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있는 미식 축구보다 더 나은 것
두명의 미식 축구 직업 선수가 훨씬 더 좋은 것을 알게 된 데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보다도 나에게는 ‘스포오츠’가 더 중요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엔 ‘스포오츠’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키가 188‘센티미터’이고 몸무게가 90‘킬로그램’ 정도 되었을 때 나는 이미 고교 체육계에서 널리 알려졌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축구에만 열중하였으며 ‘버클리’의 ‘캘리포오니아’ 대학 ‘팀’ 전위로 활약하였다. 나는 3년간 “태평양 연안 지방 대표 선수”로서 선정되었고 4학년이 되어서는 ‘푸로’ 축구인들이 선정하는 ‘‘푸로’ 축구 전 미 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후 1973년에 나는 가장 우수한 ‘푸로’ 축구‘팀’ 중의 하나인 ‘오오크란드 레이더스’에 선발되었다. 나는 첫 ‘시즌’을 맞아 잘해내었다. 그러나 작년에 그만 두었을 때 그 사실이 지방 ‘스포오츠’ 신문에 제1면 기사로 실렸다. ‘샌프란시스코’의 ‘크로니클’지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레이더스’ ‘팀’의 두 ‘설득’ 대표자들은 아직 그의 생각을 변경시키지 못하고 있다. ··· 그가 현재 탁월한 선수라는 사실은 ‘레이더스’ ‘팀’이 긴급하게 대표자를 물색하여 그를 다시 돌이키려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1974년 6월 21일자.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그만둔 이유는 무엇인가? 그처럼 장래가 촉망되는 미식 축구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경기에 대한 태도
내가 그렇게 한데는 ‘푸로’ 축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푸로’ 축구를 나는 좋아했다. 전국적으로 가장 우수한 선수들과 경기를 하고 그들과 기술을 겨뤄보는 것을 좋아 하였다.
그것이 거치른 경기인 것은 사실이며 매년 수십 명의 ‘푸로’ 선수들이 중상을 입고 있다. 사실상 매년 여덟명의 선수 가운데 한명이 무릎 수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만 둔 것은 부상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신체적으로 과격한 경기를 좋아하였다.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지금 목수로서 몇년간 버는 돈보다 ‘푸로’ 축구에서 일년간 버는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해 동안 더 많이 벌 전망이 있었다.
나를 번민케 한 점들
그러나 축구와 관련하여 나를 번민케 한 점들이 몇가지 있었다. 어려서 받은 교육이 나의 생각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 없다. 내가 열살되던 해에 나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스포오츠’에 너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데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동료들이 마약을 강력히 권고했을 때 단호히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버클리’에서 약 1년 반을 지낸 후에는 나도 결국 경기 전에 ‘암페타민’을 사용하게 되었다.
‘암페타민’은 경기 중에 선수를 더 활동적이 되게 해 준다. 그것은 피로를 몰아내고 항상 민첩하게 해 주며 더할 수 없이 빠르게 만들어 준다. 많은 ‘푸로’ 선수들은 그들의 직업이나 생계가 시합에서 민첩함과 속도를 최고도로 발휘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에 그러한 약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 후에도 몇시간 혹은 심지어 몇일간 긴장 상태에 있게 된다. 나도 경기후 꼬박 하루 동안 잠을 못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선수들은 경기후 긴장을 풀기 위해 다른 마약을 사용하기도 한다.
얼마 후 나는 ‘마리화나’를 피우기도 하고 ‘코카인’을 들이쉬는 일도 하였다. 나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와하였다. 그러나 동료들이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게 되었다. 또한 ‘푸로’ 선수 생활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 부도덕한 생활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여자들은 언제나 선수들의 뒤를 줄줄 딸아 다녔다. 기혼인 선수들도 자기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의 태도는 ‘그는 ‘푸로’ 축구 선수이다. 그러니 만사 ‘오케’이다.’ 하는 식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축구 선수들이 “특별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변명하는 것이리라.
풋내기로서 나는 ‘팀’에 속한 여러 사람을 존경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언행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모든 느낌과 존경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봐, 나는 지난 주에 마누라 말고도 다섯 여자와 함께 하였었다구”라는 말을 예사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래 이런 사람을 내가 우상화했다니.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말자.”
