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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퀴벡’이 앞으로 방향을 돌리다: 조용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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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퀴벡’이 앞으로 방향을 돌리다: 조용한 혁명
  • 깨어라!—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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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환점
  • ‘가톨릭’ 세력의 쇠퇴
  • “무더기로 교회를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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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는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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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5
깨75 6/22 14-16면

‘퀴벡’이 앞으로 방향을 돌리다: 조용한 혁명

1959년 ‘뒤쁠레씨’의 사망 후 6개월 안에 그의 정부는 무너졌다. ‘램시 쿡’은 그의 저서 「‘캐나다’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뒤쁠레씨’의 죽음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들끓는 불만을 10년 이상이나 덮어 두었던 뚜껑을 벗겼다. ‘뒤쁠레씨’가 살았더라도 그 뚜껑을 오랫 동안 계속 닫고 있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적 힘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 관해 쓰면서 ‘피에르 엘리오트 트류도’(그 자신은 ‘가톨릭’ 교도임)는 “교권주의와 반계몽주의의 교회에 의해 억압당한 양심을 해방시키고 ·⁠·⁠· 권위주의자와 낡은 전통에 의해 궤멸된 인간들을 자유케 해야 할” 필요성을 기술했다. 그 ‘퀴벡’에 자유가 많이 있어 본 적이 없음을 지적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1960년 경에 결국 자유가 승리를 거두려는 것 같았다. ·⁠·⁠· 그러므로 1960년에 20대에 들어선 세대는 우리 역사상 꽤 온전한 자유를 얻은 최초의 세대였다. 교회 국가, 전통, 국민의 독단주의가 파멸되었다.”

전환점

“구식으로부터의 변화”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 왔다. 1960년은 전환점, 갑작스런 전진의 기점이 되었기 때문에 흔히 “조용한 혁명”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지식과 지성적 자유의 신 기원이 열렸다. 신문과 방송은 ‘가톨릭’교의 보호와 현상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다루던 편향적인 태도를 탈피하고 생활의 현실과 그 문제점을 다루기 시작했다. 「캐나다 70」의 저술에 참여한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논평했다. “1964년의 문교부의 설립으로 교회의 교육 관할에 끝을 가져왔고, 1960년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신용할 수 없는 교직자들의 정치 권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1960년 대의 ‘퀴벡’은 교권 지배와 고립주의자의 낡은 인상을 참으로 벗어버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캐나다’의 다른 지역이나 미국과 같은 북미 생활 양식을 향해 발돋음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생활의 많은 요인들이 ‘퀴벡’의 “움직이는 사회”, 즉 ‘조용한 혁명’에 기여했다. 이러한 것들 중 하나가 교황 ‘요한 23세’가 개최한 ‘바티칸’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 이후의 교회의 변화는 많은 ‘가톨릭’ 교도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전적인 ‘가톨릭’ 지배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퀴벡’ 지성인들 사이에 교회는 언제나 ‘퀴벡’에 해로왔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라고 「몬트리오올 스타」지는 지적했다.

‘캐나다’ 대법원에서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승리는 ‘퀴벡’에서 시민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를 행사하는 신 기원을 열었다. 출판물 검열은 헌법 위반이라고 선언되었다. 공개 연사들이나 작가들은 검사의 무거운 손이 지식의 합법적인 흐름을 막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퀴벡’에 깊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캐나다’ 생활의 주요한 점은 ‘텔레비젼’의 출현이었다. 그 마을의 주민들이 지방 사제의 말만을 들었을 때는 자기네 사제들로부터 훌륭한 보호를 받고 있다고 쉽게 속을 수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젼’이 도입되자 다른 세계가 어떠한가를 보게 되었으며 ‘가톨릭’이 지배하는 지역이 사실상 얼마나 발전이 늦은가도 알게 되었다.

‘조용한 혁명’이 총검으로 이룩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퀴벡’에 막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고한 위치는 어떻게 되었는가?

‘가톨릭’ 세력의 쇠퇴

「‘캐나다’ 70」의 사회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가톨릭’ 교회는 국민에 대한 전적 지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퀴벡’에서의 교회 세력의 상실은 갑작스럽고도 극적인 것이었다.”

「몬트리오올 스타」지는 작가 ‘랄프 슈레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퀴벡’에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력은 무너졌다. 평신도나 성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냉담함은 위기를 들어내 주고 있다. ·⁠·⁠· 위기는 다 알려졌다. 위원회도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을 인정(및 확인)하였다. ‘미사’ 참석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사제들이 탈퇴하고 있으며, 많은 교구들은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

그 동일한 기사는 교직자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인 권력으로서의 교권주의는 이 때(1949)에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에 국가가 ‘퀴벡’의 생활에 최상의 제도가 되도록 하는 길을 닦았다. ·⁠·⁠· 비교적 짧은 기간에 ‘퀴벡’의 사제들은 ‘사회적 지위와 신도들을 다’ 잃었다.”

‘가톨릭’ 교회의 문제들이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주교들의 요청으로 정부가 임명한 ‘뒤몽’ 위원회가 “평신도와 교회”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 위원회의 315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가 1971년 12월에 발행 되었는데 이미 식자층에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대개 확인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것들 즉 교회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으며, 교직자나 평신도들이 다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퀴벡’ 사람들에 관한 한, 흔히 표현되는 일반적인 견해는 “교회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무더기로 교회를 떠남”

교회는 결국 사람들의 지지에 의존하는 것이다. ‘뒤몽’ 보고서는 ‘가톨릭’ 생활의 이 부면에서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10년 동안에 예배식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젊은 층에서 가장 현저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점차적으로 그리고 조용히 감소 현상이 일고 있다.”

