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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5
깨75 6/22 12-13면

탄압의 좌절

‘뒤쁠레씨’가 채택한 극단적인 조치와 일부 지방 법원 판사들의 과도한 언사가 ‘캐나다’ 국민 중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반격을 초래하였다.

‘퀴벡’ 시에서의 한 사건에서 ‘장 메르시예’ 판사는 단순한 경범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통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터론토’에서 발행되는 한 영향력 있는 신문인 「글로브 앤 메일」지는 1946년 12월 19일자 사설에서 이 점에 대하여 논평했다. “종교 재판의 복귀”라는 제목하에 이렇게 말하였다.

“관공서와 법원의 열렬한 후원하에 지금 ‘퀴벡’ 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파에 대한 박해는 ‘프랑스’계 ‘캐나다’에 종교 재판이 되살아난 듯한 인상을 주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퀴벡’ 시 법원 판사, ‘장 메르시예’ 판사는 ‘퀴벡’ 경찰에게 ‘증인이라고 알려졌거나 그러한 심증이 가는 모든 사람을 체포해 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퀴벡’의 경찰력은 종교적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남녀들을 감금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 자유에 대한 극심한 폭거이다. 종교 재판의 이론하에서는 법원의 한 가지 기능이 그 지역 사회에서 이단자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종교 재판은 이단자를 죽음에 처했었다. 한편 ‘퀴벡’은 그들을 투옥하기만 한다. 그러나 ‘메르시예’ 판사는 그 가혹한 형벌을 부활시키는 것이 분명히 싫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만약 가능하다면, 모든 여호와의 증인을 ‘최소한 무기 징역에 처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 많은 ‘캐나다’인이 충격을 받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에 관련된 보고는 많은 ‘캐나다’인들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압도적인 반대를 직면한 이 소수파의 믿음과 강인성은 많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명한 신문 기자 ‘잭 칼’은 1946년 12월 26일자 「터론토 스타」지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날 ‘퀴벡’ 시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용기와 기백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증인들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질시와 멸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그들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들은 것 외에는 자기네들이 왜 여호와의 증인을 미워하고 멸시하는지 이유를 확실히 아는 ‘퀴벡’ 주민은 없는 것같다.

“그러나 ‘퀴벡’ 주에서 ‘퀴벡’ 주민이 아닌 사람이 증인이 되기 어렵다면 그들의 이전 신앙을 버리고 이 운동에 가담한 ‘퀴벡’인들은 몇 배 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친구들을 잃었으며, 사실상 사회적으로, 그 이웃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였다. 한때는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을 정탐하여 그 활동을 보고하며, 집회가 열리면 가까운 이웃들은 적의를 품고 공공연한 ‘스파이’ 노릇을 하느라고 긴장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외부 인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이러한 일이 실제로 ‘캐나다’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제 삼자로서 증인들의 교리와 그 목적 성취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들과 교제해 본 사람은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함에 있어 그 용기와 끈덕짐에 심심한 존경심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

“간단히 말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200명의 조그만 집단이지만 이 구태의연한 ‘퀴벡’에 일진 질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민의 90‘퍼센트’가 ‘프랑스’어를 말하고 95‘퍼센트’가 ‘로마 가톨릭’ 교도로 구성된 도시에서 그들의 집회는 ‘로마’ ‘네로’ 통치 때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닮아가고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은 어떠한 결과를 내었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1949년에서 1959년 사이에 ‘캐나다’의 대법원에서 다섯 차례의 중요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악랄한 교회 국가의 연합 공격을 둔화시켰다. 이들 대법원에서의 시험 사건은 다른 수백건의 사건을 성공적으로 결말짓도록 하는 원칙이 되었다.

마지막 중대 사건은 1959년에 이겼다. 그중 하나는 ‘몬트리오올’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모리스 뒤쁠레씨’를 상대로 제기한 개인 소송이었다. 그가 고발된 많은 증인들에게 보석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그의 주류 영업 허가가 취소되었던 것이다. ‘캐나다’ 대법원은 ‘뒤쁠레씨’ 개인이 그 손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에 대한 배상을 한지 석달 후 ‘뒤쁠레씨’는 사망했다.

판결의 가치가 인식됨

이러한 판결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용감한 입장이 ‘캐나다’의 주요 헌법 기관으로부터 호의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 ‘캐나다’의 수상인 ‘피에르 엘리오트 트류도’는 그의 저서 「연방주의와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퀴벡’ 주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 전체 사회로부터 조롱과 박해와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와 정부, 국가, 경찰 및 일반 여론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법적 수단을 이용하였다.”

‘맥길’ 대학의 ‘프랭크 스코트’ 교수는 그의 저서 「시민의 자유와 ‘캐나다’의 연방주의」에서 ‘램’ 대(對) ‘베노이’의 사건을 논의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램’의 사건은 경찰 불법 행위의 다른 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 몇년 동안에 ‘퀴벡’에서 너무나 자주 노출된 침울한 양상의 일부분이다. 여호와의 증인인 ‘램’ 양은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아무 혐의도 없이 변호사에게 전화 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은채 주말까지 계속 구금당하고는 경찰이 그 여자에게 자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류에 서명한다는 조건으로 석방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얘기를 읽을 때 얼마나 많은 다른 무죄한 희생자들이 경찰에 의해 비슷하게 처리되었을까 하고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처럼 검거 사건이 발생한지 12년 반까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하여 사건을 밀고 나아갈 만큼의 용기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 정부의 탄압을 받은 피해자들 중에 자기들의 권리를 위하여 굳게 선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승리는 우리 전체의 승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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