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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7
깨77 5/8 17-19면

다양한 문화의 “도가니”

‘오스트레일리아’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당신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 본 일이 있는가? 방문해 본 적은 없어도 무덥고, 건조한 사막과 관목으로 덮힌 광대한 지역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거칠고 무섭게 생긴 토인들이 주로 살고 있다는 의미인가?

이 대륙에 거대한 사막이 있음은 사실이다. 또한 땅 덩어리는 미국만한데 인구는 미국의 7‘퍼센트’도 안된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를 도시의 나라라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1천 3백만 인구의 절반 이상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도시들이 거칠은 원시적인 도시는 아니다. 오히려 일부 도시에서는 ‘뉴우요오크’, ‘런던’ 혹은 세계적인 다른 대도시들에서 처럼 마천루와 교통 혼잡이나 복작거리는 보행자들을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도 많다. 여러 나라의 음식을 제공하는 음식점들도 많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가지 특징은 근래에 와서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1945년 이래 인구가 거의 6백만 정도 늘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늘었는가? 서부의 한 광산 도시의 행정관은 그 도시의 주민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대부분은 나처럼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이 아닙니다.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온지는 17년이나 되었지만 독일 태생입니다. 이 나라는 여러 인종이 섞인 도가니와 같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점이 좋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약 40‘퍼센트’는 전후에 이민온 사람들이다.

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이민온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몇 가지 역사적인 주요 사건을 간단히 살펴 보면 흥미있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초기 이주자들

초기 거주자들은 ‘아시아’인들로서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하게 된 것 같다. 오늘날 그들의 후손을 “애버리지니스” 즉 원주민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처음부터”를 의미하는 ‘라틴’어 ‘아브 오리지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임시로 거처를 정하면서 주로 유목 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이들 많은 원주민들이 원시적 생활 방식을 택했다고 해서 그들의 지능이 낮은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원주민 촌락의 한 행정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1976년판)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원주민 언어가 약 260가지가 있다. 그 사전은 원주민의 지적 수준이 높은 것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각 부족은 적어도 하나의 방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말이나 여러 가지 말을 같이 사용하는 부족이 많다 ··· 일반적으로 이 ‘오스트레일리아’어들은 문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을 때인 16세기와 17세기에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네델란드’나 영국의 탐험가들이 그 대륙의 일부를 발견하고 그 해안을 지도에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정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770년에 ‘제임스 쿠크’ 선장이 동부 ‘오스트레일리아’를 영국령으로 선포하였다.

그 직후에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18세기 초에 영국은 미국의 13개 주를 유형지로 사용하였다. 1776년에 이 식민지를 잃게 되자 영국은 새로운 유형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결국 그러한 목적을 위한 정착지가 1788년에 처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뉴우사우드웨일즈’의 ‘시드니’에 생겨났다.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송된 범죄자들이 처음 “이주민”이 되었다. 복역 기간이 끝나도 많은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 계속 남아 있었다.

매혹적인 천연 자원

그 당시에는 자유인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자유인의 정착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완전히 바꿔 놓은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무엇인가?

1800년대 중엽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순식간에 전세계의 모험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독일인, ‘헝가리’인, ‘스칸디나비아’인, ‘폴란드’인, 미국인, 중국인 등이 금 채굴지로 몰려 들었다. 이 때문에 죄수들의 유형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금 외에도 ‘니켈’, 구리, ‘알루미늄’, 아연, 철 등 값진 금속들이 매장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떤 철광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최근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 특수한 광맥은 세계에서도 가장 풍부한 광맥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길이가 6.4‘킬로미터’, 나비가 1.2‘킬로미터’, 깊이가 150‘미터’나 됩니다. 그것이 고갈되더라도 또 다른 광맥이 있읍니다.” 실제로 최근의 조사를 통해 막대한 매장량을 가진 새로운 광맥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천연 자원이 풍부하였지만 2차 세계 대전 말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단지 7,491,000명 밖에 안되었으며 그것은 1평방 ‘킬로미터’당 약 1명 꼴이었다. 주택과 학교와 병원이 심각하게 부족하였다. 석탄과 철의 생산이 감소되었다. 수송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 도시가 흑암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다. 인력 부족을 절실하게 느꼈다. 어떻게 부족한 인력을 충당시킬 수 있을 것인가?

