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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교국이 삼위일체를 받아 들이게 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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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교국이 삼위일체를 받아 들이게 된 유래
  • 깨어라!—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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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3
깨73 4/8 10-13면

그리스도교국이 삼위일체를 받아 들이게 된 유래

제2회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 분열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아무런 변화도 원치 않는 편과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급해 하는 편으로 나뉘게 되었다. 어느 ‘예수회’ 출판물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어떤 ‘가톨릭’ 교인들 보기에는 변화가 너무 크고 너무 빠르며, 그들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이 느껴진다. 또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변화가 너무 미미하고, 너무 느려서 그 속도가 빨라질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가톨릭’ 교회의 최초의 공의회는 기원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렸으며, 그때에 ‘가톨릭’ 교회 내에 커다란 논쟁이 시작되었다. 무엇에 관한 논쟁이었는가? 그 때의 쟁점은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였다.

그때의 상태에 대해 현대 역사가 한 사람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두 집단의 신학자들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사실상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그 두 집단이 2세기 동안(그 이상!) 신학적, 정치적 적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부감독인 ‘아다나시우스’가 인도한 ‘정통파’ 집단과, 같은 교회의 부제 ‘아리우스’의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된 ‘아리우스’파가 곧 그것이다. ··· 교리적으로 말해서 ‘아다나시우스’파는 삼위일체론자들이었으며, ‘아리우스’파는 유일신론자들이었다.” 본부를 ‘로마’에 둔 서부 ‘라틴’ 지방은 거의 전부가 ‘아다나시우스’파였으며, 희랍의 영향을 받은 동부의 ‘로마’ 제국은 대부분이 ‘아리우스’파였다. 이 지방은 결국 ‘콘스탄티노풀’이 본부가 되었다.

‘아리우스’파는 무엇을 믿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보다 후에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고 본질이 그분과 다르다”는 교리를 주장하였다.a

그러면 삼위일체론자들은 무엇을 믿었는가? 그들의 교리는, 현재의 설명대로 하면 “한 신성 안의 세 인격”으로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및 성신 하나님’이 모두 본질이 같고, 동등하며, 다같이 창조되지 않았고 전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가 점차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뉴맨’ 추기경은 ‘콘스탄틴’ 이전의 신경(信經)에서는 그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 “그들은 사실 셋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교리내에 오묘가 있다든가, 셋이 하나라든가, 그들이 동등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모두 창조되지 않았고 모두 전능하고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명시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서 그 점을 수집할 수 없다.”—「그리스도교 교리 발전론」 15면.

현대 ‘로마 가톨릭’ 권위자 한 사람도 동일한 점을 증거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와 있는 지금, 삼위일체 신비의 계시, 교리적 진화 및 신학적 복잡성 등에 대해 명료하고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설명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심하게 제한을 두지 않고서는 신약 내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 제한을 두지 않고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초기에서 4세기 말엽으로 옮겨간 것이다.”—「신 가톨릭 백과 사전」(1967년) 14권 295면.

‘콘스탄틴’과 ‘니케아’

