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힌두교 출신이다
1968년에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인도 ‘잠나갈’에 사는 가족을 만나러 왔다. 벗들이 나를 위해 잔치를 배풀었는데, 아버지의 종교 교사인 ‘스와디 트리베니푸리’도 거기에 참석하였다. 식사 후 그는 최고의 신에 대하여, 그리고 ‘힌두’의 삼신 ‘트리물티’와의 그의 관계에 대하여, 살위일체의 세 얼굴의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였다.
“‘힌두’교인들이 숭배하고 있는 형상들은 단순한 우상이 아닙니까? 그러한 것들을 숭배하는 것은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최고의 신에게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좋은걸세.”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형상들은 사실상 최고의 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아닙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상 그 자체를 신들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저 평민들 뿐이지” 하고 말하면서 그는 논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옳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무식한 사람이 아님을 안다. 어머니는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얻은 분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사원에 갈 때면 신을 ‘두루산’하러 간다고 말하곤 하셨다. ‘구자라티’어로는 ‘두루산’이라는 말이 “본다”는 뜻이다. 어머니께서는 문제를 그렇게 이해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돌덩이 곧 우상이 거기 있기 때문에 신을 보기 위해 사원에 가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우상 그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보셨고 내게도 그렇게 가르치셨다.
‘힌두’ 교육을 받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빗바잔’ 사원을 방문한 기억이 있다. 어린 아기 때부터 나는 ‘힌두’ 숭배를 익혀왔다. 걸음걸이를 시작하기 전부터 어머니께서는 나를 사원에 데리고 가셨다.
대여섯 살 되어서부터는 나 혼자 사원에 가곤 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 먹기 전에 사원엘 걸어가든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신을 벗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 여러 신들 앞에서 숭배를 하는 것은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언제나 외경감과 숭앙의 정을 느꼈다.
의자가 없는 조그만 ‘홀’에 들어가서 나는 ‘시바’ 형상 앞에 무릎을 꿇고 ‘시바’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절을 하곤 하였다. 나는 속으로 ‘시바’에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게 해 줄 것과 부모님을 건강하게 해 줄 것 등등을 기원하였다. 사원 안에서는 아무도, 심지어 승려들도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원을 방문하는 일은 10분 내외로 끝났다. 그리고 나서는 약 다섯 구획 떨어진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곤 하였다.
‘잠나가’에 있는 나의 집
부모님의 집은 ‘스와미나라얀’ 가의 ‘무쿤드 빌라’에 있다. 방이 20여개나 되는 큰 집으로 인구 150,000명 정도 되는 ‘잠나갈’ 시에서 반 구획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그 집에서 1946년에 태어나 할아버지, 양친 그리고 네 남매와 함께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는 인도 ‘사우라스트라’ 주(지금은 ‘구자라트’ 주에 소속되었음)의 농무 장관을 지내었다. 아버지는 법학을 공부하셨지만 변호사가 되지 않고 사업을 하여 두개의 공장의 공동 소유자가 되셨다. 공장 하나는 ‘봄베이’에, 다른 하나는 ‘잠나갈’에 있다.
우리 집에는 길고 좁은 방 곧 절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우상 신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신 목욕을 해야만 하였다. 다리를 꼬고 신들 앞에 앉는 방법과 모든 잡념을 제거하는 방법을 나는 배웠다. 잡념을 제거하는 한가지 방법은 “하레 크리스나, 하레 크리스나” 하는 식으로 신의 이름을 계속 외우는 것이라고 부모님께서는 설명해 주셨다.
후에 나는 ‘가톨릭’ 염주와 비슷한 갈색 돌로 만든 염주를 받았다. 그것은 염주 알을 하나 움직일 때마다 신의 이름을 반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 욕망
규정된 대로 종교 활동을 충실히 하였지만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궁금하였다. 하나님은 인격체인가? 사람에 대한 그분의 뜻은 무엇인가? 어렷을 때에는 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힌두’교인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자녀들에게 종교 교육을 시킬 만한 기초가 없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도와 주려고 노력하셨지만 오히려 혼란만 일어났다. 예를 들면,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오, 하나님!” 하고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이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의아스러웠다. 우리 집안에는 신의 형상들이 수십개나 있었고 방마다 몇 개씩 있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도 종교 문제를 공부할 길이 없었다. 인도에서 4억을 넘는 ‘힌두’교인 절대 다수가 ‘힌두’교에 대한 종교 교육을 받을 마련이 없다. ‘힌두’교 사원은 종교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 있는 승려들은 종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일이라야 사원과 그 부지를 관리하고 아침에 대문이나 방문을 열고 밤에 닫으며,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숭배자들에게서 예물을 받고 하는 것뿐이다.
