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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진화를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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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진화를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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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5
깨75 1/22 14-22면

나는 진화를 믿어야 하나?

근년에 이르러 미국의 일부 주 당국과 교육 위원회에서는 공립 학교에서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서 가르치는 처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일례로 ‘캘리포니아’ 주를 들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 교육 위원회의 주무 사항의 하나는 공립학교 교과서에 포함시킬 내용을 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기 전에 동 위원회는 여러 분야의 전문단체들의 추천을 받는다. 이러한 단체들 중의 하나는 주립 과학 교육 자문 위원회이다. 동 자문 위원회에서 주 산하의 공립 학교에서 실시할 과학 교육의 골자를 기안하였다.

동 자문 위원회가 추천한 바는 진화론을 단순한 하나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 위원회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동 교육 위원회는 진화론을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으로서 가르치라고 시달하였다. 동 위원회는 또한 교과서에 어느 정도 과학적 뒷받침이 있는 생명의 기원에 다른 해설로서 창조론을 명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과학 교육 자문 위원회에서는 ‘진화가 사실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매일 그 실례를 보고 있다. 책임있는 사람치고 진화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력과 원자가 사실인 것 만큼이나 진화도 사실이다’라는 요지의 폭발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한 위원은 창조를 믿는 것을 점성술이나, 달이 녹색 ‘치즈’로 만들어졌다는, 미신이나 또는 황새가 아기를 낳는다는 미신을 믿는 것에 비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많다. 진화의 증거로서 제시된 “증거들”이 결코 최종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온 한 사람은 진화를 믿는 사람들과 회견해 보기로 결정한 바 있다. 다음은 그 자신의 설명 및 조사하는 동안 만난 진화론 신봉자들과의 실제 대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진화를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한 점잖은 한 신사는 이렇게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그 문제를 철저하게 연구해 왔으며, 또한 이구동성으로 사실로써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과학자들에게 큰 믿음을 두고 계시군요.” 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들의 기록은 그들의 신뢰도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고 그는 반문하였다.

나는 진화를 믿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조사 도중에 여러 번 만났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성인들은 누구나 진화론을 믿는다고 하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 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한 40대의 한 여인은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도대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전문적인 과학자들의 발견에 대해 왈가왈부합니까?”

“우선, 과학자들끼리도 논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들은 진화가 언제, 왜, 어떻게, 얼마나 빨리 이루어졌는지, 심지어는 진화의 실제 발생여부에 대하여도 서로 주장이 구구합니다!”라고 나는 대답하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제, 저의 자격에 관한 질문에 대답해 드려야겠군요. 자기가 배우지 않은 의학적인 문제가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 판사의 자격은 도대체 무엇이겠읍니까? 지성이 있고 객관적인 사람일진대 그는 전문가들의 찬반의 논쟁을 듣고 나서 그러한 증언을 기초로 판결을 내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현 전문화 시대에 한 개인이 여러 가지 지식 분야에 관련된 판결을 내릴 수 있겠읍니까?”

“그러나 진화론은 아주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하고 그는 항의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데오도시우스 도브찬스키’[진화론자]는 과학자들의 일의 많은 부분은 일반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진화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읍니다. 그는 그것은 기초 생물학적 문제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리고 ‘조오지 게이로스 심프슨’(또 다른 저명한 진화론자)은 종교 교리에 있어서든 과학 이론에 있어서든 맹신을 갖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하였읍니다. 그는 또한 전문가들의 발견을 시험해 본 다음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라고 하였고, 또한 진화의 증거를 평가해 보기 위하여 꼭 생물학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그 다음, “많은 사람들은 단순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시간을 내서 사실을 조사해 보는 것이 아니라 앵무새처럼 타인의 생각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나는 말을 맺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진화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시게 되면 부인께서도 놀라실 것입니다.”라고 부언하였다.