그러나 얼마 후 나도 내가 미혼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와 동일한 짓을 행하기 시작했다. ‘푸로’ 축구 선수들의 이면을 보면 그것은 정말 좋지 않은 고급 생활이며 매우 부도덕한 생활이다. 내 말은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점을 선수들 사이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품에 미치는 영향
갖가지 찬사를 받게 되면 그 자신이 영향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경기 시작하기 전에 ‘테레비젼’ 상업 광고에도 나온 바 있는 유명한 선수와 악수하기 위해 수 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왔었다. 그 사람은 손을 내밀면서 “나는 당신이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부언하였다. “하지만 ‘캔사스’ 시를 응원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그 선수는 손을 재빨리 거두어들이면서 “여기서 꺼져, 나는 ··· 원치 않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욕을 해댔다.
그 오만과 자만심을 보고 나는 혐오감이 생겼다. 선수는 유명한 사람이니까 사람들을 그렇게 대우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비록 ‘프로’ 축구계에서 정상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대학에서는 그랬으며 그로 인해 나는 영향을 받았다.
당신이 ‘캠퍼스’의 영웅이 되고 사람들이 항상 당신에게 참으로 위대하다고 말할 때 겸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집에 가는 경우엔 나의 어머니와 벗들은 나에게 성서의 견해를 알려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생각을 우습게 여겼다. 오히려 그들이 나의 공적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진지하게 고려해 봄
나는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생활은 아무런 목표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변화를 하기로,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대마초 피우는 일과 ‘코카인’ 들이쉬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런데 작년 초 어느날 밤 어떤 친구들이 “‘엑소시스트’를 보러가자”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잔인하고 사악한 내용을 다룬 영화였다. 극장을 나온 후에 나는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존재에 대해 성서에서 공부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나는 ‘모데스토’에 살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인 누이와 매부에게 전화하였다. 그들은 악귀들이 실제로 인간들과 지상에 있는 것들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이야기해 주었다. (에베소 6:12; 사도 16:16-18; 19:11-17) 깊은 생각에 잠겨 나는 차를 타고 ‘모데스토’로 향하였다.
성서 토론을 통해 나는 정말 영계가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면 참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을 그분의 목적에 일치하게 사용하지 않는 한 나의 정력은 낭비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자 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없고 단지 공허하고 천박한 느낌 밖에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많은 돈, 세상적 명성, 부도덕, 마약, 등등의 물질적인 것을 과시하는 길이다. 반면에 다른 길이 있는데 성서 연구, 그리스도인 집회, 하나님께 대한 봉사등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이지만 진정한 의미가 있는 생활이다. 내가 이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길인 것이다.
진정으로 더 나은 길
나의 결심을 알게 되자 ‘레이더스’의 대표자들이 나를 방문하여 나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돈이 잘 벌리는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였다. 나는 아직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그 세계를 알게 됨으로써 오게 된 결과들, 즉 마약 사용, 방종한 생활, 거만하고 자만에 가득찬 정신 태도 등에 관해서 언급했다. ‘푸로’ 축구와 관련된 전체 생활 행로는 지금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나는 ‘팬’들에 의해 우상화 되어 가고 있었으나 더 이상 그러한 우상 숭배에 기여하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 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긴급한 왕국 전파 사업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고 싶었다.—누가 4:43.
1974년 여름에 물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나의 헌신을 표상하였으며 그 이래로 영적인 축복을 받고 있다. 미식 축구 선수로서 한창이었을 때는 ‘스탠포드’의 경기후에 환호성을 지르는 70,000명의 ‘팬’들 앞에 영웅으로서 경기장 이곳 저곳으로 들려다니는 등 여러 가지 감격스러운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나는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호별 방문 전파를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한 관심을 가진 한 젊은이를 만났다. 나는 그를 몇차례 재방문하였는데 그는 자기 집에서 매주 나와 성서를 연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셨고 자기의 참다운 추종자들에게 계속하라고 권고하신 ‘제자를 삼’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경험은 지금까지의 내 생활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마태 28:19, 20.
