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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양이 조화를 이루는 ‘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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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9
깨79 05월호 16-19면

동서양이 조화를 이루는 ‘수리남’

「깨어라!」 ‘수리남’ 통신원 기

세계 각처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살면 어떠할 것인가? 여러 인종이 혼합되어 사는 나라에서 살아 본 사람들은 아마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수긍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종이 “뒤섞인 나라”의 두드러진 실예가 ‘수리남’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여러 민족에서 온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평화스럽게 어울려 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가지각색의 풍속과 인종을 구경하고 싶은가?

‘수리남’은, 서쪽으로는 ‘가이아나’를, 동쪽으로는 ‘프랑스’령 ‘기아나’를 끼고 남미의 동북쪽 연안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나라의 면적은 약 163,000평방 ‘킬로미터’이다. 국제 연합의 추산에 의하면 1975년 ‘수리남’의 인구는 약 420,000명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해안에 살고 있다. ‘수리남’ 국토의 대부분은 밀림으로 덮여 있어 사람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다.

이 지역의 초기 역사에 관하여 「신 브리타니카 백과사전」(1976년판)은 이렇게 설명한다. “15세기까지도 ‘수리남’의 거주자들은 ‘카리브’인, ‘에레웨크’인 그리고 ‘와로우 인디언’들 뿐이었다. 그 이전에 이 나라에서 살았었지만 ‘카리브’인들에게 쫓겨났던 사람들로 ‘수리넨’족이 있었는데, 여기서 ‘수리남’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1500년경 ‘스페인’ 사람들이 ‘수리남’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 정착하거나 이 땅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인 ‘프란시스 윌로우비’ 경이 ‘수리남’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1651년이었다. 그는 이 비옥한 땅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기로 하였다. 곧 많은 사탕수수 농장이 운영되었다. 이 농장 때문에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게 된 것이다.

각양 각색의 인종이 섞이다

이 농장 운영에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주시키게 되었다. 노예 주인들이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 결과 많은 노예들이 밀림으로 도망해서 그들끼리 부족을 형성하고 ‘아프리카’ 생활 방식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의 일부를 ‘수리남’에 옮겨다 놓은 셈이 되었다.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은 ‘크리오올’인으로 알려져 있다. 내륙에 살고 있는 이들은 밀림 ‘크리오올’인이다. 도시 거주를 택한 자들은 “도시” ‘크리오올’인이라고 불리웠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수리남’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아프리카’ 이주민의 후예들이다.

‘네델란드’인들이 1667년에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곳에서 성행했던 농장 상태를 변모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1863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로 인해 심각한 노동력의 부족 사태가 빚어졌다. 농장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도움을 얻을 것인가?

노동력의 부족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조처로 ‘네델란드’의 소농들을 ‘수리남’에 이주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렇게 해서 ‘네델란드’인들이 이 지역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력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태여서 다른 나라로부터 인력을 구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1800년대 중엽 ‘수리남’은 수백명의 중국인 계약 노동자를 불러들였다. 계약 만료 후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계속 남아서 상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수도 ‘파라마리보’에는 구석구석마다 중국인 식료품 가게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나라 주민은 동양적인 요소를 띠게 되었다.

아직도 일손이 더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1873년부터 1916년까지 ‘수리남’은 인도로부터 여러 척의 배로 ‘힌두스탄’인 이주민들을 실어 왔다.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힌두스탄’인들도 노동 계약 만료 후 그냥 남아있었다. 이것을 돕기 위하여 정부는 그들에게 소농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조그마한 농지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몰려 들고 있다

‘이상으로 인종 소개가 끝났는가?’고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다. 잠깐, 이 나라에 스며든 또 다른 인종을 소개하겠다. 이 인종도 동양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인들인데 이들은 1890년 이래로 동서양이 조화를 이루는 이 나라에 들어 왔다. 특히 ‘자바’ 섬 주민 수천명이 서양에 와서 농업 기술을 충분히 발휘해 보라는 초대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수리남’의 잡다한 인종이 전부 소개된 것은 아니다. ‘파라마리보’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레바논’인,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 그리고 꽤 많은 혼혈인 집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혼혈인들은 앞에 언급된 부류의 동양인들과 서양인들 사이의 결혼으로 생겨난 사람들이다.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을 ‘수리남’으로 이끈 힘은 무엇인가? 아직도 쌀, 사탕수수, 밀감류 그리고 ‘바나나’ 등의 풍부한 농산물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수리남’의 각가지 목재에 끌리게 되었다. 예전에 사람들을 불러들인 또 하나의 주요인은 금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 나라의 주요 광산물인 ‘보오크사이트’가 매력을 끌고 있다. 이것은 ‘알루미늄’의 주원료로서 일종의 점토와 같다. ‘알루미늄’ 공업의 발달로 ‘수리남’에서는 수십만 ‘톤’의 ‘보오크사이트’를 채취하였으며, 아직도 매장량이 많이 남아있다.