‘콘스탄틴’은 소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공언하였다. 그것은 의심할바 없이 종교적 요인만큼 정치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리적 분열을 보고서 대단히 당황하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의 연합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최고 승원장 즉 종교 최고 통치자로서 기원 325년에 최초의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때까지 그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그는 그 공의회를 주재하였다. 이 회의에는 318명 정도의 주교밖에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들의 수행원들까지 합하여 참석자는 1,500 내지 2,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약 2개월 동안 삼위일체론자들과 ‘아리우스’파가 논쟁을 벌였으며, 삼위일체론자들은 종종 아주 극단적인 전술을 쓰기까지 하였다. ‘콘스탄틴’은 삼위일체론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을 보고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주교들 사이의 반대를 말살하였으며, 파문하겠다는 위협으로 참석자 모두에게 서명을 요구하였다. ‘리비아’의 두 주교만이 그것을 거절하였다. ‘아리우스’와 그에게 충성을 견지한 두명의 사제들은 ‘일리리굼’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지방은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서부이다. ‘아리우스’의 저서들은 몰수, 소각되었으며, 그것을 소지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아다나시우스’와 그의 삼위일체론자들의 승리는 단명하였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삼위일체론자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린 ‘콘스탄틴’은 정치적 판도가 달라지면 달리 변할 소지가 충분하였다. 얼마 후에 ‘콘스탄틴’이 자기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겨 거기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풀’을 건설하였을 때에 그처럼 변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아리우스’ 사상이 강하였으며, 이 지방에서 온 주교들은 오직 두려움 때문에 ‘니케아’ 선언문에 서명을 하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풀’에서의 주도적인 주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어스’는 ‘아리우스’파였으며, 그는 ‘콘스탄틴’으로 하여금 교리를 바꾸게 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삼위일체론자들이 추방을 당하였다. 335년에 ‘콘스탄틴’은 ‘아다나시우스’를 ‘골’(프랑스)의 ‘트레베’로 추방하였다. 그렇게 한 후 ‘콘스탄틴’은 죽기 직전에 ‘아리우스’파 주교인 ‘유세비어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을 자기의 상속자들인 몇명의 조카들과 세 아들들 즉 ‘콘스탄틴’ 2세, ‘콘스탄시우스’, ‘콘스탄스’에게 물려 주었다. 아들들은 즉시 다른 상속자들을 제거한 다음,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싸웠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자는 ‘콘스탄시우스’였다. 그는 독실한 ‘아리우스’파였으며 삼위일체론자들인 자기 형제들이 죽자 동서를 막론하고 그 제국 전체를 점차 장악하였다. 그는 ‘아리우스’ 사상을 높이기 위해 삼위일체론을 지지하는 주교들을 ‘아리우스’파 주교로 대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당시 이교 역사가 한 사람은 그러한 경질을 “큰 길은 뛰어 가는 주교들로 뒤덮였다”고 비꼬았다.

마침내 삼위일체론자들이 승리하다

그러나 이 ‘아리우스’파의 세도는 ‘콘스탄시우스’가 죽을 때까지 밖에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삼위일체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단’이 “이 세상 신”이므로 일반적으로 진리보다는 오류가 더 인기가 있다. (고린도 후 4:4) 또한 ‘아리우스’파가 실패한 것은 그들 자신이 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공동 진술서 즉 신조를 만들지 않았으며, 상소를 할 수 있는 통치체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열되었으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이 어떻게 서겠는가?—마태 12:25.

그러나 삼위일체론자들이 ‘아리우스’파에 대해 승리한 이유 중 아마 다른 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은 이유는 삼위일체론자들이 자기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곧잘 폭력과 힘을 사용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리우스’가 나가서 연설할 때에 ‘미라’의 ‘니콜라스’라는 사람은 그의 뺨을 쳤다고 하며, ‘아리우스’가 연설하는 동안 삼위일체론자 주교들 많은 수가 이단 교리에 놀란양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고 한다. 또한 삼위일체론자들의 전형적인 편협한 태도는 ‘밀란’의 주교 ‘암브로스’가 조종한 연좌(連坐) ‘데모’일 것이다. ‘발렌티니안’ 황제가 명령한 대로 그 도시의 교회 건문들이 하나라도 ‘아리우스’파에게 넘어갈가 하여 ‘암브로스’는 자기 교인들이 밤낮 2주일 동안 교회 건물 안에 남아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여 결국 황제가 자기의 요구에 굴복하게 하였던 것이다.

삼위일체론자들이 ‘아리우스’파에 대항해서 편협한 폭력을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또 비슷한 증거는 대단히 유명한 ‘게르만’의 ‘야만인’ 통치자 두 사람의 대조적인 말에서도 볼 수 있다.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는 ‘로마 가톨릭’ 정통 사상을 받아 들여 삼위일체 신봉자가 된 사람인데, 그는 ‘아리우스’파의 ‘비시코트’인을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들 ‘아리우스’파가 ‘골’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으니 내 가슴이 아프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쳐들어 가서 그들을 정복하자.”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정복하였다. 이러한 편협의 씨를 심은 결과 거둔 수확은 기록에 의하면 이러하다. “그것은 타락한 왕들과 앙심깊은 왕후들의 잔혹하고 탐욕적이고 반역적인 이야기이다. 교황 ‘그레고리’는 그들이 ‘가톨릭’ 정통 사상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하였다.”

정통파 ‘클로비스’의 편협한 태도와 크게 대조되는 ‘오스트로고트’의 왕인 ‘아리우스’파 ‘데오도릭’이 있었다. 그는 동부의 ‘로마’ 황제 ‘제노’로부터 ‘이탈리아’ 반도를 점유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의 동서부 전역에 대한 ‘제노’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왕이 그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데오도릭’은 ‘이탈리아’를 정복하였으나 종교에 관한 자기의 방침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종교란 왕이 명령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자기 의사에 반대되는 것을 믿도록 강요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또 하나의 요인은, 남자들이 수도원에서 독신 생활을 하도록하는 수도원 제도였다. ‘아다나시우스’는 수도원 제도를 제창한 최초의 저명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였다. 승려들은 삼위일체의 요새였을 뿐 아니라 언제나 삼위일체 신앙을 위한 열심에서 폭력을 잘 사용하였다.