협박과 “세뇌”

진화를 믿는 사람들을 호별 방문 조사하기 전에 나는 진화론자들이 쓴 책 약 20권을 읽었다. 그러나 심지어 그 이전, 나의 대학 시절이래 수년 동안 나는 이 분야에 대한 과학적인 발전에 대하여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히 저명한 진화론자들의 신간 서적들을 조사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나는 그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협박”과 “세뇌”에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11명의 진화론자들이 쓴 12권의 책에서 요약한 이러한 간단한 내용으로 예시된다.

‘충분한 판단력을 지닌 과학자들은 대체로 진화를 받아들인다. 모든 신뢰할 만한 과학자들은 모두 진화를 인정한다. 명망있는 모든 생물학자들은 이것이 확립된 사실이라는 데 동의한다. 오늘날 식견있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치고 인간이 물고기의 후예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더 이상 의심할 문제가 아니다.

‘증거는 압도적이다. 낡은 망상과 편견으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치 않다.’

이것은 이들 모든 진화론적 저술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나 그렇게 맹렬하고, 그렇게 독단적인 주장은 수상스럽게 여겨지게 마련이다. 마치 진화론자들은 위협적인 수사학의 탄막을 사용함으로써 반대와 질문을 묵살하려고 노력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한 이론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 무능하고 무식하다고 하고 ‘낡은 망상과 편견의 노예’라는 낙인을 찍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참으로 사실들을 주장하는 과학자라면 비열하게도 그러한 비과학적이며, 비이치적인 술책을 쓰겠는가?

물론, 이러한 “심리학적 전쟁”, 즉 이러한 “세뇌”가 사람들로 진화론을 믿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이러한 신봉자들은 그러한 억지 수단을 거부하고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대결하게 되면 대체로 무방비 상태이기 마련이다.

대답이 없음

예를 들면, 나는 이웃에 사는 한 지성있는 부인에게 이렇게 질문한 일이 있다. “부인께서는 왜 진화론을 믿으십니까?”

“왜냐하면 항상 그러한 현상을 목격하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면서, 그는 자기 집 뜰을 가리켰다. 그러나, 자세한 예를 들어보라고 말하자, 그의 얼굴이 발끈 붉어지기 시작하였으므로 나는 지혜롭게 물러나왔다.

한 다른 집에서 내가 누른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온 연로한 남자는 우리가 주위 환경에 적응해 가며, 또한 이러한 적응의 특성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축적되어 마침내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를 만들어낸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사상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읍니다. 선생님이 햇빛에 타셨다고 하여 그것이 선생님의 자녀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또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운동으로 발달된 이두근(二頭筋)이나, 연구나 경험을 통하여 습득하신 전자 공학에 관한 지식이 후손에게 전달되지도 않습니다. 여러 해 전에 진화론자인 ‘라마르크’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었고, ‘다아윈’도 그랬읍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진화론자들은 그러한 습득한 특성이 유전을 통하여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어떻게 진화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하고 반문하였다.

“바로 그 점을 선생님께서 대답하셔야 할 일입니다.” 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재삼재사, 나는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진화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전혀 자기들의 믿음을 뒷받침해 줄 이유, 증거, 사실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진화론을 믿는 주된 이유는 과학자들이 그것을 믿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어떤 큰 대학교의 교정에서 만난 한 학생은 진화의 증거로 “화석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화석의 기록에는 “[예를 들면] ‘에오힙푸스’로부터 현대의 말로 진화한 형적이 있읍니다. 화석 연계 도표를 보면 어떻게 말의 발가락이 없어지고, 발목이 길어지고, 풀을 뜯기 위한 새로운 치아가 생겨나고, 크기가 커졌는지를 알 수 있읍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연한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화석들 중에 많은 것을 제외해 버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론을 지지하는 것만을 골라내고 그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것은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단순화시키는 것에 불과하지요.”라고 그 학생은 말하였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증거를 은폐하며, 단순화하는 동안 그들은 사실을 외곡할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킵니다.”고 나는 대답했다.

