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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청이 지옥에 다시 불을 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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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청이 지옥에 다시 불을 붙이다
  • 깨어라!—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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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0
깨80 10월호 13-16면

교황청이 지옥에 다시 불을 붙이다

「깨어라!」 ‘프랑스’ 통신원 기

“교황청이 강력히 상기시키다” “다시 찾아온 지옥” “지옥은 타지 않았는가?” “내세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보호되어야 한다—그리스도인들은 고민한다.”

이 말들은 신앙의 교리에 대해 교황청 성성(聖省)이 작년에 발표한 지옥에 관한 서한에 반응을 나타내는 신문과 잡지의 몇가지 주 표제이다. 그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이 공한은 모든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믿음의 기본적 진리에 대한 완전한 충성의 필요성”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는 “영혼”의 사후 생존, “의로운 자에 대한 축복”과 “저주받은 자”에 대한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등이 포함되어 있다.

‘파리’의 일간 「‘러몽’」지는 이 교황이 승인한 문서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옥에 관하여, ‘로마’ 교회는 그러한 형벌이 실재하며 그 형벌은 ‘영원히’ 계속 된다고 일깨워 준다. 이 교의는 의문의 여지없이 현대인의 정신에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다. ·⁠·⁠· 그것은 모든 교의 중 가장 강압적이며 믿기 어려운 것이다. 종교 재판소를 대치한 ‘로마’ 성성은 조금의 논평이나 그것을 설명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잔인하게 지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근년의 “차가운 지옥”

‘지옥의 실재성’에 대한 이 잔인한 상기는 성실한 ‘가톨릭’ 교인들에게 더욱 더 놀라움과 괴로움이 되었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여러 해 동안 ‘가톨릭’ 교직자들이 지옥불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주간 ‘뉴우스’지인 「‘레프레스’」지는 기사에서 그 점을 이렇게 강조한다.

“지옥은 지난 여러 해 동안 다소간 고의로 잊혀진 후 다시 ‘뉴우스’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 이 문제는 거의 사실 생소하다. 지옥이 교회에서 가르쳐진지는 이미 삼십년이 흘렀다. 천당과 연옥도 마찬가지이다. ‘가톨릭’의 새로운 세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교육 받지 않았다.”

‘가톨릭’ 교직체는 변화의 바람에 따라 불려왔다. 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 지난 세대의 식민주의의 종결, 인권의 신장, 대중을 위한 교육 등, 이 모든 것들은 사제들이 내세에 관해서, 특히 지옥에 관해서보다 현세와 현실에 관해 더 많이 가르치는 것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사제들과 교육받은 ‘가톨릭’ 교인들이 지옥을 “식히는” 것은 ‘프랑스’와 같은 ‘가톨릭’ 국가들에서 유행하였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사람을 문자적인 불에서 영원히 고초를 준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므로 교묘히 빠져 나간다. 대신에 저주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스스로를 영구히 절연시키므로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고초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 “식어진” 지옥에 대한 개념은 근년에 발행된 ‘가톨릭’ 참조 문헌에 반영되어 있다. 예로서, 한 ‘가톨릭’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신학자들은 저주받은 자에 대한 형벌을 상실의 형벌과 감각의 형벌로 나눈다. 이들 중에 전자의 경우는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우리 주의 말씀에 지적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목전에서 떨어져 있다. ·⁠·⁠· 가장 큰 상실의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몰수당한 행복에 관한 지식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미 1968년에 이 “식혀진” 지옥을 다시 가열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신앙 고백”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거절하는 죄인들은 “끊이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갈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보다 최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승인된 이 서한은 ‘가톨릭’ 교인들에게 지옥이 아직도 커다란 공포의 장소임을 더욱 상기시켜 주었다.

중세기의 위협물이었는가 혹은 현재의 교의인가?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리라.” 이것은 ‘단테’의 ‘인페르노’에 나오는 지옥문 위에 새겨진 비문이다. 이 14세기의 시인은 지옥을 ‘사단’이 거하는 곳인 지구의 중심부로 내려가는 아홉개의 문으로 나누어진 깊은 구덩이로 묘사했다. 각 문은 고통과 형벌의 큰 정도를 나타내었다.

그 중세기의 ‘이탈리아’ 시인은 ‘로마’ 교회의 초창기로부터 믿어왔고 당대에도 믿고 있던 ‘가톨릭’ 교의를 상상적인 말로 묘사했다. 또한 지옥의 무시무시한 고통은 여러 세기에 걸쳐 예술가들에 의해 묘사되어 왔다. “최후의 심판”의 그림들은 많은 ‘가톨릭’ 교회와 전세계 여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아마 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바티칸’의 ‘시스틴’ 예배당에 있는 거대한 ‘프레스코’화인데, 그 그림을 그리도록 위탁한 교황들 가운데 한 사람인 ‘바오로’ 3세도 그 그림을 보고 두려움으로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유럽’에 있는 많은 ‘로마네스크’식 또는 ‘고딕’식 대성당의 정문에도 두려움을 일으키는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예로서, ‘파리’를 방문하는 수백만의 관광객들은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현관 위 석조물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최후의 심판” 장면을 바라보고는 전율을 느낀다. 여러 가지 예술 작품들 중에서 묘사한 것이 문자적으로 신체적인 괴로움을 당하는 것임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아마 현대 교육을 받은 ‘가톨릭’ 교인은 “아, 그렇다, 그러나 이 예술 작품들은 단지 지옥불 교의가 중세기에 ‘순진한 영혼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겁주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요즈음, 계몽받은 ‘가톨릭’ 교인들은 이 최후의 심판 장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간 저주받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번뇌를 상징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도피구는 ‘가톨릭’ 교회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만일 지옥을 묘사하는 이 모든 예술 작품들이 잘못 표현된 것이라면, 왜 두 교황(‘클리멘트’ 7세와 ‘바오로’ 3세)이 위임했고, 바로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이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인가? 만일 반대로 그들이 공식적인 교회 교의의 실상을 그렸다면, 왜 ‘가톨릭’ 사제들은 그렇게도 중요한 교리를 그렇게 오랫동안 완화되도록 허용해 왔는가? 성실한 ‘가톨릭’ 교인들은 의아해 하고 있다.

