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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가 양으로”
  • 깨어라!—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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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2
깨82 11/1 14-16면

“사자가 양으로”

점원을 위협하여 물건을 훔친 다음, 나는 동생들과 함께 차를 타고 도망쳤다. 그 날—1972년 4월 14일—내가 얼마나 포악한 “짐승”이 되어 있었는지를 나는 거의 깨닫지 못했다.

경찰의 방책 근처에 차를 멈췄을 때 갑자기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 들어왔다. 동생 ‘래리’가 내 무릎으로 쓰러지면서 숨을 거두었다—그의 얼굴이 터져 나간 것이다. 나는 온통 동생의 피로 물들었다. 우리는 속력을 다해 도망쳤으나 총탄을 맞은 차에 불이 붙어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뛰어 내려 다른 차를 찾아 나섰다.

가까이에, 한 노인이 자기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래리’가 죽는 것을 본 후부터 나는 폭한이 되었다. 홧김에 나는 노인을 움켜 잡고는 마구 구타하였다. 머리가 깨진 그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자동차의 속력을 다해 추적하는 경찰이 쏜 총탄을 두방 맞고 나는 정신을 잃었고 차는 충돌하는 소리를 냈다.

“차에서 나와 손들엇!” 내가 기억하는 그 다음 말이었다. 경찰이 나를 에워쌌으나 나는 저항을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쏜 총에 맞아 복부에 구멍을 뚫는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나는 약 12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경찰관과 엉겨 붙어 싸웠다. 마침내 그는 나를 메어쳐 내 얼굴을 진흙탕물에 쳐 넣고는 내 등 뒤에 올라 타 욕설을 퍼부었다: “이 검둥이 녀석, 너같은 놈은 죽어야 해!”

그 후 내가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나는 오로지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죽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내 어린 동생이 사망한 후 나에게는 삶에 아무런 목적도 없었다. 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룰 희망도 없었다. 나에게는, 오로지 죽이고 죽는 것뿐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두명의 경비원이 내 병실 침대 옆에 앉아 나를 지킨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런 사자같은 성품을 만들어 냈는가?

난폭한 어린 시절

우리 가정에서는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싸움 때문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때때로 그는 사람들로 가득찬 ‘댄스 홀’ 출입문에 서서는 “아무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해!”라고 외치면서 군중 전체를 위협하곤 했다.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난폭한 생활을 본받았다. 내 형제들 중 하나는 단순히 내가 “난 그걸 옮기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해서 큰 칼로 내 발을 거의 자르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16명이나 되는 아이들 모두에게 사랑을 나타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가정은 가난했다. 그래도 생필품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더 갖고 싶었다. 나는 곧 남의 집을 터는 밤 도둑질을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열 세살의 나이에 소년원으로 보내졌으며 더욱 난폭해졌다. 나를 이용하려던 한 소년과의 싸움에서 나는 그가 쓰러져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리고 그의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 때까지 구타했다.

소년원에서 풀려난 이후 내 생활 전체는 단순히 내 자신,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나는 다음 사람을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았다. 폭력적인 행동의 강도는 계속 높아져 1972년 4월의 바로 그 날에 이른 것이다. 마침내 동생 ‘사이’와 내가 법정에 끌려 갔을 때 그들은 ‘우리를 최대로 처벌하였다’—‘루이지애나’ ‘앙골라’에 있는 ‘루이지애나’ 주립 교도소에서의 30년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우리는 “두명의 싸움광”으로서 형무소에 도착했다. 나는 약 61‘킬로그램’ 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체구였지만 무술을 배웠었고 역도를 했었다. 나는 내 몸무게의 두배나 되는 것을 쉽게 머리 위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말이 나돌았다: “‘알’을 건드리지 말라구, 그는 못하는 짓이 없거든. 너를 죽일지도 모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형무소 안에서 매주 모임을 가졌다. 나는 호기심을 잃었다. “당신네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구먼!” 나는 참을성있고 말씨가 공손한 전도인에게 도전했다.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이요?” 기결수로서 나는 회의에 가득차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달콤한”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전문가들이었다. 따라서 ‘증인’들의 흥미를 끄는 말은 처음에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 후, 나는 내 생애 전체를 통해 결코 맛보지 못한 것, 즉 순수한 비이기적인 관심을 그들에게서 느끼게 되었다. 우선, 그들은 형무소에 오는 데 편도에 거의 한 시간씩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들은 아무런 물질적 보수도 받지 않고 매주 그렇게 했다. 또한 형무소 밖에서까지 그들은 시간을 내서 회중의 다른 장로들을 만나 우리의 문제와 질문들을 토론하고 그 내용을 그 다음 주에 우리에게 알려 주곤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우리를 돕고 싶어 하였다. 나는 그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성서에서 배운 진리는 논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나는 조금씩 그것을 적용해 나갔다. 점진적으로 나는 사자같은 옛 성품을 벗고 동정과 친절, 그리고 겸손한 정신과 같은 새로운 성품으로 옷입기 시작했다. 나는 내적으로 기분이 좋았다. 성서의 소식은 참으로 힘이 있었다! 그 때 ‘증인’들의 대회가 형무소 내부에서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다.a—골로새 3:9-12.