사실상, ‘심프슨’도 그렇게, 즉 ‘말의 화석 기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사실을 외곡할 정도’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박물학자 ‘아이 샌더슨’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치아의 조성, 발가락의 상실, 크기의 증가 및 발목에 연장 관정을 순서적으로 보여주는 이러한 정연한 진화 연계 도표는 지금 불행히도 크게 의심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지맥(支脈)들이 밝혀졌고, 여러 중간 형태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그러한 고전적인 묘사는 현대의 말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가설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는 하나의 지침에 불과하다 라고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화석의 기록은 아직도 진화론의 “인기있는 증인”으로 고려되고 있다. 이는 마치 ‘심프슨’이 “진화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아무래도 화석의 기록에 의하여 제시 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화석의 증거는 생명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방법대로 진화되어 왔음을 증명하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사실들, 증거들이 결여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에게 있어서 그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약 1세기 전 현대 진화론의 “아버지”인 ‘차알즈 다아윈’도 그 문제를 직면했었다. 그는 자기의 저서 「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장에서 생명이 시초에는 창조주에 의하여 몇개의 형체 혹은 한가지 형체 속으로 불어넣어졌다.”라는 말로, 생명의 기원을 하나님께로 돌림으로써, 그 문제를 처리했다.

그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증거는 여전히 불명확하였다. 얼마 후, ‘에이. 씨. 시와드’는 화석의 기록은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고 시인하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상황은 동일하다. 물론, 때때로 특종 기사에 굶주려 있는 신문 기자들이 실험실에서의 생명의 창조가 임박하였다는 선풍적인 발표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주가 있었어야 함, 즉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게 되지는 않음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상, 화석의 기록은 이른바 현미경적 생물의 진화에 관하여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실정이다. 한 대학 교과서에는 “우리는 아직도 단세포의 진화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기술 되어있다.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들의 “폭발적 출현”

어느 정도 확신을 주는 화석의 기록의 최초의 증거는 지질학자들이 칭하는 바 ‘감브리아’기 암석 층에 들어 있다. 그 시기 이전의 화석의 기록은 지층들에 변함이 없으며 따라서 그 시기를 헤아릴 수 없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러한 오래된 지층 속에는 화석들이 희귀하다. 사실상, 그것들의 가치성에 대하여는 과학자들 간에도 크게 이론이 구구하다.

그러나 ‘감브리아’기 암석에서 고도로 분화된 그리고 매우 복잡한 형태의 화석들이 매우 다양하게, 갑자기 풍부하게 나타난다. 사실상 대부분의 기록에 대해서 그렇게 오랜 기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들의 인기있는 증인인 화석의 기록은 수다쟁이로 돌변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전 시대에는 후두염이라도 걸렸었단 말인가, 아니면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는 것인가?” 나는 많은 화석들의 이러한 돌연한 “폭발”을 가리켜 “생물의 역사상의 주요 신비”라고 한 ‘심프슨’의 말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가령 진화론자들이 화석의 기록 속에서 확증할 수 없고 실험실에서도 재현시킬 수 없는 생명의 “자연 발생”이 있었다고 하자. 그리고 최초의 생명의 흔적을 그들이 추적해낼 수 없을 뿐이라고 가정하자. 또한, ‘감브리아’기의 암석 속에서 최초의 현미경적 생명으로부터 수십만 종류의 고도로 분화된 형태의 생명이 돌연히 출현하게 되기까지 환상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화석의 기록 속에서 적어도 소위 후기의 형태의 생명의 진화 과정에 대한 모종의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지상 식물들이 존재하게 된데에 대하여 화석의 기록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화석의 기록은 그것들의 조상인 “원시” 형태가 있었다고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한 권위자가 시사한 것처럼 진화론 신봉자는 그러한 가상적인 조상들이 존재하였었을 것이라고 단순히 믿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원시” 곤충의 화석도 없다. 곤충들은 화석의 기록 속에서 고도로 발전된 상태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형태의 곤충들의 “폭발적인 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말하기를 그것이 그 이전 수천만년간 진화되어 왔음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근거가 있는가?

