전」 14권 98면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 났다. “‘예수’회, ‘캐퓨친’ 수도회, 및 ‘스페인’의 열정에 의해 자극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 황제들은 종교적 정복과 개종을 위해 군사적 정책을 취하였다. ··· 1618년 ‘보헤미아’인들은 황제의 통치가 자기네 주권과 [종교적] 특권을 억압한다고 비난하면서, ‘프라그’에서 왕의 대관(代官)을 창밖으로 내던져 힘으로 배척하였다. 그렇게 하여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자기네 종교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었는가? ‘보헤미아’의 대표들이 오만하고 거만한 왕의 대관들을 창밖으로 내던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창밖 축출”이라고 하는 것으로 항의를 나타내는 한가지 방법이다. 그들은 20‘미터’ 아래로 떨어졌지만 별 상처는 입지 않았다. 푹신한 퇴비 더미 위로 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독일에서 ‘가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 간에 30년 전쟁을 촉발시켰다.
‘보헤미아’인들과 ‘덴마아크’인들의 개입
‘보헤미아’인들이 무력으로 일어나서 처음에는 상당한 성공을 보아 황제군(皇帝軍)을 패배시켰다. 그들은 자기네 왕 ‘프리드리히’ 5세를 세우기도 하였는데, 이 일은 그들에게 큰 손실을 가져왔다. ‘보헤미아’인들이 배척한 ‘가톨릭’ 왕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얼마 안가서 ‘보헤미아’인들의 반역을 진압해버렸다. 그는 ‘예수’회 교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러한 전쟁에 적합한 기질이었다. ‘예수’회원의 말이나 승려의 말은 그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목소리와 같았으며, 이단(異端)의 영토를 통치하느니보다는 황무지를 통치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하였다. 어느 역사가가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독일을 거의 황무지와 같이 초토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이단’을 일소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형, 투옥 및 토지 몰수”라는 정책을 수립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는 “반항을 말살하고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약화시켰다.”—「신 가톨릭 백과 사전」a
‘보헤미아’인들의 전쟁기(期)는 1618년부터 1620년까지 계속되었다. 다음에 ‘덴마아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를 옹호하고 나섰다.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합스부르크’가가 종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는 이 양면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독일에 침입하였다. 하지만 ‘보헤미아’인들의 경우와 같이 그의 승리도 오래 가지 않았다. ‘가톨릭’ 연맹(‘프로테스탄트’ 연맹을 저항하기 위하여 결성된 연맹체) 군대의 사령관인 유능한 ‘카운트 틸리’와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용병(傭兵)과 함께 고용한 ‘발랜시타인’ 장군이 ‘크리스티안’ 왕에게 굉장한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평화를 애걸하면서 자기 나라로 철수해버렸다. 30년 전쟁중의 이 ‘덴마아크’와의 전쟁은 1625년부터 1629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이러한 연속적인 승리로 머리가 커진 ‘페르디난트’ 2세는 1629년에 ‘반환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광범한 종교적 해결책은 ‘가톨릭’ 운동의 절정을 나타낸다”고 위에 인용한 ‘가톨릭’ 학자는 말하였다. 그 칙령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과거 80년 동안 애써 얻은 이득을 완전히 강탈해버렸다. 그것은 복수로 자유를 역전시키는 행동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그것을 ‘예수’회의 사수를 받은 그의 개혁 일소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계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반항이 없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프로페스탄트’ 운동에 냉담하였던 몇몇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그들에게 닥치게 될 긴박한 위험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원군
3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에서 다음으로 독일 ‘프로테스탄트’의 편을 들고 나온 왕은 전쟁의 명수인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였다. 그는 전쟁이 12년이나 지난 다음에 개입하였는데, ‘폴란드’와 전쟁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일찍 개입하였을 것이다. 수는 적지만 훈련이 잘된 ‘스웨덴’ 군인 15,000명을 거느리고 1630년 6월에 도착하였다. 그는 자기 종교 신념에 따라 독일 땅에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으며, 부하 장병들에게도 매일 두번씩 공개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처음 그는 거의 협조를 받지 못하였다. 독일의 제후들은 그에게 냉담하였는데, 질투나 두려움을 가지고 그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그데부르크’ 도시의 함락(몇몇 독일 군주들이 그를 저항하지만 않았더라면 ‘구스타프’가 이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그는 좀더 협조를 얻기 시작하였다. 처음 ‘페르디난트’ 2세는 ‘구스타프’를 경멸하고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그를 따뜻한 지방에 도착하면 곧 녹아버리고 말 “눈사람 왕”이라고 칭하였으나 나중에 “눈사람 왕”이라고 한 그의 견해를 번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스웨덴’ 왕은 그의 군사적 수완과 철저히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연전 연승하였던 것이다. 그와의 전쟁에서 황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유능한 장군인 ‘카운트 틸리’도 전사하였다.