“도가니”의 형성

1945년에 정부는 이민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때는 그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좋은 때였다. ‘유럽’이 전쟁으로 황폐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열렬히 환영하였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에는 이민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곧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 세계 대전 이후에 3백만 이상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탈리아’, ‘그리이스’, ‘네델란드’, 서독,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최근에는 남미에서 이민을 왔다.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약 65‘퍼센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마련한 ‘호텔’에 거주하였다. 이러한 대량 이민 계획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1945년 이후에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은 현명한 것이었는가? 처음에 어떤 비평가들은 그러한 이민 계획이 재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전에 금을 파내는 백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의 불상사를 기억하였다. 또한 더운 북부의 사탕수수 농장을 위해 값싼 노동력을 수입함으로써 비‘앵글로 색슨’계 국적을 가진 이주자들에 대한 불만이 쌓인 점도 생각하였다. 이민 계획 때문에 예전의 그 앙심의 자극을 받아 폭력 사태로 발전되지나 않을 것인가?

처음에는 색다른 언어와 문화 그리고 활동과 생활과 식사 습관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이민을 오자 어느 정도 거부 반응이 나타났다. 이러한 점 외에도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오스트레일리아’인”(이민 온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이 일을 더 잘하였다. 따라서 “오래된” ‘오스트레일리아’인 노동자들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직장을 잃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끝에 있는 ‘카아나아번’의 한 ‘포르투갈’인 농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우리를 외국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우리가 도마도, ‘피망’ 혹은 기타 각종 농작물을 길러 내려고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하는 방법을 압니다. 우리는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도마도를 1,100상자나 납품하였읍니다.”

이러한 문제들 외에도 어떤 이주자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고통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생소한 생활 방식을 받아 들여야 하였다. 향수에 젖을 때가 많았다. 또한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보다 더 빨리 영어를 배웠다. 젊은이들이 영어를 모르는 부모들을 위해 통역을 해 주고 다른 가족적 책임도 수행하였다. 아이들은 남부 ‘유럽’인인 엄한 부모와 자유스러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에서 상당한 갈등을 느꼈다.

여러 가지 문화로부터 얻는 유익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리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국적이 다른 노동자들은 서로 간에 배울 수 있었다. 사실상 이주자들이 없었다면 산업이 그만큼 발전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정이나 거리에서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언어를 들어 볼 수 있다.

종종 가게에는 점원들이 몇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는지 표시를 해 놓았다. ‘뉴우사우드웨일즈’ ‘울런공’의 제철 공장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네 가지 언어로 기사를 싣는다. 약 20,000명의 공원들이 이 신문을 보는데 그들 중 약 절반이 약 40개국에서 이민온 사람들이다.

여러 인종적 배경을 가진 연로한 사람들이 그들의 특유한 문화를 보존하려고 노력을 해 왔다.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에 다양성과 변화가 한층 더해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인의 사탕수수 마을이 있고, ‘그리이스’인의 어촌이 있고, 독일인의 포도원이 있다. 심지어 중국식의 절도 있다. 그 건축 양식이 독특하여 정부는 고적처럼 보호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도가니”에 사는 그들의 이웃에게 성서 진리를 즐겁게 전하고 있다. 전파를 위해 여러 가지 언어로 된 성서 출판물을 가지고 가야 할 경우가 많다. ‘그리이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슬라브’인, ‘아랍’인을 위한 큰 회중이 20개가 있다. ‘헝가리’어, ‘포르투갈’어, ‘시리아’어로도 정기적으로 집회가 열리고 있다. 많은 이주자들이 그들의 본국어로 성서 진리를 듣고 성서 원칙에 일치하도록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한 사람에게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할 때 방문객은 소박한 인정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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