한 데 어울려 사는 데서 오는 유익

‘수리남’에서 동서양 인종이 어울려 사는 데서 오는 유익은 많이 있다. 밀림 ‘크리오올’인들은 하천 여행이나 내륙 여행에 큰 도움이 되어 왔다. 이들 노련한 뱃사공들은 통나무 배로 위험한 급류와 심지어 작은 폭포까지로 저어갈 수 있다. 이 밀림 ‘크리오올’인들은 목각 기술로도 유명하다.

중국인들은 적응하는 점에서 훌륭한 본보기이다. 이들은 자국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다방면으로 서양의 표준들을 받아들여 왔다. 사회, 교육, 및 종교면에서 이 점이 분명하다. 이곳 중국인들이 선택하는 직업으로 말하면 소매 상인 외에도 의사, 교사 그리고 청부업자들이 있다. 그들은 ‘수리남’에서 일종의 자산이다.

‘힌두스탄’인들 중에 젊은 세대는 꽤 진보주의적이다. 그들의 조상은 거의 농사에만 종사하였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의학, 교육, 법률, 상업 등의 분야에서 ‘힌두스탄’인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근면하고 검소한 점에서 칭찬을 받아왔다.

‘인도네시아’인들도 이와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 생활을 떠나 중국인들과 ‘힌두스탄’인들처럼 다른 직업을 선택하였다. ‘인도네시아’인들도 마찬가지로 부지런하고 똑똑한 일꾼으로 칭찬을 들어 왔다.

이 나라 국민이 사용하는 숱한 언어를 생각할 때 그들이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하는지 궁금할지 모른다. 많은 젊은 세대는 ‘네델란드’어를 알고 있지만 “수라난-탕고”라고 하는 언어 밖에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많은 사람들은 이 언어를 ‘흑인 영어’라고 하는데 현지에서는 지금도 그것을 “타키-타키”라고 한다. ‘수라난-탕고’어는 영어를 밑바탕으로 하여 ‘네델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그리고 ‘아프리카’와 인도의 잡다한 언어들이 혼합되어 형성되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언어가 처음에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수라난-탕고’어는 이 지역에서 동서양 사이의 적절한 의사 소통 수단이다.

현존하는 종교적 신앙

이곳 ‘수리남’의 종교적 관습도 인종 만큼이나 다양하다. 흥미있는 한 예로 도망한 흑인 노예인 밀림 ‘크리오올’인들의 사망시 장례 습관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여기는 유일한 죽음은 늙어서 죽는 것이다. 젊어서 죽는 경우에 관하여 ‘네델란드’ 저술가 ‘윌렘벤드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망 후 며칠 동안 시체를 들고 왔다 갔다 한다. 가능하다면 이 죽음을 초래한 악령을 이 죽은 자를 매장하기 전에 밝혀낸다. 죽은 자가 시체의 상여군에게 그 재난의 범인인 악령의 소재를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서의 종교와 반대되는 사상이다. 성경은 죽은 자는 완전히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전도 9:5; 시 146:4) 젊어서 죽는 것은 흔히 악령 때문이 아니라 “시기와 우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전도 9:11.

또한 ‘힌두스탄’인들도 비성경적 종교에서 유래한 관습을 지킨다. 그들의 마당에서는 대나무 장대 끝에 나부끼는 조그마한 붉은 기를 볼 수 있다. 이 기가 화를 막아 주는 부적 역할을 해 준다고 한다. 또 다른 색다른 ‘힌두스탄’인의 관습은 결혼식과 관련된 것이다. 종종 어느 집 밖에 하얀 손자국을 보게 된다. 이것들은 신부가 쌀가루 반죽에 손을 담갔다가 집 외부에 찍은 것이다. 이것은 그 여자의 손이 시집간 것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수리남’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성과가 있었다. 1946년에는 이 나라에 증인이 불과 20명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1년 말에는 600명 이상으로 수가 증가하였으며 1978년에는 최고 전도인 수가 879명까지 이르렀다. 이들 대다수가 도시 ‘크리오올’인들과 서양인이라고 자처하는 흑백 혼혈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동양인들(대개 ‘인도네시아’ 계통)과 ‘인디언’ 원주민들과 밀림 ‘크리오올’인들이 그들의 대열에 끼는 것을 환영한다.

1975년 11월 25일 ‘수리남’ 공화국이 새로 탄생한 사실을 빼놓는다면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 국민들은 이러한 변화를 열렬히 기대하였다. 그리고 독립 정부는 평화롭고 질서있게 출범하였다. 신생 공화국 헌법은 숭배,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수리남’의 역사와 발전상 그리고 이 나라의 국민은 실로 흥미있다. 동양과 서양이 교차할 때 어떠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두드러진 본보기이다.

[17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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