‘발렌시타인’의 용병(傭兵)이 자기네 영지에서 약탈한다고 불평하는 제후들의 요청에 따라 ‘페르디난트’ 2세는 이전에 ‘발렌시타인’ 장군을 파면시켰었다. 그들 용병들은 우방 지역, 원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약탈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스타프’가 성공하는 마당에서 ‘페르디난트’ 황제는 ‘발렌시타인’을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발렌시타인’은 대단히 높은 조건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가 주인이 되고 황제가 그의 종이 되었다는 말까지도 나돌았다. 그러나 ‘발렌시타인’과 같은 유능한 장군도 ‘구스타프’ 앞에서는 패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전투에서 ‘구스타프’는 생명을 잃었다.
‘마그데부르크’에서의 악행
‘마그데부르크’는 문자적으로 처녀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 도시는 자기네 역사를 자랑하는 ‘프로테스탄’의 도시였다. 그들은 여러 차례 ‘가톨릭’ 군대를 격퇴시켰으며, ‘가톨릭’ 황제 ‘찰스’ 5세의 통치 때만 1년 동안의 포위도 저항해내었던 것이다. 그후 1세기가 지난 지금 그들은 황제군(皇帝軍)의 항복 요구를 비웃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스타프’가 조만간 그들을 원조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틸리’ 장군과 ‘파펜하임’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그 도시를 1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그 도시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결과 그 도시는 함락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도시 자체내의 상태가 그의 함락에 책임이 있었던 것 같다.
‘마그데부르크’의 함락에 관하여 독일 역사가 ‘프리드리히 쉴러’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공할 만한 장면이 시작되었으니 그 역사를 묘사할 언어가 없고, 그 사건을 기술할 필묵(筆墨)이 없다. 천진한 유아도, 무력한 노인도, 젊음도, 성별도, 계급도, 아름다움도 정복자들의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남편들의 품안에 있는 아내들이 능욕을 당하였고, 딸들은 부모들의 발앞에서 능욕을 당하였다. 무방비한 여성들은 덕성과 생명이라는 이중의 희생을 당하였다. ··· 하나의 교회 내에 53명의 여인들이 목베인 체로 발견된 일이 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소아들을 불길 속에 던지는 것으로 낙을 삼았고 ‘파펜하임’ 장군하의 ‘월루운’인들은 유모의 품속에 든 유아들을 칼로 찌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가톨릭’ 연맹의 몇몇 관리들이 그 참상을 보고 공포에 질려 ‘틸리’ 장군에게 이러한 잔악상을 중지하도록 명령할 것을 제안하였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한 시간 후에 돌아 오시오. ··· 어떻게 해야겠는지 알아보겠읍니다. 병사들도 자기네가 무릎쓴 위험과 수고에 대하여 어느 정도 보상은 받아야지요.” 거리를 청결히 하기 위하여 6천구 이상의 시체를 ‘엘베’ 강에 던져 넣었으며, 훨씬 더 많은 수의 시체는 화장되었다. 약탈과 살륙은 화염에 의하여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뿐이었다. 사망자 총수는 30,000명으로 추산된다.