그러한 억측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예비적인 단계에 있는 그러한 가상적 동물의 화석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1974년판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은 “화석의 기록은 곤충의 기원에 관하여 아무 것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확증하였다. 또한 곤충의 발달 기간으로 그렇게 오랜 기간을 잡는 이유는 진화론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별수없이 그만한 기간을 설정하는 것이다.

척추동물

인기있는 증인인 화석의 기록은 척추동물의 출현에 관하여는 많은 것을 알려 주는가? 척추동물은 등뼈가 있는 동물을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도 화석의 기록은 이상하게도—즉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예를 들면, 물고기는 돌연히 나타났다. 진화론자들은 물고기가 어떠한 조상으로부터 생겨났는지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최초의 가상적인 물고기로부터 최초의 실제 물고기 화석 사이에는 약 1억년의 간격이 있다. 왜 1억년인가? 왜냐하면 진화론자들은 척추 동물이 “진화”하는데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간에 존재한 척추동물의 조상의 화석이 발견되었는가? 「1974년판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화석 유물은 척추동물의 기원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갑자기,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아주 복잡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1억년의 침묵은 접어두기로 하자. 이제 물고기로부터 양서류(兩棲類)가 나왔다고 한다. 화석의 기록은 이 결정적인 점에서도 아무 말이 없다. 그럴듯한 폐어(肺魚)까지도 물고기와 양서류 사이의 중간 동물이 아니라고 버려지고 있다.

진화에 따르면, 알을 낳는 파충류가 그 다음에 등장하였다. 예의 인기있는 증인은 그들의 조상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파충류」란 책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파충류의 역사에 대한 화석의 기록에 나타난 실망적인 특징들의 하나는, 그것은 껍질이 있는 알이 발달된 단계인 초기시대에서의 파충류의 진화에 관하여 너무나도 알려 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에 관하여 말하건대, 증거가 전무하다는 그러한 시인을 읽은 후, 나는 여기서 ‘알을 낳’은 것은 진화론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수백만년 후 일부 파충류가 포유동물이 되었고 다른 것은 조류로 변하였는데, 화석의 기록은 이 점에 있어서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심프슨’도 포유동물과 조류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75,000,000년 동안에 대하여는 화석의 기록이 ‘희소’하다고 시인하였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의 진화에 관한 화석의 기록의 증언들을 간단히 인용해 본다. “화석들은 불행히도, 우리가 최초의 진정한 포유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생물에 관하여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 (「포유동물」, 37‘페이지’) “불행히도, 우리가 유인원의 출현을 추적하는데 도움이 될 화석의 기록은 아직도 절망적일 만큼 불완전하다. ··· 불행히도 인류 자체의 개별적인 노선을 따른 인간의 진화과정의 초기 단계는 계속 철저한 신비로 남아있다.” (「영장류」 15, 177‘페이지’) “심지어 이 비교적 근대의 역사[유인원류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도 불확실성으로 일관되어 있다. 권위자들은 종종 기본점들과 세부점들 양면에 있어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진화하는 인류」 168면.

기록은 진화를 부정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른바 이러한 주요 집단의 생물들의 진화에는 신뢰할 수 없는 간격들로 가득차있다. 재삼재사, 화석의 기록은 조상들에 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는 동일하다. 소수의 경우에라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주요 범주의 속하는 생물들에 대하여 한결같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오래 전 ‘다아윈’도 화석의 기록에 나타난 간격에 대하여 개탄한 바 있다. 사실상, 그는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이론을 배척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가장 인기있는 증인을 힐란함으로써 자기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는 화석의 기록이 뒤바뀌어져버렸으며, 불완전하다고, 그리고 여러 유기체들, 특히 단단한 부분을 지니지 못한 것들은 단순히 화석으로 남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진화론자들도 동일한 핑계를 댄다.