“정신적인 고통”은 약간의 진보인가?

많은 성실한 ‘가톨릭’ 교인들이 의아해 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심지어 지옥에 대한 “식혀진” 견해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절연된 상태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것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조화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종교 저술가인 ‘온리 훼스꿰’는 「‘러몽’」지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고문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숭배 받는가? ·⁠·⁠· 하나님은 그의 고집센 피조물들이 고통을 겪는 위에서 복종의 쾌락을 느끼는 가학성 변태자인가?”

「‘레프레스’」지는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논평을 했다. “더 이상 가마솥은 없다. 그러나 지옥은 계속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절하므로 스스로를 두는 상태라고 한다. 지옥은 고립 상태이다. ·⁠·⁠· 심지어 지상의 감옥의 감각적인 고립도 최악의 고통으로 고려된다.”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설명된 지옥은 중세기의 미술가들이 묘사한 지옥만큼이나 무서운 것이다.”

한 「‘가톨릭’ 사전」은 ‘가톨릭’ “성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상실의 고통은 “너무나 커서 형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고통과도 비교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한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끊임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영원히 벌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통적인 “유황불 타는” 지옥에 비해 약간 진보한 것인가? 많은 성실한 ‘가톨릭’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것은 신체적인 고통과 똑같이 극악한 것임에 선뜻 동의할 것이다. 이 두가지 형태의 형벌은 모두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과 조화되지 않는다.

「‘레프레스’」지에 실린 위에 인용한 기사는 이러한 질문을 제기 했다. “어떻게 자애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영원히 고통주실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문제이다. 신학자들은 모순되게도 지옥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 결과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논리적인가?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흥미롭게도, ‘H. 훼스꿰’는 교황청이 지옥 교의를 재확인한 후 「‘러몽’」지에 실린 “지옥은 타지 않았는가?”라는 자신이 쓴 기사에서, 이렇게 부언한다. “지옥은 존재하며 비어 있지 않다고 믿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들이 극복되어야 하는데, 분명히 그 첫째 것은 사후에 생존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만일 인간이 죽은 후 살아남는 불멸의 영혼이 없다면, 림보, 연옥과 지옥과 같은 “내세”의 교리들은 그곳에 거주할 영혼이 없기 때문에 무너지게 된다.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가톨릭’ 학자들의 대답을 들어 보자.

“육체와 영혼 사이의 구분은 성서 어디에도 명백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F. 비거루우’가 편집한, 「‘딕셔내어데라 비브레’」

“‘육체’와 분리되며, 비물질적인, 순수한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영혼’에 대한 개념은 ·⁠·⁠· 성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프랑스’, ‘로우엔’ 신학교, 성서학 교수, ‘죠제 아수’

성서는 명백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말한다. (에스겔 18:4, 20) 이 귀절은 인간 영혼이 원래 불멸이 아님을 알려줄 뿐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은 끊임없는 고초(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가 아니라 사망임을 알려 준다. 성서는 더우기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라고 말한다. (로마서 6:23, 공동 번역)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 앞에 놓아 두신, 선택인 것이다.—요한 3:16, 36; 신명 30:19, 20.

어떤 성서 번역판에 “지옥”이라고 잘못 번역된 ‘히브리’어와 희랍어 단어는 부활될 죽은 인류의 일반 무덤(히, ‘스올’; 희, ‘하데스’)이나 영원한 멸망(희, ‘게헨나’)을 의미한다.a 성서를 주의 깊이 읽어보면 정직한 사람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 그리고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마태 25:41, 46)이 부활이 없는 멸망 또는 “둘째 사망”의 상징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묵시록 혹은 계시록 20:9, 10; 21:8.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 1서 4:8)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초의 교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숭배하는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엄청나게 잘못 대표한 것이다. 참 숭배를 자극하는 요인은 사랑이지 병적인 두려움이 아니다. (요한 1서 4:16-19) 지옥에 대한 비성서적인 사상에 다시 불을 붙이므로, ‘바티칸’은 분명히 하나님께 모독을 가져 오고 있다.

[각주]

a 좀 더 자세한 내용과 성서적인 증거를 알아 보기 위해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를 참조하라.

[14면 삽화]

‘시스틴’ 예배당의 내부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한 부분

[15면 삽화]

‘프랑스’ ‘림스’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 조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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