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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하나님께 상달되도록
  • 깨어라!—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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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8
깨78 8/8 17-20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태고적부터 인간은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성을 느껴왔다. 도움 없이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을 만큼 인간 자신이 보잘 것 없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가지 기도 “보조물들”을 고안해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서(祈禱書)를 사용한다. 그들은 여러 경우에 사용되도록 인쇄되어 있는 기도문을 읽고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도록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중재해 주기를 간구한다. 또 한 가지 보편적인 방법은 기도를 암송하는 것인데, 그들이 몇번 기도했는가를 세기 위해 염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조물들을 사용하는 교회 내의 어떤 종교적 지도자들은 그것으로도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 언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데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 즉 방언을 사용하여 기도한다.

‘뉴우멕시코’의 ‘페코스’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로마 가톨릭’ 사제 ‘데이빗 저레이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된다.” 그는 제안하기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이 “당신으로 하여금 완전한 기도를 드리게” 할 것이라고 하며, “알다시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의사 소통의 간격이 있어서 교량이 필요한데, 방언이 그런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서가 알려 주는 사실을 유의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성서는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의 가르침 및 습관에 관하여 알려 주며, 기타 고대의 충실한 사람들의 행적에 관해 자세히 알려 준다. 그렇지만, 성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의사 소통의 간격”이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들 “기도 보조물들”을 한번에 한 가지씩 고려해 보며, 그것들이 진실한 기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방해가 되는지 알아 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들어 주시는 기도에 관하여 성서가 알려 주는 바를 고려해 볼 것이다.

기도서의 사용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로 들릴지 모르지만, 성서는 하나님께 무엇을 말씀드릴 것인가를 알기 위해 기도서가 필요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고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께 기도하는 데 어떤 사람들이 생각해내서 기록해 놓은 공식적인 기도서를 사용한 일이 없었다.

성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한다. (로마 1:7) 당신의 자녀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또는 “제게 문제가 있는데 도와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어떤 책에서 다른 사람들이 적어 놓은 말을 당신에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성서 내에 아름다운 기도들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에 대한 장엄한 노래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중에 많은 것들은 우아한 기도들이다. 물론 기도의 특권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말을 주의깊이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의 기도가 매우 간단할 수도 있음을 알려 준다.

한 예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에 대한 특별한 한 예를 알려 주셨다. 그분은 한 겸손한 세금 징수원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이보다 더 짧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높여 말한 거만한 ‘바리새’인보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누가 18:9-14.

성서 가운데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기도들—유려한 시편들도—하나님과의 우정을 묘사하고 있다. 고대의 여호와의 종들은 하나님을 우주 내에 있는 단순히 추상적인 “선을 위한 권세”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그들은 그분을 강력한 영자라고 인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명하신 숭고한 이름을 사용하여 그분을 여호와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들이 그분께 말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그분의 은총을 간청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축복을 간구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용서를 구하였다.—시 39:12.

사실, 사람이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고 그분께서 그것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시편 139편에서는 여호와께서 한 개인에게 주의를 돌리실 수 있는 능력을 아름답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개인으로서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편 전체를 읽어 보라. ‘다윗’이 읊은 그 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나이다].” (시 139:1-3) 이러한 관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과거의 하나님의 종들은 창조주께 직접 간구와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잘 아신다. 물론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가능한 한 말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의 말은 우리가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생각을 잘 나타낸다. 기도서에 씌여 있는 다른 사람의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진실성과 친밀성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성자들”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성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자들”에게 기도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서는 “중재자들”로서 그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든가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재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 어떤 죽은 자들에게 기도를 했다든가 그런 자들이 자기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도록 노력했다는 아무런 예도 알려 주지 않는다.a 사실, 성서는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죽은 “성자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알려 준다. 성서에 의하면, 죽은 자들은 의식이 없으며, 무덤 속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전도 9:5, 10; 요한 5:28, 29; 11:24.

그러므로 성서는 우리에게 성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일러 준다. (빌립보 4:6) 그러므로 “성자들보다는 좋은 주인과 함께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프랑스’의 속담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참되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고대 ‘유럽’의 어떤 왕들 앞에 나아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왕들의 통치하에서는 “법정에서 친면이 있는 사람”이 당신의 정당성보다 더 중요하였을 것이다. 성서에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하늘에 있는 어떠한 존재를 통하여도 나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예수 자신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일에 관해 말씀하셨다.—요한 14:6, 14.