그러나, 실상은 변화되지 않은 지층이 많이 있다. 그리고 피부, 벌레, 해파리, 깃 등을 포함한 ‘연한 부분’의 화석도 많이 있다. 또한 화석의 기록에 “완전한” 형태의 생명체들과 관련된 것은 많은데, “진화하는” 단계에 있는 것은 텅비어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화석의 기록처럼 당당하게 진화를 부정하는 사실도 드물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돌연변이가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나의 친구 한 사람은 그러한 경우를 증명하려고 열심히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토의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나는 그의 접근 방식이 ‘어리석은 자만이 진화를 믿지 않는다’는 식이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학을 갓 나온 생물학 전공자였다. 그의 말은 동형 접합자적(同形接合子的), 이형 접합자적(異形接合子的), 전위(轉位), 전도(轉倒), 반수 염색체(半數染色體), 배수 염색체(倍數染色體), 다배수 염색체(多倍數染色體), 유사분열(有絲分裂), 감수분열(減數分裂), ‘데옥시리보’ 핵산 및 이와 같은 암시적인 단어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그러한 모호한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무슨 고매한 정신 수준의 척도인양 생각하여, 그러한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대하여 만족을 느끼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위협적인 어휘 자체가 한 이론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의심스럽게 만들 뿐이다.

유익한가—해로운가?

“돌연변이는 유전을 지배하는 유전인자에 변화를 일으킵니다.”라고 말한 다음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자연 도태에 의하여 유익한 변화는 보존되며, 그것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축적됨에 따라 새로운 종으로 진화됩니다.”

“그러나, 돌연변이란 유전 인자 속에 일어나는 맹목적이며, 희귀하고 우발적인 변화입니다. 그러한 통제받지 않은 변화가 놀라우리만치 정교한 설계된 고도로 복잡한 구조물에 개선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간혹 유익한 것도 나타납니다.”라고 대답한 다음 일부 진화론 책에 나오는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던져진 대부분의 돌은 손상을 가져오지만, 백만번 중에서 하나쯤은 기화기의 적소를 때려 기화 작용을 개선시킬 것입니다. 돌연변이의 작용도 그와 같습니다.”

나는 내 몸속에서 한가지 의심스러운 개선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100만개의 돌에 얻어맞고자 하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러나, 백만개째 돌이 기화기를, ‘개선’시킬 무렵에는 이미 던져진 999,999개의 돌이 냉각장치를 부서뜨리고, 축전지를 깨뜨리고, 배선망을 훼손시키고, 점화 ‘프러그’를 부러뜨리고, 유리창을 깨뜨리고 계기판을 망쳐놓고, 차체와 기름 ‘탱크’를 찌그려뜨렸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다음 백만개의 돌은 아마 기화기마저 부서뜨릴 것이다!

“천만에요. 그때쯤, 자연 도태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해로운 돌연변이를 제거시켜 버립니다.” 하고 그는 응수하였다.

“진화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읍니다.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열성이며 유전 특질 속에서 누적되었다가 반복적으로 미래의 세대에 갑자기 나타나서 유기체를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곤 합니다. 퇴화, 고령 및 사망의 원인으로 많은 유전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누적된 유전 부하(負荷)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그것이 인류를 생물학적 ‘황혼기’로 밀어버릴 것을 우려하고 있읍니다.”라고 말한 나는 계속하였다.

“사실상, 어떤 서적에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었고 자연 도태에 의하여 제거되지 않은 유전성 질병과 결함의 목록을 만드는데 여러 ‘페이지’가 할애될 정도입니다. 그 중에는 당뇨병, 빈혈증, 색맹증, 혈우병, 농아 상태, 피부 색소 결핍증, 기형족, 언청이, 단소증, 녹내장, 정신장애 등이 있읍니다 ···.”

“그러나 ··· “

나는 그의 중단을 저지시키면서 “말씀하시기 전에, 차에 돌을 던지는 비유에서 한가지 점을 더 생각해 봅시다.”