동부 지방이나 서부 지방을 막론하고 ‘로마’ 제국을 침략한 ‘게르만’ 군인들이 다 ‘아리우스’파였다는 사실 또한 삼위일체론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들 ‘야만인’들이 어떻게 하여 ‘아리우스’파가 되었는가? 그들이 ‘아리우스’파 주교 ‘울필라스’에 의해 개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 사상을 옹호하는 것은 이들 침략자들을 동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아마 ‘아리우스’파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사람은 ‘데오도시우스’ 황제였을 것이다. 그는 기원 391-392년에 공식 명령을 내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가톨릭’ 정통 사상을 주입하였으며, ‘아리우스’파와 모든 이교도들에게서 숭배의 집을 박탈해 버렸다. 한 역사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단(‘아리우스’파)과 이교 사상에 대한 교회의 합법적 승리와 박해 받던 종파에서 박해하는 국교에로의 진화는 완성되었다.”

‘아리우스’파 ‘야만인’들

5세기 이후로는 ‘아리우스’파 ‘로마’ 황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적 종교로서의 ‘아리우스’ 사상의 종말이 되지는 않았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데오도시우스’가 죽은 후에 ‘로마’는 다시 북쪽에서 침공해 들어오는 ‘아리우스’파 침략자들로부터 괴로움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학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얼마의 박해를 받기는 하였지만, 이 형태의 그리스도교(‘아리우스’파)는 ‘고토’족으로부터 이웃 민족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 그들이 서쪽을 침략하여 여러 ‘게르만’ 왕국을 설립하였을 때에 대부분의 부족들은 ‘아리우스’ 사상을 자기네 국교로 지정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로마’인들 중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파를 따른 사람들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점차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아리우스’ 사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때로는 ‘게르만’적인 모든 요소들을 일소하는 군사 활동에 의해 이 일을 달성하였다.” 이 일은 ‘주스티니안’ 황제의 통치 때에 있었다. 그는 ‘로마’ 제국을 이전의 영화로운 상태로 회복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아리우스’파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까지도 박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것까지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주스티니안’은 ‘아리우스’ 사상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였다. ‘로마’는 아직도 ‘게르만’의 야만인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다. ‘주스티니안’이 죽은 지 몇년 후에, 모든 ‘게르만’ 부족 중에서 가장 극렬한 부족 중의 하나라고 하는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였다. 얼마 안가서 그들이 ‘이태리’ 반도의 반 이상을 장악하였다. 그러다가 7세기 중엽 ‘롬바르드’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점차 삼위일체론의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되었으며,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하여 교황에게 두통거리가 되기는 하였지만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혹은 영토에 관한 문제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의 투쟁으로 지배권의 성쇠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신학적인 논쟁보다는 정치적 변동과 민간의 지배권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권위자가 말한 바와 같이 ‘아리우스’파가 “2세기 이상 더 계속되었지만, 선택과 확신이라기보다는 우연히 그러한 것이다.” 또한 ‘아리우스’파의 그러한 모든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활동 사실은, 비정치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아리우스’파라고 하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입증한다.

삼위일체론자들과 ‘아리우스’파 사람들의 정치 활동에 관한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장차 그리스도인 회중에 발생될 일을 얼마나 정확하게 예언하였는가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비유 가운데,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말씀하셨다. 그 결과 원래의 곡식 밭이 잡초가 자라는 곳이 되어 버렸다. (마태 13:25) 그리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탐욕과 폭력을 행사하였는가를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이 이러한 사건들을 얼마나 잘 예언하였는가를 인식하게 된다. “내가 떠난 후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리라.]” 이들 이리 떼 중에는 삼위일체론자들과 ‘아리우스’파가 다 포함되며, 그 중에서도 전자는 더욱 악독하였다!—사도 20:29.

[각주]

a ‘아리우스’파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요한 14:28; 골로새 1:15-17; 디모데 전 1:17; 계시 3:14로 보아 분명하다.

[11면 삽화]

‘프랑스·타그논’의 ‘가톨릭’ 교회에 있는 삼위일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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