1974년 3월에 사제들을 위한 ‘몬트리오올’ 출판물인 「릴레이션스」라는 책에서 그 변화가 얼마나 급격한가를 다음과 같이 알린다. 10년 동안에 일요일 교회 참석률은 65‘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떨어졌다. 그리고 15세에서 35세 사이의 젊은 층에서는 12‘퍼센트’로 내려갔다.

‘웨스트 마운트’ 지방의 ‘레오블레이스’ 주교는 “충실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사제들의 충원 문제도 심각하다. 사제들을 교육하는 신학교는 ‘니꼴레’와 ‘졸리에뜨’, ‘리므스키’ 그리고 ‘세르부르크’에서 문을 닫았다. 건물들은 정부가 지역 사회 대학을 위해서 또 ‘니꼴레’에서는 경찰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사제를 지망하는 지원자의 수는 ‘뒤몽’ 보고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일년간 우리 교회의 교직자(사제와 기타) 지원자 수는 1946년엔 2,000명을 넘었지만 1970년에는 100명을 약간 넘을 뿐이었다.”

1974년 3월에 「릴레이션스」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68년에 사제들의 인원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직을 떠나고 있다. 동시에 교직자들의 보충은 올해에 세명의 신학생이 새로 들어옴으로 최소에 다달았다.” 이것은 ‘퀴벡’ 주의 교인의 3분의 1이상 즉 1,700,000명의 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몬트리오올’ 대주교구의 경우이다.

‘가톨릭’ 기구의 회원도 급격히 줄고 있다. 10년 전에는 28,000명의 회원이 있었던 ‘성심 연맹’은 현재는 단지 3,000명뿐이다.

영적인 문제와 인사 문제는 떠나서라도 ‘퀴벡’에 단지 교회당을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그들 중 많은 것은 파산 지경에 있다.

‘몬트리오올’ 시의 유명한 교회당들 중 많은 수가 헐려졌으며 그 대지들은 다른 목적에 쓰이고 있다. 이런 것들 중 하나가 ‘에이멀스트’가에 있는 ‘알렉산드리’의 ‘노트르담’ 교회당이다. 이 경우에 ‘벤자민 트렘블레이’ 사제는 그의 교회가 일부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왜 그는 기뻐하는가?

그는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교회는 이제 마땅히 그 지역에서 사회적, 경제적 생활에 종사해야 하고, 그 새로운 중심지는 그 주변의 경제적으로 약한 구역을 돕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그 전에 그는 이 “주체하기 힘든 물건”을 보전하기보다 처분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었다. ‘몬트리오올’에서 11개의 커다란 ‘가톨릭’ 교회당이 1967년 이래 문을 닫았다. 한편 다른 것들도 팔거나 허물 것이라고 한다.

‘가톨릭’이 쇠퇴하는 원인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이 ‘가톨릭’ 세력의 극적인 쇠퇴를 초래했는가?

‘가톨릭’ 지도층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 수많은 불신을 초래했다. 이것은 ‘퀴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국’ 교직 계급에 대한 ‘예수회’ 비평가인 ‘앤드류 엠. 그릴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나는 현재의 교회 지도층이 도덕적으로, 지성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파산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방향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

「‘캐나다’ 70」의 사회학자들은 ‘퀴벡’의 교회 안에서 “거대한 신뢰도 격차를 발견했다. 그 격차는 어찌나 심한지 평신도들이 교직체의 거의 모든 활동을 의심할 정도가 되었다.”

앞서 인용한 ‘레오 블레이스’ 주교도 역시 교직자들을 지적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부 사제들은 현재 ‘몬트리오올’의 교회 내의 혼란의 근원이다. “그들의 생각에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가톨릭’ 교도들을 떨어져 나가게 한 것은 우리의 기강의 부족과 불순종 때문”이라고 ‘블레이스’는 말했다.

“교회는 죽었는가?”

“교회는 죽었는가?” 이 질문은 ‘몬트리오올’에서 ‘프랑스’어로 발행되는 신문인 「라 빠뜨리」의 표제로 나타난 질문이다.

그 대답으로 ‘위베르 팔라르도’ 사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황들과 주교들]은 교회가 세속 사회가 아니라 영적 사회라는 것을 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신도의 수자만 생각했지 질은 염두에 없었다. 사람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계율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별로 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여러 가지 계율을 받아 들였다. 명절이나 큰 축제들과 같은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드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는 계속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특질을 잃고 있다. 교회의 초기에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았다. 후에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전제 하에 출생시에 세례를 주었다.”

이 ‘가톨릭’ 사제는 지금 참 그리스도교 교육과 성인 세례와 사람들 사이의 전도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엄격히 고수하는 일들이고, 그것이 그들의 활동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죽었는가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들의 활동과 전세계에서의 헌신적인 전도 사업은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낸 답변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퀴벡’ 사람들에게 호별 방문으로 철저한 전도 사업을 했다. ‘퀴벡’ 주의 ‘졸리에뜨’ 출신의 증인 ‘에베레트 칼슨’은, 교회에 대한 태도 변경의 이유로서 ‘가톨릭’교인들에게서 어떤 점을 관찰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0년 이래 사람들의 태도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얘기하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 또 교회의 변경에 대해 자기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대해 덜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지옥불의 가르침이나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또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변화가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로마’ 교회가 ‘퀴벡’에서 거의 절대적 권력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인상을 갖는 것은 잘못임을 기억해야 한다. 젊은층은 대다수가 교회에 대한 지지를 중단했지만 교직자나 평신도 간에 나이든 세대는 여전히 적지 않게 교회를 따르고 있다. 의식과 습관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1960년과 1974년 사이에 ‘퀴벡’에는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조용한 혁명’은 여러 가지 유익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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