새로와지는 것이 아니라 변이하는 것 뿐임

나는 계속하였다. “설사 하나의 돌이 우연히 기화기를 개선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기통식 기화기가 4기통식으로 또는 연료 공급 장치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돌연변이는 원래의 것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지는 못합니다. 자, 이제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좋은 돌연변이의 예도 있읍니다. 우리는 실제로 진화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는 세가지 예를 열거하였다. 그 하나는 ‘유럽’산 자벌레 나방이었다. 그는 공업 도시에서 증가하는 이 나방의 검은색 변종이 있다고 말하였다. 검은색 변종은 연기로 검게 된 나무 둥치에 앉기 때문에 새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는 어떤 돌연변이의 파리는 ‘디디티’에 대한 저항력이 있으며 다른 파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때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항생물질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변종의 어떤 ‘박테리아’를 언급하고, 이러한 소수의 생존자들로부터 저항력있는 많은 ‘박테리아’가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은 색 ‘유럽’산 자벌레 나방은 도시 뿐만 아니라 공장의 연기로 나무 둥치가 검게 변하지 않은 농촌에서도 번성하고 있다. 검은색 변종은 더 튼튼하며, 현재의 상태하에서 더 생존하기에 용이하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나방이에 불과하다.

변종된 파리와 ‘박테리아’가 살아남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변이되지 않은 것들처럼 번식력이 강하지도, 오래 살지도 않는다. 변종이란 말하자면 유전적 “불구자”, “기형”이다. 그들의 신체 기관내의 어떤 특성들이 그들로 생존하게 하기는 하나, 그것이 개선된 것인가?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 출현하였는가?

정상 청취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도시의 비행장에서 일으키는 소음에 쫓겨 이사를 갈 때에도 귀 먹은 사람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조심을 하지만 발이 절단된 사람은 무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머거리나 다리가 절단된 것이 유기체를 개선시키지는 않는다. 변종 파리나 ‘박테리아’도 마찬가지이다.

내 친구가 그러한 돌연변이를 보았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진화 과정이 아니다. 단지 한 종류의 생물내에서 일어나는 변종 과정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다. 또 ‘자기 집 뜰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진화를 믿는다고 말한 부인이 본 것도 모두 그것이다. ‘우리가 매일 그 실례를 보고 있’기 때문에 진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한 ‘캘리포니아’의 주립 과학 교육 자문 위원회의 위원장이 보아온 것도 모두 돌연변이이다.

제한된 변형

나방의 색깔의 변화가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증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이것은 진화론자들의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생물들 속에서는 변형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러한 변형이 유기체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단순히 장미에 여러 변종이 있다는 이유로 장미 덤불이 참나무로 변화된다고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장미는 어디까지나 장미이다.

인간 높이뛰기 선수들이 한 때는 6‘피트’를 뛰었지만 지금은 7‘피트’를 뛴다. 이것이 인간이 후세대에 이르러는 7‘마일’이나 높이 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진보하리라는 뜻인가?

달리기 선수들은 4분미만에 1‘마일’을 달릴 수 있는데까지 진보해 왔다. 그렇다고 때가 되면 사람이 4초 미만에 1‘마일’을 달릴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런 식의 진보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단연코 어떤 제한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운동선수가 다른 생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파리가 독물에 대한 저항력이 있다고 하여 그것들이 계속 변화하여 독수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나방들도 마침내 익룡(翼龍)이 될 때까지 색의 변화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물에는 한계가 있다. 속도에도 한계가 있다. 추위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화석의 기록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생물체는 변형되지만, 결코 그 종류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다.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또 다른 흥미있는 대화가 어느 대학교에서 내가 참관한 한 실험 후에 진행된 일이 있다. 그 실험은 방사성 탄소 시계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 실험을 주도한 교수는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해 온 시간의 길이를 언급하고 진화론을 결부시켰다.

그 교수는 진화를 믿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들은 물고기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두개골을 순서적으로 배열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배열에서 서로 가까운 것들 사이의 유사점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한 유사점을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오? 오히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나왔음을 지적한다고 할 수 있겠죠?”라고 말하였다.