「신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자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였음을 인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약 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기도들 즉 시적인 기도나 공식적인 예배 기도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졌다.” 그 백과사전은 또 “기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갖는 우정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제 6권 670, 673면.

“하나님과 갖는 우정”은 다른 사람이 당신을 대신해서 이야기해 줄 필요성을 없애 주며,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두렵다고 해서 “성자들”을 통해 나아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우리에게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말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그러한 중재자들이 필요없다고 지적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충고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함을 받고 은혜를 얻어 때를 따라 주시는 도움을 받기 위하여 담대하게[말의 자유함을 가지고, 신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히브리 4:14-16, 새번역) 우리가 기도에서 이러한 “말의 자유함”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중재자들이 필요없다.

염주는 어떠한가?

성경을 살펴보면, 암송하는 기도의 회수를 세기 위하여 염주나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는 말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성서는 동일한 기도를 반복해야 한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성경이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 12:12)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마태 6:7, 8) 만일 암기한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면, 몇번을 암송했는가 세기 위한 염주알도 분명히 필요없을 것이다.

“방언”이 필요한가?

인간의 한계성을 고려할 때, “방언”이 성령을 도와 “당신으로 하여금 완전한 기도를 드리게” 할 것인가? 그러한 생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기도의 친밀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것을 반복할 때 효험이 있는 마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부족함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당신은 자녀에게서 어떠한 표현을 들을 때 가장 기쁜가? 즉 그가 단순하면서도 진지하게 직접 감사하다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그에게 하도록 시켰으나 그 자신은 분명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유창한 말인가? 그렇다면 지성이 있고 사랑이 많으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어떤 외부 출처로부터 당신에게 인상을 준 알지도 못하는 말보다는 당신의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간구와 표현을 더 좋아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적이 아닌가?

시편 필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하고 말하였다. (시 119:145) 기도를 한 사람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비교 고린도 전 14:14, 15.

예수께서는 모범적인 기도를 알려 주셨다. 그것은 매우 단순한 기도였다. 이 모범적인 기도(흔히 “주 기도문”이라고 함)는 마태복음 6:9-13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합당한 기도에 대한 올바른 윤곽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의 이름, 그분의 왕국 및 그분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처음에 나온다. 그 다음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단한 물질적 필요가 포함된) 각 사람의 필요, 죄에 대한 용서 및 시험과 악한 자인 ‘사단’ 마귀로부터의 구원 등이 나온다.

“주 기도문”에는 유창함이나 웅변이 없다. 사실 「신세계역 성경」에서는 이 모범적인 기도가 단지 59개의 단어로 되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없다. 알지 못하는 방언도 끼어 있지 않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간구하는 내용을 이해하며, 마치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은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처럼 꾸밈없이 간구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모범적인 기도에 앞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보증의 말씀을 하셨다.—마태 6:8.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들이 “천사의 방언”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께 기도할 때 어떤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 없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자신의 기도들은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누가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드린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하신 예수의 짧은 기도의 단순성을 고려해 보라: “아바(“아빠”라는 뜻의 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 14:36) 이보다 더 간단할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 자신은 그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더욱 직접적인 기도는 그가 돌아가시는 순간에 하신 마지막 기도였다. 누가복음 23:46에서 그 기도를 읽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상달되는 방법

우리는 이제 기도가 상달되는 것은 기도서에 특별히 나열된 기도나 “성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염주로 세어가면서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에도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기 위해 “방언”을 사용하는 것에도 달려 있지 않다. 그와는 달리,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아가야 하며 우리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이 달려 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말의 자유함, 신세]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한 1서 3:21-23.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목적과 일치해야 한다. 그리하여 ‘요한’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1서 5:14.

잠언에서는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고 한다. (잠언 15:29)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의 목적과 일치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그분의 “귀”가 그들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확신한다.—시 10:17; 베드로 전 3:12.

우리가 그분께 기도로 나아올 수 있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매우 큰 겸손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를 감사히 여기며,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뜻에 깨어있게 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며,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길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하나님과 “의사 소통의 간격”을 두는 것과는 정반대일 것이다. 적절하게도 제자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편지하였다.—야고보 4:8.

[각주]

a ‘로마 가톨릭’ 「듀웨이 역」 성서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일들 가운데 ‘죽은 자에게 진리를 구하는 일’을 열거하고 있다. (신명 18:11, 12) 이 문맥은 강신술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죽은 자들—심지어 “성자들”—과 접촉하려 하는 사람에게 경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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