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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많은 사람들이 사제직을 싫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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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많은 사람들이 사제직을 싫어하는가?
  • 깨어라!—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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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1 12/8 12-14면

왜 많은 사람들이 사제직을 싫어하는가?

어느 나라를 가 보나 사태는 대동소이하다. ‘로마 가톨릭’ 사제들 중 많은 수가 사제직을 포기하고 있으며 신학교 지망자 수가 감소 일로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7년간 약 25,000명이 사제직을 떠났다.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자유 봉사 사제 협회 회장인 ‘유진 시. 비앙키’는 “사회학자들은 사제직의 지망자가 증가할 가망성도, 사제직 이탈자가 감소할 가능성도 예견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한 가지는 고위 교직체에서 사제들의 강제적 독신 규정을 완강히 고수하는 점이다. 사제들 중 특히 젊은 층에서는 강제 독신 규정의 폐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1971년 3월 14일부터 18일까지 미국 ‘매릴란드’ 주의 ‘볼티모어’에서 열린 전 미국 사제 의회 총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 사항을 다수결로 채택하였다. “우리는 현직 사제들에게 독신과 결혼을 선택할 권리를 줄 것을 요청하며, 그러한 변화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요청한다.”

그 회합에 참석한 사제들 약 90‘퍼센트’가 1967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사제들의 독신 생활”이라는 회칙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제들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승진할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그들의 입장은 강력한 감정을 반영한 것이며, 많은 수의 사제들의 감정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평균 연녕 39세인 이 사제들은 전 미국 사제들의 60‘퍼센트’ 이상을 대표한 것으로 추산된다.

사제들의 독신 생활에 대한 고위 교직체의 주장이 격렬한 논쟁점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제들이 자기들의 위치를 떠나고 사제들을 지망한 사람들의 수가 감소되고 있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사제들의 강제 독신 생활 규정은 여러 세기 동안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렇게 많은 사제들이 그것을 이처럼 반대한 일이 없었다. 2년전까지 자유 선택에 의한 독신 사상을 반대하던 사제들까지도 생각을 변경시키고 있다.

사제들의 이러한 주장이 성서의 명령을 반대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상, 「가톨릭 백과 사전」(1908년 3권 481면)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신약에서 우리는 사도들에게나 사도들의 임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독신 생활이 강요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주교’와 ‘부제’(副祭)는 “한번만 결혼한 자이어야 한다”고 말한 티모테오 전 3:2, 12과 티토 1:6에 나오는 ‘바울’의 지시에 대해 논평하면서 위의 백과사전(3권 483면)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귀절은 독신 생활이 시초부터 교직자들에게 의무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치명적인 타격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 이 사도의 말(코린도 전 7:7-8, ··· )은 모든 복음 전도인들이 결혼할 것을 그가 원하였다는 결론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합당한 사제 후보자는 사도 ‘바울’이 언급한 다른 성품들—그의 권위가 존경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성품들—외에도, 이혼이 잦았던 그 당시에 한 아내에게 충실히 고착함으로써 안정된 성품을 나타내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

“이 초기 시대에 교회가 고급 봉사자 전원에게 독신 생활을 요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몇 저술가들이 부단한 노력을 크게 기울였으며, 그 중 작고한 ‘비켈’ 교수가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펑크’와 ‘크라우스’ 등의 학자들이 주장한 그 반대 견해가 보다 근거가 뚜렷한 것 같으며, 근래에 전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제도상의 불만

강제적 독신 규정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그 많은 사제들은 사실상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 제도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직을 유망한 천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그것을 지망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버리고 나오는 사람들은 현 제도가 자기들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히는 진정한 의욕이 있고, 또한 현재의 표준에 따라 사제가 되는 것이 그 의욕을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사제가 될 것이며, 사제직을 계속 누릴 것이다. 최근 연구에 의하여, ‘가톨릭’ 교직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현 제도—상급자와의 의견 대립, 부적당한 통솔, 동료 사제들의 지지의 결핍, 교회가 어떤 도덕 문제에 대해 취하는 입장에 대한 불만 등—에 대한 불만에 핵심을 두고 있음이 밝혀진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신앙과 신념 문제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이점이 ‘가톨릭’ 잡지 「코몬웰」지에 강조되었다. 그 잡지 1970년 2월 13일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성직자들의 문제는 단순히 신앙과 신념상의 커다란 위기 및 사제직이 다른 직업보다 가장 유익한 천직이라는 제도적인 확신과 신뢰성에 대한 커다란 위기의 노출에 불과하다. ···