나는 “정말 그럴까요?” 하고 반문하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러한 생각은 그릇된 망상이며, 거짓되고 오도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듯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부언하였다. “그러면, 그렇게 배열된 순서대로 동물들이 실제로 진화되었다는 말입니까? 저는 여러 박물관에서 진화의 증거로 제시된 이러한 일련의 두개골들을 보아왔지만, 대부분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순서는 아니라고 표시되어있던데요.”

“아, 예, 그렇습니다. 이것은 상이한 동물군들 사이의 유사점을 예시한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그 교수는 말하였다.

유사점이 증거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이것은 유사점이, 진화를 증명하기는커녕, 혈통의 유전성 여부도 나타내 주지 못함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손님이었고 그는 정중한 주인이었다.

나는 계속하였다. “제가 보기에 진화론자들은 매우 변덕스럽습니다. 어떤 유사점이 자기들의 공상에 부합될 때는 진화의 증거로 사용하고, 어긋날 때는 배척해버립니다. 예를 들면, 낙지는 인간의 눈과 매우 흡사한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서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는 아무도 없읍니다.”

나는 계속하였다. “또한, 물고기와 곤충은 서로 무관하지만 둘다 비슷한 발광기관을 가진 것들이 있읍니다. 상관없는 칠성장어 모기 및 거머리들은 그들이 피를 빠는 대상물의 피가 굳는 것을 막는 서로 비슷한 반응고제를 가지고 있읍니다. 상관없는 박쥐와 돌고래는 비슷한 음파 탐지 조직을 가지고 있읍니다. 상관없는 물고기와 곤충들이 물 안팎에서 다 볼 수 있는 이중 초점식 눈이 있읍니다.”

나의 말은 계속된다. “서로 관계없는 유기체들이 동면, 이주, 죽은체 하는 것, 독침, 독아(毒牙) 및 분사 추진 방식을 위한 기관들과 본능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읍니다. 진화를 받아들이려면 맹목적인 우연으로는 단 한번이라도 실현될 수 없는 어려운 이러한 놀라운 것들이 그들이 속한 여러 상관없는 유기체들 속에서 맹목적이고 희귀한 돌연변이에 의하여 여러 차례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일이 한번이라도 발생될 가능성은 천문학적인 수자로 헤아려야 하는데도 진화론자들은 계속 반복적으로, 그것도 우연히 발생하였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말이 수학적으로 볼 때 언어도단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흥분하셨군요”라고 그 교수는 말하였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나는 대답하였다. “저는 진화를 하나의 이론으로 논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의 독단론, 권위를 내세운 오만과 횡포, 자기 노선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무식자로 몰아부치는 그들의 독선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학자들도 결국은 사람이며, 자기 나름의 사견이 있고, 때로는 사실이 입증하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참된 과학이 아니라, 과학 공상 소설이다

그의 말은 「유전, 인종 및 사회」에서 이렇게 시인한 ‘둔’과 ‘도브찬스키’의 말을 회상시켜 주었다. “과학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종종 어떤 독특한 견해를 증명하거나 어떤 선입견을 보강하려는 유혹에 굴복되곤 한다.”

‘셜리반’은 「과학의 한계」에서 과학자들은 “자기들의 과학에 관하여 항상 진리만 말하거나 말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거짓말도 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에 공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자기들 자신의] 종교적 또는 반종교적 편견을 위하여 거짓말을 해 온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진화론자들은 또한 자기들의 환상적인 추측으로 결정적인 문제들을 재빨리 처리해버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증거도 없이, 하나의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에서 다른 것으로 놀랍게 변화되었다는 말을 소설가처럼 사실인양 기술한다.

