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야훼” 혹은 “여호와”?
이름은 중요하다. ‘하바드 대학교’의 연구진은 사람들은 타인이 지니고 있는 개인의 이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에게 지어준 이름도 그들에게 좋게든 나쁘게든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성서를 연구해보면, 성서의 저자께서도 자신의 이름의 가치를 중시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여러 가지 칭호 가운데는 “참 하나님” “지존자” “주권자 주” “위대한 창조주” “영원하신 왕” 등이 있다. 이러한 칭호에 부가하여 그분은, 때때로 ‘테트라그래마톤’이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명칭 즉 이름을 가지고 계시다. 그것이 그렇게 지칭되는 이유는 그 이름을 구성하는, 영어 글자 YHWH, 혹은 “여호와”(영어로는, Jehovah)라는 이름의 기초를 이루는 자음들인 JHVH에 상응하는 4개의 ‘히브리’ 글자 때문이다.—창세 5:22; 시편 83:18; 69:6; 전도 12:1; 디모데 전 1:17, 신세.
그러나 이 ‘테트라그래마톤’을 어떻게 발음하여야 하는가? 고대 ‘히브리’어에는 모음 문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발음은 구전으로 전승(傳承)되어 왔었기 때문에 이 ‘테트라그래마톤’의 정확한 ‘히브리’ 발음은 잊혀지고 말았다. 대체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형태는 두가지가 있는데 두째 음절에 ‘액센트’가 붙은 “야훼”(Yahweh)와 “여호와”이다. “여호와”라는 형태에 관하여, 예수회 소속 필자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 ‘야훼’의 오기(誤記)인, 16세기식의 “여호와”로 기록되는 것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라고 기술하였다.—「아메리카」지, 1971년 11월 27일호, 460면.
동일한 취지로 「신 ‘가톨릭’ 백과 사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의 거짓 형태. 여호와란 이름은 주후 13세기에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아마 이미 얼마 동안 사용되어 왔던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7권, 863면) 이와 마찬가지로 「개역 표준역」 성서 번역자들도 “여호와”란 형태를 배척하여, “‘여호와’란 단어는 ‘히브리’어에 사용되어 온 어떠한 형태의 하나님의 이름도 정확하게 대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름이 원래 ‘야훼’라고 발음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아주 확실하지는 않을지라도 거의는 분명하다”고 언명하였다. (6면) 또한, 「‘예루살렘’ 성서」라고 알려진 현대 ‘가톨릭’ 번역도, ‘로더함’의 「‘엠퍼사이스드’ ‘바이블’」과 마찬가지로 “야훼”란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들을 고려할 때, 여호와의 증인들이 “야훼”보다는 오히려 “여호와”를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가지 이유로 심지어 “야훼”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정확한 원발음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여호와”란 형태는 “야훼”가 지니지 못한 보편적인 통용성과 친숙성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는 일종의 번역 즉 변형인데 반하여 “야훼”는 분명히 일종의 음역이며, 성서에 나오는 이름들은 대체로 음역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변형되었다. 어떤 올바른 이름이 다른 언어로 음역되었을 때 그것은 그 음역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보통이다.
“여호와”란 형태를 사용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들이 있음은, ‘프로테스탄트’의 「개역 표준역」과 ‘로마 가톨릭’의 「신 ‘아메리카’ 성서」에는 “여호와”란 이름이 나오지 않는 반면, 「신 영어 성서」의 번역자들은 전혀 동요나 위축됨이 없이 그것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번역에 의하면 출애굽기 3:15, 16과 6:3의 기록은 이러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것, 즉 너를 그들에게 보내신 분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말하여야 한다. ···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나타나셨음을 말하라.” “내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알게 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동 번역의 번역자들은 다음과 같은 난외주를 부기하였다. “그 ‘히브리’ 자음들은 아마 ‘야훼’라고 발음은 되겠지만, 전통적으로 ‘여호와’라고 읽혀지고 있는 YHWH이다.”
이 점을 더욱 보충해 주는 것으로서 이 문제에 관하여 저명한 영국의 성서학자 ‘제이. 비. 로더함’의 설명을 들 수 있다. 특히 이것은 그가 ‘테트라그래마톤’을 음역하는데 “야훼”란 형태를 사용한 동류의 개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커러져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흥미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엠퍼사이스드 바이블’」은 1897년에 발행된데 반하여, 그의 저서 「시편 연구」(Studies in the Psalms)는 그가 사망한 후인 1911년까지는 발행되지 않았다. 이 후자의 저서에서 ‘로더함’은 다시금 “여호와”를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은 그가 자기의 「성서 요론」의 서문에서 “여호와”란 형태를 아주 완강하게 배척하였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주 특기할 만한 일이다. “여호와”란 형태로 복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자기의 「시편 연구」의 서문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여호와—금번 시편의 번역에서 그 기념명(記念名, 출애굽 3:18)을 나타내는데 동 영어 형태를 사용한 것은 더 정확한 발음이 ‘야훼’라는 사실에 대한 어떤 의혹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고, 명시된 바 하나님의 이름의 용이한 식별이 주가 되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에 있어서, 대중의 눈 및 귀와의 연결을 유지시키려는 염원의 부름에 응하여 개인적으로 선택한 실제적인 증거들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다. ··· 그 이름의 의미심장함의 주된 증거는 그 전체성 내지는 완성—그 형태는 그 전체성과 관련된 모든 증거들, 특히 기념명이 어떻게 그러한 것이 되기에 합당한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제반 요구 조건들에 부합된다—에 있는 정도 만큼, 발음에도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므로, 또한 이미 자명해진 사실 그대로 탁월한 언약의 이름이 되기 위하여는 성서를 읽는 일반 대중에게 더 친숙한 (동시에 완전한 용인성(容認性)을 지닌) 형태의 이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바랄 만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로더함’은, 중요한 것은 더 정확한 발음이 아니라, “명시된 바 하나님의 이름의 용이한 식별”이며, 그로 말미암아 “완전한 용인성을 지니고” 있고 또한 “그 독특성의 제반 요구 조건에 부합되는” 이름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성서를 읽는 일반 대중”과의 더 나은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비슷한 취지로 ‘에스. 티. 바잉턴’은 「현용 영어 성서」(The Bible in Living English)에 붙인 그의 서언에서 “철자법과 발음은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한 개체의 이름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이름을 ‘주’같은 보통 명사로 번역한다면 올바로 이해할 수 없는 몇몇 귀절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 23:24) 어떻게 그러한가?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그들은 그것을 혹시 사용은 한다하더라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하나님” 혹은 “주”라고 부르길 더 좋아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한 것들은 “주들” 또는 “신들”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한 칭호에 불과한 것이다.—고린도 전 8:5, 6, 새번역.
성서의 저자께서 자신의 독특한 이름을 얼마나 중시하시는가 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칭호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자주 즉 ‘히브리’어 성경 가운데 총 6,961회나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서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분의 관심 정도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표현이 그 성경 가운데 75회 이상 나온다는 사실에서도 또한 볼 수 있다.
그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 분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는 이루어지게 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특별한 이름은 그 분이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그 분이 목적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다.—이사야 5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