‘힌두’ 승려들은 어떤 학교에서 공부를 하여 그러한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승려의 아들이면 그저 승려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에게는 놀랍게 보일지 모르지만 ‘힌두’ 승려라고 일반 ‘힌두’교인들보다 종교 지식이 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점에 있어서는 무식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내 의욕을 만족시켜 줄리가 없었다.
죽은 후의 생명
‘힌두’교의 주된 사상은 생명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는 사상이다. 저명한 ‘힌두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인간 영혼은 영원하며 불멸이다. ··· 영혼은 거듭 나고 거듭 죽음에 따라 위로 향상하거나 아래로 하락한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힌두’교인들의 일상 태도와 습관에 깊이 박혀 있다. 예를 들면, 나의 어머니께서는 우리 지붕 위에 새들을 위해 먹이를 놓아 주곤 하셨다. 그러면서 설명하시기를, “이러한 새들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죽은 영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의 친절을 감사할 것이다” 하곤 하셨다.
또 많은 소들이 ‘잠나갈’ 길거리를 자유로이 활보한다. 한번은 여섯살 되었을 때에 우리 집 대문이 열려 있어서 소가 몇 마리 들어왔다. 내가 소를 몰아내야 하였기 때문에 막대기를 들고 때려서 쫓아냈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심히 꾸지람을 하셨다. “소를 때리면 안돼! 소는 거룩하단다!” 소 안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힌두’교인들이 모든 동물을 존중하는 태도는 이따금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며 설명하기 곤란한 입장을 낳기도 한다. ‘힌두’교인들의 쥐덫은 서양 사람들보기엔 이상하게 생겼다. 조그마한 상자처럼 생겼는데 먹이를 찾아 그 안에 들어가면 문이 닫혀 산 채로 잡히게 된다. 우리가 쥐를 잡으면 어머니께서는 내게 길거리에 가지고 나가서 풀어주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러나 집안으로 다시 들어올텐데요” 하고 말했더니 약간 멀리 가서 풀어 놓으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큰 문제는 파리와 곤충들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면 누군가 한 사람이 서서 파리를 날려야만 하였다. 파리가 다칠 정도로 심하게 날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음식물에서 도망가도록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파리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도 인간 영혼이 윤회한다고 믿었으며, 거듭 태어날 때마다 더 높은 지위로 상승하는 것을 목표로 믿고 있었다. 밤이면 지붕 위에서 함께 앉아 할아버지께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결합하는 것 곧 열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곤 하였다. 납득이 잘 안가는 이 사상은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혼란만 야기시킬 뿐이었다.
‘구루’는 도움을 줄 수 있었는가?
열반 사상 때문에 나는 ‘힌두’교에서 지성적으로 발전해야겠다고 확신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해 ‘구루’ 즉 개인 교수가 필요하였다. 아버지께서 먼저 자신의 개인 교수를 구하신 일을 나는 기억한다. 아버지께서는 여러 ‘구루’를 집에 초대하여 본 다음 그 중에서 선택하셨다. 그들을 초대하여 저녁이나 점심을 나누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나는 어렸었지만 때때로 함께 앉아서 듣곤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께선 가장 좋아하시는 ‘구루’를 선택하셨다.
‘구루’란 ‘힌두’교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먼저 ‘구루’의 제자로 그들을 섬기는 일부터 시작한다. ‘구루’들은 보통 교육 수준이 낮은 ‘힌두’교인들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힌두’교의 경전에 관하여 각각 ‘구루’로부터 교육을 받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신에 대한 개념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분들은 우상 배후의 신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하셨으며, 우상들은 실상 신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밤에 지붕에 올라 앉아 할아버지께서 ‘브라마’, ‘비시누’, ‘시바’로 구성된 삼신 곧 ‘트리물티’에 관해 설명하시던 일을 나는 기억한다. “그들은 실상은 한 신이다. 최고의 신은 한 분뿐이야” 하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모순 투성이같이 보였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우상에 절을 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참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므로 어느 땐가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는 동안 부모님께서는 내가 세속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하셨다.