요술 지팡이를 흔들어 진화론자들은 비늘을 깃털이나 모발이 되게 한다. 지느러미는 다리가 되는데, 그 다리가 뱀에게서는 없어졌지만, 새에게서는 날개로, 말에게서는 발굽으로, 고양이에게서는 발톱으로, 사람에게서는 손으로 변화된다. 그러한 “설명”은 고도의 과학 공상 소설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어류가 ‘암모니아’로 배출하던 질소화합배설물이 양서류에서는 요소(尿素)로 배설되지만, 파충류에서는 요산으로 변화되고, 포유동물에서는 다시 요소가 된다고 한다. 아마 포유동물은 한선(汗腺)을 변화시켜 유방이 되게 했고, 또 다른 우연에 의해 발달된 새끼를 낳았으며, 동시에 그것은 유방을 빠는 본능적인 지혜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러한 설명은 진정으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농담인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담이지 농담은 아니었다! 그들은 과학 공상을 참 과학인양 받아들인다.

그들의 책에 ‘이었을 수 있다’, ‘이었을지 모른다’, ‘이었을 것이다’ 등의 표현이 가득차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이 얼마 동안 여러 번 반복된 다음에는 ‘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로 변한다. 가능성이 개연성이 되며, 그 다음에는 확실성으로 변한다. 가정이 독단으로 진화된다. 추측은 결론이 된다. 그럴듯한 말들이 “증거”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참된 과학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뇌를 통하여 진화에 대한 맹신이 퍼지고 있다. 그것과 함께 자기들이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을 굽히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오만한 독단주의가 출현된다. 불신자들을 공격하고, 때로는 진화의 주창자들인 진화론의 사제들을 다시금 확신시키기 위하여 포괄적인 선언이 사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 소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많은 부모들에게는 전혀 확신을 못준다. 학교에서는 선생들이 진화를 가르치는 반면, 집에서는 이러한 부모들이 창조를 가르칠지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만일 학교에서 진화를 하나의 이론으로만 가르치고, 창조를 과학적 증거가 있는 대안으로 인정한다면, 자녀들의 정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순이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것 이외의 사상을 도입하는 것에 대하여 필사적인 대항을 한다. 필경 진화론자들인, 계몽되었다는 과학자들과 교육자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을 지지하지 않는 사상들은 모두 말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이 일단 진화론을 주장하고 나섰다면 그들은 이제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치기를 거부하려 한다.

또한, 진화론자들은 심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딜레마’를 직면하기를 거부한다. 예를 들면, 화석의 기록은 진화가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들의 돌연한 출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창조론은 그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되지만, 진화론자들로서는 감정적인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창조주, 그들의 두뇌보다 고등한 능력자,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생명체들을 존재케 하신 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명정대한 정신을 갖는 대신에, 대체로 진화론자들은 화석의 기록을 탓하려고 광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경망스럽게 믿어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욕하고 모욕을 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창조를 믿는 것을 황새가 어린애를 낳는다는 미신에 비긴다. “암흑 시대”의 종교 교직계급처럼 그들은 ‘권위를 가지고’(ex cathedra) 진화가 하나의 사실이라고 선언하며, 자기들의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무지의 바깥 어두움 속으로 파문시켜 버린다.

진화론은 그 신봉자들에게는 마치 한마리의 송아지 우상과 같다. 그 성우(聖牛) 우상은 진리가 개명됨에 따라 밀려나게 되어 있다. 큰 쇠망치처럼, 진리는 마침내 거짓된 사상들이 신성화하는 바탕인 거짓 신앙의 제단들을 때려부수고 있는 것이다.—기고.

[14면 삽입]

왜 많은 사람들이 진화를 믿는가?

[16면 삽입]

화석의 기록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함

[18면 삽입]

돌연변이가 진화를 설명하는가?

[20면 삽입]

더 많은 오류들

[17면 삽화]

유인원의 출현에 대하여, 진화론자들은 ‘화석의 기록은 절망적일 만큼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20면 삽화]

진화론자들은 돌연변이를 자동차에 돌을 던지는 행동의 결과에 비한다. 백만번째 돌이 기화기를 때려서 그 기화상태를 개선 시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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