‘푸로’ 축구 선수 생활을 한바 있는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낀 바와 거의 동감이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캘리포오니아’ 주 ‘스토크톤’ 근처에 살고 있다. 그는 ‘내셔날 풋볼 리이그’에 일곱 ‘시즌’ 출전했는데 그 중 다섯번은 제1선 수비를 보았다. 그러면 그분의 말을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원한 바를 달성함
고등학교 때 나는 ‘에디슨’ 고교 축구 ‘팀’의 전위로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리하여 졸업하자마자 전국 40여개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나는 집 가까이 있고 싶어서 ‘산 호세’ 주립 대학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4년 동안 대학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한 후에 나는 전국적으로 가장 촉망되는 ‘푸로’ 선수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었다. “내셔날 풋볼 리이그”에 속한 거의 모든 ‘팀’들이 나와 교섭을 벌였다. 나는 키가 190‘센티미터’이고 몸무게가 110‘킬로’였으나 36.5‘미터’를 4.9초에 돌진할 수 있었다.
‘그린베이 패커스’ ‘팀’은 1966년 제3회 대학 선발전에서 나를 선발해 갔다. 계약에 서명하는 특별 상여금으로 신형 ‘올드스 모빌 토로나도’ 한 대와 현금 10,000‘달러’를 주었다. 나의 초봉은 연 18,000‘달러’였다.
나는 21세의 나이였는데도 호주머니에 백 ‘달러’짜리 지폐로 5,000‘달러’ 이상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자, 이제 이만하면 됐다. 나에게는 돈도 있고 새 차와 명성과 좋은 옷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고 일류 식당에서도 환영하고 있다.’
훈련 ‘캠프’
나는 1966년 7월에 ‘패커스’ 훈련 ‘캠프’에 가게 되었는데 신체적으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었다. 훈련은 아주 엄하였으나 그곳에서 나는 ‘캠프’에 오기 전에 가진 ‘컨디션’ 조절 계획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람들도 나만큼 ‘컨디션’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고통에 못이겨 훈련에서 낙오자가 되자 포기해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롬바르디’ ‘코우치’가 나를 불렀다. 그는 ‘세인트 루이스 카디날스’로부터 방금 전화를 받았다. 그 ‘팀’은 으뜸가는 전위 한사람이 심장 이상으로 축구를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훌륭한 대치자를 필요로 하였다. ‘패커스’는 많은 현금과 함께 선수 선택에 대한 우선권을 약속받고 나를 ‘세인트 루이스’ ‘팀’으로 보냈다.
경기의 실상
‘세인트 루이스’에서 나는 계속 발전하여 결국 방어선의 주 ‘멤버’가 되었으며 돌격에서 으뜸가는 선수가 되었다. ‘코우치’들은 난폭해져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나는 예외적으로 건강하였기 때문에 적수를 치는 기술이 훌륭하였다. 미식 축구 경기를 “전쟁”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제1선 공격진에서 활약하였는데 전위로서 수비하는 선수는 맨손으로 상대편을 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규칙에 위반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적수의 머리를 치는 방법을 익혔다. 그것이 소위 “머리치기”라고 하는 것이다. 강하게 때리면 상대편 공격자는 두통으로 앓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적수에게 해를 주어—어디가 아프게 되든지간에—심하게 고통을 주는 데 있어서 재빠르면 재빠를수록 나는 더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힘껏 공격해 오는 전위를 치면서 그 순간에 공을 잡아채곤 하였다. 그의 머리에 충격이 가해져 얼얼하는 사이에 나는 그를 제치고 ‘쿼터백’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팔꿈치나 팔 역시 사용하였다. 한번은 팔로 어떤 선수의 모자를 부숴버렸다.
‘푸로’ 축구에서 내가 대항하여 경기를 벌인 여러 선수들은 대학시절에 내가 사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기날에는 우리가 숙적이 되어 신체적으로 서로 치려고 하는 것이다. 대학 시절에 친한 친구이자 방을 같이 썼던 한 선수는 후에 ‘클리브런드 브라운스’를 위해서 뛰게 되었다. 그 ‘클리브런드’ ‘팀’과 경기를 벌이게 되었을 때 내가 그를 얼마나 세게 쳤던지 나중에 그는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의 아내와 나는 그 일 때문에 번민하였다.
경기 전략
나는 우리가 ‘클리브런드’ ‘팀’과 경기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 ‘코우치’들은 상대편 ‘쿼터백’이 강적이라고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기회만 생기면 그가 경기를 못하게 만들라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경기 도중에 제1선을 뚫고 들어갔는데 거기에 그가 서 있었다. 나는 팔로 힘껏 그의 머리를 쳤다. 그는 버둥거리며 공을 놓쳐 버렸다.