역사가 ‘트렌치’가 30년 전쟁에 대하여 기술한 말은 특히 ‘마그데부르크’에서 자행된 죄악상에 잘 적용된다. “그것은 실로 가슴아픈 ‘아이러니’이다. 시초에는 최상의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지고한 권익을 위하여 행한다고 주장한 이 전쟁이,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을 파염치하게 짓밟아버리고, 더욱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하여 현대 그리스도교국이 겪은 어떠한 전쟁보다 더 악독한 치욕을 돌리게 되었다.”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다
‘구스타프’는 1630부터 1632년까지 2년 동안에 ‘프로테스탄트’에게 유리하도록 전세를 뒤바꿔 놓았다. 그후 그들의 전세는 더 이상 불리하게 되지 않았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를 원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프랑스’ 왕좌의 배후에서 세력을 휘두르고 있던 ‘리첼류’ 추기경은 ‘합스부르크’가가 ‘유럽’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종교는 뒤로 물러가고 정치적 관심사가 점차 전면으로 대두되었다. 이 기간에 전쟁은 최악의 단계가 되었다. 양편 다 약탈을 자행하였다. 기근 상태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식인(食人) 행동이 만연되어 새로 매장한 무덤에서 시체를 도둑질맞았으며, 교수대(絞首台)에서 사형수를 도둑맞기도 하였고, 아이들과 죄수들이 원인모르게 행방불명이 되곤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질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이 심히 빈궁해진 것은 물론 인구도 3천만에서 1천 2백만으로 감소되었다.
양편 다 전투에 지쳐서 가끔 협상 의향을 나타낸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협상이 결국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낳게 하였다. ‘프랑스’와 ‘스웨덴’이 승리를 많이 거두었기 때문에 평화 조건에서도 발언권이 높았다. ‘프랑스’는 자기네가 크게 탐내던 영토를 얻었고 ‘스웨덴’은 영토에서도 이득을 보았지만 주로 종교적인 이득에 관심을 가졌다. 주로 그들의 노력의 결과 이전에는 종교의 자유를 즐기지 못한 많은 계층에게 그 조약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리하여 ‘칼벵’ 교도와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도들도 ‘루터’ 교도와 동일한 권리를 받았으며, 1629년 ‘페르디난트’의 ‘반환의 칙령’으로 무효화된 ‘아우그스부르크’ 조약에서 보다도 더 큰 권리를 허용하였다.
언제나 비그리스도교적인 그리스도교국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순히 흥미거리 역사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현재의 사건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아일란드’의 ‘얼스터’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두 공언한 그리스도교인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고 있다. 1970년 7월 13일자 「타임」 잡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8개월 동안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최악의 전투가 끝난 지난 주에도 ‘얼스터’ 위에는 분노의 먹구름이 도사리고 있었다. 7명 사망에 250명 이상이 부상하였으며, 상점과 술집에서는 폭탄이 터졌고 ‘버스’들은 뒤집혀 ‘바리케이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유. 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 1970년 10월 26일호는 ‘얼스터’의 어느 고급 관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이 나라는 통치불능이다.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백출이다. ‘얼스터’는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지역인데 지독히도 다스리기가 어려우니 이곳이야말로 역설적인 지방이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가톨릭’ 아니면 ‘프로테스트탄트’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다!
세계 다른 지방에서 역시 그리스도교국의 열매는 그리스도교인들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폭로하고 있다. 만연된 범죄와 폭력, 정치적 부패와 조직적인 탐욕, 마약의 상용과 도덕의 타락 등은 어디서나 현저하다. 그리고 특히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행되는 전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폭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이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요한 13:34, 35.
[각주]
a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프로테스탄트’ 고위 귀족 27명이 교수당하였고, 수천 가구나 재산은 몰수 당한 채 추방당하였고,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는 ‘가톨릭’에게 주어졌고, 대학교와 일반 학교는 ‘예수’회가 점유하였다. ···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사실상 말살되어버렸다. ···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에서 탈취한 재산만도 4천만 ‘플로린’에 달한다고 추산된다!”—History of Nations, Germany—Taylor and Fay, pp. 270,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