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적이고 실용적인 지침서
오늘날 정직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 주의 저명한 정신과의사 겸 내과의사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대적인 생활 양식의 결과 감정적인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 사람들은 마약, 성적 방종, 적자 생활의 압박감, 도덕적 가치관의 변천, 가정 생활의 파탄 등을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점들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절실히 필요한 지침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성서의 실용성을 지적하여 ‘버드나드 바룩’이라는 미국의 정치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였다. “십계명과 산상수훈은 아직도 가장 훌륭한 지침이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했는가? 유명한 산상수훈 가운데 언급된 몇가지 원칙을 간단히 고려해 보자.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낱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후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마태 6:31-34; 누가 12:15.
필요한 음식이나 의복, 거처 등에 대한 인간의 정상적인 염려가 여기에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물질주의적인 세상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것을 강조한다. 상업주의는 사람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사치품에 대한 욕망을 계속 자극한다. 그러므로 만족감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욕망이 적은 사람이 갖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가를 올바로 보아야 하며 그러한 필수품을 얻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지침을 높이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실용적인 성서의 지침
성서가 여러 세기 전에 기록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그 지침은 실용적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된 것도 많으나 인간 본성은 변화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문제들의 범위와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전 사람들이 직면하였던 문제와 동일한 문제들을 오늘날도 직면하고 있다. 「월드 북 백과 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된 바와 같다. “과학과 공학은 발전하였지만, 인간 문제의 해결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신뢰할 만하고 유일한 해결책이 성서에 들어 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편 107:43.
간소한 생활이 바람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것은 간소한 생활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인간이란 마땅히 그래야 하며 또 그렇게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용적인 지침에 따라 살아갈 때 이 악한 제도에서도 상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한 기본적인 권고를 벗어나서 생활하게 될 때 그의 생활 양식은 실제로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으며 중요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하게 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이다.
무거운 부채,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망, 명성이나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 사회적인 신분을 위한 투쟁, 양심을 범하는 도덕 표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것 등—이 모든 것들이 “혼란된 사회”를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불행, 좌절감, 분쟁, 심지어는 자살등을 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은 의사나 정신과의사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마약을 사용하거나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조언은 상태를 악화시키는 경향이 많다.
성서의 확실성이나 실용성에 관한 다른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성서의 의로운 원칙과 도덕 표준 자체가 성서는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나타내 준다. 성서의 실용성은 일상 생활의 모든 부면에 다 적용된다. 다른 어떠한 책도 만물의 기원 특히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그리고 지구와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목적에 대해서 그처럼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성서의 충고를 적용하면, 얼마나 효과적일 것인지 고려해 보라.
오늘날에는 인종주의나 국가주의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다. 성서는 그러한 관념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사도 17:26)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제거될 것이다.
도덕률
성서는 결혼하지 않고 가지는 성관계를 “음행”이라고 말한다. 실용적인 지침은 “음행을 피하라”는 것이다. “음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 6:18; 에베소 5:5) 성서는 또한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전 6:9, 10) 그러한 성서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많은 불행과 증오와 질병이 제거될 것이다.—로마 1:24-27.
결혼과 가정 생활
결혼 생활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권고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에베소 5:22, 28; 6:1.
연합된 가정 생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성서는 부부관계, 자녀의 교육과 징계 그리고 가정의 행복 등에 대한 충고를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한 충고는 얼마나 실용적인가? “동성애는 정상 생활이 아니라 병증이다”라는 기사에서 ‘찰스 더블류. 소카리디스’ 박사는 ‘어빙 비이버’ 박사가 쓴 “동성애: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정신 분석학적 연구”라는 책을 참조하였다. 106명의 남자 동성애자와 100명의 남자 이성애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서, 동성애자들의 부모는 어머니가 지나치게 감싸고, 지나치게 친밀한 경우와 아버지가 적의를 갖고,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였다.
‘소카리디스’ 박사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성애는, 성별 형성에 결정적 요인이고 보통 세 살 쯤에는 성숙하는 유아기의 개성 형성의 과정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결과 남자 아이에게 남성다움이 결여되고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초기의 여성적 경향이 강화되고 지속되게 된다. 그리하여 동성애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성애란, 가족 단위 내에서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로서의 합당한 위치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여러 가지 나쁜 열매들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가족적으로 연합, 신뢰감이나 신임, 행복이 사라진 곳에서 어떻게 합당한 자녀 교육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분열된 가정, 대화나 사랑에 찬 관계가 없는 가정, 질서나 규율이 없는 가정의 각종 범죄를 유발시키는 한 가지 요인이다. 가정 생활에 관한 성서의 교훈을 무시함으로써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어느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나쁜 교제
좋지 않은 경향이 가족적인 배경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많지만, 도덕적인 타락이 만연된 데는 다른 요인들도 물론 있다. 외설 서적을 읽는 것은 그 책의 저자와 일종의 정신적인 교제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도덕감이 저속한 사람들과 실제로 교제하면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극한 방탕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 전 4:4) 성서는 좋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며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경고한다. (고린도 전 15:33; 빌립보 4:8) 나쁜 행실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벗”으로 삼게 된다면 우리도 나쁜 행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성서는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잠언 13:20) 그것은 훌륭하고 건전하고 실용적인 충고가 아닌가?
사업 거래
성서는 사업 거래에 관해서도 충고하고 있다. 성서는 그 원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하나는 사는 데 사용하고 하나는 파는 데 사용하는]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그리고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라].” (잠언 20:10; 22:22) 더우기 성서는 일하기 싫어서 “부자들을 이용하자”는 주의를 택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 성서 원칙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공평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라].”—레위기 19:15.
인간 관계에 대한 성서 전체의 실용적 교훈은 예수의 다음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 7:12) 이 원칙을 따른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모두가 훨씬 더 행복하게 될 것이다.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지침
성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고, 성서는 읽는 사람도 상당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서의 충고를 적용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단지 성서를 가지고 있거나 읽어 보는 것 혹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복하기 원한다면 성서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호의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부패한 사물의 제도에 살고 있을지라도 성서의 충고를 성공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지금 그렇게 한다면 생활의 질이 틀림없이 향상될 것이다. 성서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한 바와 같다. (디모데 전 4:8)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사람들의 생활에서 나타난 풍부한 증거들이 그 점을 온전히 그리고 확실히 알려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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