세속 지식을 추구하다
부모님들은 교육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두살 되었을 때부터 나를 위해 특별한 가정 교사를 두었다. 그분은 국민 학교 교장이었다. 네살 때에 나는 읽기와 쓰기를 능숙하게 하였다. 여섯살이 되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나는 4학년에 들어갔다.
열 네살 때에 나는 ‘잠나갈’에 있는 ‘나와나갈’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다음 2년 동안 ‘잠나갈’에서 350‘마일’ 가량 떨어진 ‘봄베이’에 있는 유명한 ‘엘핀스톤’ 대학에 다녔다. 이 학교에서 미국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196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바니아’의 ‘버크넬’ 대학교에 등록하였다. 얼마 안가서 장학금을 받아 수업료를 충당하였다. 미적분, 열역학, 유체역학, 물리학 등에 대해서는 그 대학교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버크넬’ 대학교에서 4년을 마친 다음 나는 ‘뉴헴프셔’ 대학교로 가서 2년 동안 보조 강의를 하였다. 열역학과 유체 역학을 강의하여 한달에 200불을 받은 외에 내 자신은 무료로 수강을 하였다. 1주일에 서너 시간만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머지 시간에는 내 과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다음에 ‘보울더’에 있는 ‘콜로라도’ 대학교로 가서 또 강의를 하였다. 여기서도 나는 무료로 수강을 하고, 상사형 ‘컴퓨터’에 대해 강의를 하고 삼차원 입체 사진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관한 특별 연구를 하여 한달에 250불을 받았다.
이 동안 나는 세상 지식을 상당히 축적하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어 하였던 하나님에 관하여는 조금도 배우지 못하였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우리의 감탄스런 지능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갈구하였다. 그러던 중 1966년 9월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자세히 탐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을 알게 되다
‘뉴햄프셔’ 대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가는 도중 우연히 형님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분은 ‘뉴욕 엘미라’에서 미국 여자와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형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성서 교육자 두 명을 집에 초대하였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고 성서를 읽어 본 적도 없었다. 인도에서 그리스도교인과 이야기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버크넬’에서는 누구와도 종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때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초의 접촉이었던 것이다.
증인들은 성서가 사람들의 생활에 훌륭한 영향을 주는 점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나의 형님과 나는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성큼 소위 그리스도교의 나라라고 하는 곳에서 시작된 두 차례의 대전 등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공할 만한 역사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국에는 ‘힌두’교의 인도보다 범죄와 부도덕이 더 심하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였다.
놀랍게도 증인들은 내 말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국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간단히 그리스도교국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척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교국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며, 그러므로 전쟁이나 악행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그들의 태도가 어찌나 성실한지 나는 그들의 말에 어떤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토론하는 도중 나는 증인들이 자기네 생활을 지배하는 원칙들이 분명히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도 원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힌두’교인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정당화할 수 있도록 그러한 원칙을 구부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내 아버지께서도, ‘힌두’교인들은 사업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직하며, 그러면서도 자기네 종교 원칙으로 그 부정직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날 밤의 토론은 나에게 혼란을 야기시켰다. 증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바를 확신하는 것같았다.
증인들에 대해 탐구하다
‘두람’에 소재한 ‘뉴햄프셔’ 대학교에 도착한 다음에도 그 토론 내용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자동차를 몰고 나갔다. 각 읍마다 멈추어 전화 번호부에 ‘여호와의 증인’이 나와 있는가 살폈다. ‘뉴햄프셔’의 ‘만체스터’에 도착해서야 증인들을 찾아내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늙수룩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와서 근처의 왕국회관 주소를 알려 주고 집회가 오후 2시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날 오후 내가 받은 환대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고 환영을 느끼게 하였다. 집회 후에는 어느 희랍 사람이 자기 집에 식사 초대를 하였다.
곧 또 토론을 갖게 되었다.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 통치 하에서 지상이 개선될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힌두’의 가르침에서는 지상의 상태가 개선될 것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다. 우리는 단지 더 높은 곳으로 윤회함으로써 개인적으로 발전하는 것만 배웠다. 그러나 증인들은 하나님의 정부에 의해 지구가 낙원이 될 것이라고 설명된 성서의 말씀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전쟁도 범죄도 없을 것이며, 심지어 질병과 죽음까지도 없을 것이라고 성서 내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다! 이것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나는 그 집을 떠났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여호와의 증인들의 회중의 주임 감독자의 이름도 알아 왔다.