나의 ‘팀’ 성원들은 나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괴로와하는 ‘쿼터백’을 응시하였다. 나는 갑자기 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동물이 되어버렸는가? 이건 경기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불구자로 만들려 하고 있다.” 나는 또한 그도 나와 같이 처자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다. 관객들은 나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으나 나는 내 행동을 옳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내가 적수를 고의적으로 해치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매주 우리의 전략 회의에서 상대 ‘팀’ 선수들의 약점과 상처를 토론하였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전략은 주로 적수의 가장 약한 곳이나, 전에 부상당한 일이 있는 곳을 치는 것이었다.
후에 ‘뉴우요오크 예츠’ ‘팀’과 붙게 되었는데 그 ‘팀’이 희망을 걸고 있는 ‘쿼터백’이 무릎에 여러 번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므로 그 점을 공격해야 하였다. 어느 날 나는 그의 무릎에 심한 상처를 낼 만한 기회가 있었다. 후에 ‘코우치’들은 나보고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것이 필요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말하였다. 나의 ‘팀’ 성원들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1971년 우리는 ‘버펄로 빌스’ ‘팀’과 대전하였다. 후위에 있는 그 ‘팀’의 ‘스타’는 발목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로 경기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경기 중에 나는 그의 발목을 잡아 채어 그가 넘어지자 발목을 누르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위반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상처를 내지 않았다. 그러한 색다른 태도를 보고 매 주일 상대편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고의적으로 상처를 내지 않은 점에 대해 나에게 깊은 감사를 나타내었다.
태도 변화에 영향을 준 요인들
1969년의 한 경기에서 얻은 등의 상처는 나의 태도를 변화시킨 한가지 요인이 되었다. 그 ‘시즌’에는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계속 등과 다리에 고통을 느껴가면서 대부분의 경기를 하게 되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너무나 고통이 심하여 집안을 기어다녔다. 1970년 4월에 등을 수술하여 상태가 약간 나아진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나는 그와 같은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의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을 주저하게 된 데는 그 이상이 관련되어 있다.
내가 수술할 때쯤 나의 아내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전부가 돈을 벌어들이는 종교적 술책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공부하고 싶으면 당신이나 하시오. 나는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나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가면서 나의 아내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왜 죽으셨는가? 하나님의 왕국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나에게 하였다. 그러한 질문들은 어려운게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알지 못하였다. 그 점은 나를 괴롭혔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성서를 약간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후에는 나의 생각을 바꾸어 매 주일하는 아내의 성서 연구에 참석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해답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연구가 좋았다. 그 후에 나는 ‘캘리포오니아’ 주 ‘스토크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더 나은 것
얼마 후 내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서 배우고 있는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했을 때 나와 나의 가족이 도움을 받았던 바와 같이 그러한 지식이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와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 2월에 나의 아내와 나는 그리스도인 대회에서 물침례를 받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우리의 헌신을 표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축구 선수로서 계약 기간이 아직도 2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7월이 닥아오자 나는 훈련 ‘캠프’로 가지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나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나는 ‘푸로’ 축구의 잔인한 행위, 특히 공격자들의 행위가 그리스도인 원칙들과 일치되지 않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5:22, 2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서도 지적하듯이 계약을 이행함으로써 자기 약속을 지킨다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마태 5:37) 진퇴양난으로 보이는 점에 대해 나는 여호와께 여러 차례 기도하였다.
그런데 1972년 ‘시즌’ 도중에 전에 앓은 적이 있던 등의 상처가 도져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게 되었다. 그 ‘팀’에 대한 나의 역할이 의문시 되었기 때문에 ‘카디날스’는 계약에서 나를 해제해 주기로 동의하였다. 나는 자유롭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미식 축구 같은 ‘스포오츠’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도 ‘스포오츠’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기심과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려는 태도로 인하여 ‘푸로’ 경기가 파멸 상태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체 제도에 동일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영이 만연해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자기를 섬기려는 사람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은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분의 말씀은 이제 멀지않아 그분께서 모든 이기심과 탐욕과 함께 이 전체 제도를 완전히 쓸어버리시고 그것을 의가 거하는 새로운 사물의 제도로 대치시키실 것을 분명히 알려 주고 있다. (마태 24:36-39; 베드로 후 3:5, 13) 그러한 새로운 제도에 대한 성서의 약속은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성서 계시록 21:4에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인간의]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류를 축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러한 웅대한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것이 나에게는 인기 있는 축구 보다 훨씬 더 나은 천직으로 생각되는 것이다.—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