300명이 넘는 ‘증인’들 사이에 자유롭게 넘쳐 흐르는 사랑은 나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는 인종이나 형무소 신분으로 인한 편견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이전에, 나는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내 좌우명은 항상 “남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에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인’들의 비이기적인 사랑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실상, 나는—1974년 10월 5일—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요한 13:34, 35.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함

‘증인’들은 내가 성서를 꾸준히 연구하도록 가르쳤다. 나는 생활에서 여호와의 부드러운 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분의 자비는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나의 과거를 회고해 볼 때면, 나는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내가 강탈하거나 구타한 사람들의 공포에 가득찬 얼굴들이 계속 “눈에 선”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완전한 용서를 느끼게 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 하게 되었다. 또한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로마서 13:1을 적용하여 “위에 있는 권세”들을 대표하는 형무소 관리들에게 복종하였다.—이사야 1:18, 19.

이전 성품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나는 생각과 마음을 보호해야만 하였다. 나는 정신을 이전과 같은 폭력적인 행동이 아니라, 억지로 성귀들이나 성서의 본들에 고정시키기 위해 애쓰곤 했다. 보다 온전히 여호와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계속—매일—투쟁했다. 수천명의 철저히 타락한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으면서 이러한 태도를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슬프게도, ‘앙골라’에 있는 동안 ‘증인’이 된 얼마의 사람들은 생활의 염려와 쾌락이 자신들의 마음에 심어진 진리의 소식을 시들게 하도록 허용하였다. 형무소에서 빠져 나가고 싶은 또는 결혼하고 싶은 일부 사람들의 욕망은 영적인 것들을 보지 못하게 가려 버렸으며 이들은 슬픈 본보기들이 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의 참된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과 결혼한 ‘증인’들의 생활을 망쳐놓기까지 했다.—누가 8:11-15.

나는 그러한 문제 어느 것에도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내가 갖게 된 희망과 목표를 다른 수감자들도 갖게 되도록 돕는 일에 바쁘게 일하였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 일에 매월 백 시간 이상을 바쳤다. 매주 이십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한 때도 있었다! 그 중 여덟명의 수감자들이 헌신한 ‘증인’들이 되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난폭한 기질로 말미암아 자기 부인을 살해한 죄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또 다른 “사자” 하나가 하나님의 “양”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었다!

밖에서의 생활

나는 구년을 복역한 후인 1981년에 석방되었다. 회중과 자유롭게 연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내 배경 때문에 나 자신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인상을 준 사람들이 얼마간 있었다. 나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며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도 나의 영적인 발전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제 내 생활은 또 다른 도전—아내와 다섯 자녀를 돌보는 일—에 직면하게 되었다.—사도 9:26 비교.

나는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한 ‘바바라’를 아내로 맞는 복을 받았다. 아내의 순종적인 지원은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정에서 여호와를 늘 제일 앞자리에 두기 위하여, 우리는 매주—어떤 일이 있더라도—함께 연구하며 한 가족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를 가르친다. 다른 부부와 마찬가지로 물론 우리 둘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화가 날 때면 나는 옆방으로 가 성서나 성서 연구 보조물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다. 한 시간 정도 내에 우리는 다시 화해하게 된다.

참으로 많은 범죄자들이 자기들의 이전 행로로 되돌아간다는 글을 읽고나면, 당신은 때때로 “사자”가 참으로 “어린 양”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이사야 11:6-9에 묘사된 어린 양이 사자와 더불어 평화롭게 생활하는 매력적인 장면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현실이 될 수 있는가? 부분적으로나마 대답이 된다고 느끼는 일이 있었다. ‘바바라’가 이야기할 것이다.

‘바바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알’과 나는 전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바’에서 나온 어떤 남자가 우리를 노려보더니 마구 소리를 질러 대지 뭐예요, ‘요 예쁜 아가씨 좀 보지! ‘키스’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걸!’ 그리고는 다가서더니 저를 끌어안기 시작하는 거예요. ‘알’을 쳐다보니 그의 턱이 굳어지더군요. 그러나 ‘알’은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제가 그 남자에게서 빠져 나왔더니 그는 팔을 내밀어 ‘알’의 손을 잡고 흔들더군요. 남편을 향해 ‘친구, 미안하군, 이러한 미인을 보면 그만 넋을 잃고 만단 말이야’라고 말하더니 그는 그냥 떠나 버렸지요. 그 다음 ‘알’이 한 말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여보, 저자가 내가 누구인지 알기나 했더라면.’ 저는 ‘알’에게 말했읍니다. ‘여호와의 영이 틀림없이 당신과 함께 하셨어요.’”

그렇다, 내가 가져온 변화를 돌이켜 볼 때, 그 일을 해 낸 것은 단순히 ‘알’ 나 자신이 아니었다. 이 “사자”를 선한 목자의 무리에 속한 한 마리의 “양”으로 변화시킨 것은 여호와의 영과 그분의 인도와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정확한 지식이었다.—기고.

[각주]

a 자세한 내용은 1977년 7월 22일호 「깨어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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