다음 주일에 이 증인을 방문하였더니 그는 매주 나에게 찾아와 무료로 성서 연구를 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인도에서는 ‘구루’로부터 강의를 받는 데 많은 돈이 들었으므로 이 제안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듯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맨먼저 내가 오랫 동안 궁금히 생각하고 있던 내용 곧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에 대해 토론하였다. 나는 성서로부터 우상들이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국 교회에서 하나 안에 세 하나님이 있다는 삼위일체, 곧 ‘힌두’교의 삼신 ‘트리물티’와 아주 비슷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지존하신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님을 배우고는 매우 기뻤다.
특히 하나님이 이름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배우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이름은 여호와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신비한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계속함에 따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실존하시는 인격체이심이 더욱 분명해졌다.
‘힌두’교에서 나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왜 악이 존재하는가는 배워 본 적이 없다. 이제 나는 해답을 찾은 것이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 반역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그때 발생한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허용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기간이 거의 차서 곧 여호와께서 악을 일소하고 의로운 새 질서를 가져오실 것도 배웠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으며,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나는 언제나 사람은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람이 죽을 때에 그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힌두’교의 교리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몇번의 토론 후에 나는 그 믿음이 그릇되며, 영혼이 죽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올바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살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실 것이다. 부활에 대한 이 성서의 약속은 이치적이었다. 그 약속은 이전에 죽어간 사랑하던 사람들 곧 우리 조부님과 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웅대한 희망을 내게 안겨다 주었다.
이제 성서를 믿는 이유
‘힌두’교인으로 성장한 사람이 성서의 교리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유명한 ‘힌두’교인 ‘마하트마 간디’도 “나는 성서를 공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는 그것을 나의 경전으로 인정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성서를 연구해 보고 나서 나는 성서를 믿을 만한 진정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예컨데, 성서에는 ‘힌두’교 교리와는 달리 비과학적인 신화가 들어 있지 않다. 성서는 거의 3,000년 전부터 지구 모양이 둥글다고 정확히 말하였으며, 구세대 사람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납작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사야 40:22) 고대 많은 사람들은 지구를 ‘아틀라스’가 떠받치고 있다고 믿은 것과는 달리 지구에 받침대가 있지 않다고 설명하였다. ‘땅을 공간에 달았다’고 성서는 말한다. (욥 26:7) 나는 과학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서의 정확성에 나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성서의 진실성을 확신케 해 준 또 한 가지는 정확한 예언이다. 내가 알기로는 ‘힌두’교 문헌에는 예언이 전혀 없다. 반면에 성서는 많은 예언을 하여 그 중에 이미 이루어진 것들도 있다. 사실상 전쟁, 기근, 온역, 청소년 범죄 기타 등등의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은 성서 예언의 놀라운 성취인 것이다.—마태 24:3-14; 디모데 후 3:1-5.
그리고 성서에는 행복한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최상의 충고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성서는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권고를 듣는다면 훌륭한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에베소 5:22-28.
나의 아내와 나는 성서의 충고를 통해 우리의 결혼 생활을 도와 주신 데 대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성서는 실용적 지침으로 가득차 있으며, 이 점 또한 내가 그것을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된 한 가지 이유이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오는 다른 즐거움들
얼마 후에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헌신하였으며, 그것을 물의 침례로 표상하였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싶어 하던 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인 성서 안에 기술해 놓은 내용에 따라 생활하는, 전세계 많은 벗들을 가지게 된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나는 또한 내가 하나님에 관하여 배운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또 그들도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 주면서 기쁨을 느낀다.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일하는 하나의 장로로서 믿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영적으로 보조해 주는 것도 기쁜 일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다.—사도 20:35.
나는 종종 나와 함께 성장하였던 인도의 친척들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도 성서를 구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훌륭한 것들을 깨닫기를 바란다. 정말, 그렇게 한다면 진리를 알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즐거울 것이다.
나의 조부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에서만이 세계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그러한 상태를 이룩하려고 애를 많이 쓰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이 부활되면 만나 뵈올 것을 고대한다. 그때에 지상 어디에도 빈곤, 압제 심지어 질병까지 없는 것을 보시고 감격하실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늘 하였던 것처럼 지붕에라도 올라가서 지존하신 하나님 여호와에 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웅대한 모든 일들을 이야기한다면 실로 흐뭇할 것이다.—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