“독신 규정이 개정된다면 결혼하기 위하여 자기 지위를 떠난 많은 사제들은 ‘정통’ 교회 안으로 돌아오겠지만, 그들 전부가 돌아오거나 그들중 다수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정이 현재 직업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두드러진 영향을 줄것이냐는 극히 의심쩍은 문제이다. 설령 사제직이 그들에게 다처주의의 특권을 허용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신앙과 신념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이 문제가 ‘로마’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문제일 것이다. 내일이라도 당장 독신 규정을 개정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난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체 남아 있게 된다. 교회의 전반적인 고통을 치료할 방법, 곧 만능약이 없다.

“어느 면에 있어서는, ‘로마’가 구식 전통에 고착해야 할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독신 규정의 개정에 대한 함성이 나오고 있지만, 당장 변경시킨다고 하더라도 무슨 이득이 있을 것인가? ‘로마’가 제도적인 이득을 위하여 압력에 굴복하였다고 하는 냉소적인 비평밖에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존재해 왔는데, 이제 와서 사제가 되고 사제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신앙과 신념을 넣어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톨릭’ 교회 자체가 신앙과 신념에 대해 그의 기초부터 침식 당해 있기 때문인가? 교회가 어떤 도덕 문제에 대해 취하는 입장에 많은 사제들이 실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인가?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 후 3:16, 17)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은 성서가 올바른 가르침과 행동에 대한 표준이 되어야 함을 암시하지 않는가? 따라서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실은 또 하나의 질문을 야기시킨다. 곧 ‘가톨릭’ 교회는 성서에 들어 있는 진리를 가르쳐왔으며, 성서의 영감성을 옹호해 왔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가톨릭’ 교회와 다른 교파에서는 영혼이란, 사람의 불멸적인 영적 부분이요 몸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 부분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인가? 「신 미어 성서」(‘와싱턴’ 대주교, 신학박사 ‘패트릭 카디날 오보일’의 출판 인가를 받음)의 “성서 신학용어편”에서는 “영혼”(soul)이라는 단어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신약에서 ‘어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다’라는 말은(마가 8:35) 그의 ‘몸’(‘플라토닉’한 의미로)에 반대하여 그 사람의 ‘영적’ 부분만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 사람이 살아 있고, 욕망이 있고, 사랑을 하고, 의지가 있으며, 구체적이고 신체적(“몸” 참조)이라는 사실에 중점을 둔 그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영혼과 몸은 서로 반대되는 면도, 차이도 없으며, 그것들은 단순히 하나의 구체적인 실재를 묘사하는 두개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몸”(body)이라는 표제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성서에서는, 영혼의 반대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전부, 인간 전체이다. ‘희랍’어의 의미에 있어서 영혼과 몸을 구별짓는 것은 성서에는 없는 일이다.”

‘가톨릭’ 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영혼과 몸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는데,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또 말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들이 배운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 들어 있는 내용에 위배된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침식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당신이 여태까지 사람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왔다면, ‘가톨릭’의 공식 출판물에서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내용을 읽었을 때 어떻게 느끼겠는가? 당신은 다른 많은 것들도 성서와 불일치한 점들을 배우지나 않았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되지 않겠는가?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교리만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영감성까지도 의심하였던 것이다. 신학자 ‘한스 퀸’이 논한 점들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회(會)의 ‘그레고리 바움’은 최근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과거에 우리는 성경이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내용의 착오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좀더 비평적이고 역사적인 연구 결과 성서 내에 착오가 많이 밝혀졌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을 받아서 오류가 없는 부분과 영감을 받지 않아서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성경 전체가 영감을 받았으며, 전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해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착오를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것이다. 미래의 세대는 그릇된 개념들을 더욱 더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처음에는 ‘가톨릭’교인들 간에 경악과 분노를 일으켰고, 고위 교체직로부터도 소극적인 반응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교회도 그 점을 인정하였고 교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가톨릭’ 교회가 자기네 스스로 비성서적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교리들을 가르쳐 왔고, 이제 와서는 심지어 성서가 오류 투성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점을 생각할 때에,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것이 있겠는가? 그 교회가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고 모든 면에서 성서의 표준을 밀접히 고수하였다면 문제가 달라졌을 것인가?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성서에서 지지하지도 않는 사제들의 독신 생활 문제가 논쟁점으로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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