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과거의 교훈
미래는 오랫동안 인기있는 주제가 되어 왔다. 어느 도서관을 가보더라도 틀림없이 미래에 관한 책들로 가득찬 책꽂이를 보게 될 것이다. 좀더 가까이 가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책들 중 다수가 20 혹은 심지어 30년 전에 기록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1949년에 발행된 ‘조오지 오웰’의 풍자 소설 「1984년」은 전체주의 지배 아래 인간성을 빼앗긴 사회를 묘사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 ‘레이첼 카아슨’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화학 물질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의 위험에 세계적인 주의를 이끌었다. 그때 이래 ‘베스트 셀러’의 목록은 그러한 주제의 서적들로 채워져 왔다.
그러나 모든 예언과 경고는 무슨 일을 해냈는가? 그것들은 민중과 당국자들을 분기시켜 문제를 가라앉히고 미래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가? ‘베스트 셀러’ 「인구 폭탄」(The Population Bomb)의 저자이며 1960년대 이래 환경 문제에 관해 저술하고 방송해 온 ‘포올 에어릭’은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국가 환경 정책 법령이 있으며, 환경 충격 성명서 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분열시키는 속도를 따라 잡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다. ··· 나는 나의 많은 노력이 헛수고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장래에 대한 그의 희망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만일 전적으로 낙관적인 것을 10이라 하고 전적으로 비관적인 것을 1이라고 하면, 나는 약 1.2로 본다.” 그러므로, 지난 수십년간의 모든 서적, 보고서, 연구 및 회의들은 장래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태도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경고가 주의를 끌지 못하는 이유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세상 상태가 계속 나빠져 온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장래에 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인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그것이 연구가들이 발견한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진짜 관심사는 장래가 아니라 현재이다.
예를 들어, “미래는 미래가 해결해 줄 것이다”란 제목의 「오늘의 심리학」지에 실린 한 기사는 미국의 전국적인 조사 결과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보고한다. “아마 불건전한 정도로, [사람들의] 생각이 현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가 다른 모든 관심사를, 심지어 범죄, 종교, 세계의 평화까지도 밀어 내버렸다.” 예를 들어, 그 조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5대 1의 비율로 자녀를 위한 더 나은 장래 보다도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생활 수준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음을 알려 준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정부, 상업, 산업 등에 만연된 홍보 조작 행위 혹은 심지어 왜곡 행위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석면과 같은 상품이나 핵발전소와 같은 계획의 해로운 영향에 대해 보도를 통제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교묘한 광고 운동 심지어 겁주기 작전이 대중이 거짓을 믿거나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고를 무시하도록 현혹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결국 참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중이 전문가들에 대해 회의적이고 냉소적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며, 대중은 장래의 이름으로 어떤 변화나 희생을 하기를 훨씬 더 꺼리게 된다.
그러므로, 대체로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의 초점은 바로 지금 당장과 그들 자신에게 맞추어지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장래에 관해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장래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의 생활사와 그들이 현재 거기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미래는 저절로 어떻게 해결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결과
이러한 정신 상태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위기 일발의 세상 상태로까지 이끈 사건들의 진로를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보다 나은 장래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단지 몇 가지만 들더라도 핵 전쟁, 오염, 범죄 및 폭력—은 수십년간 경고를 무시하거나 사실들을 숨겨온 결과이다. 간단히 몇 가지 예들을 고려해 보자.
핵 전쟁의 위협과 국제 무기 경쟁의 위험은 오랫동안 인정되어 온 것이다. 항의와 경고가 여러 해 동안 발하여져 왔다. 거의 20년 전인 1964년에 대통령의 고문으로 일하는 두명의 탁월한 미국 과학자들은 무기 경쟁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무기 경쟁을 하는 양측은 군사력이 꾸준히 증가하는 한편 국가의 안전이 꾸준히 감소하는 궁지에 직면하게 된다. ··· 분명히 예언할 수 있는 무기 경쟁의 진로는 미궁의 세계로 한없이 맴돌며 꾸준히 빠져들 것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장을 하면 할수록 나라들은 안전을 덜 느끼며 최종 결과는 대 재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고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는가? 최근 영국 의회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군사적 힘은 평화를 이룩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선행 조건입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대부분의 정부들의 견해임이 분명하며, 국가 안전이란 명목으로 나라들은 점점 더 치사적인 전쟁 무기—핵, 화학, 생물학 및 기타 무기들로 스스로를 무장해 왔다. 초강대국들의 본을 따라 많은 개발 도상국들이 핵 무기 보유 국가 군(群)에 가담할 날도 멀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떤 나라도 더는 안전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이 모든 일이 사람과 사람의 거처인,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지구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다.
여러 해 동안 환경 보호론자들은 기술 개발이 공기, 물, 토양 및 동식물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에 대해 비난해 왔다. 그러나 이윤의 유혹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이 훨씬 더 호소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계획으로 직장과 이윤이 생긴다면 그것이 가져올지 모를 어떠한 환경상의 손해나 건강상의 위험도 간과될 수 있다고 합리화하였다. 그 점을 여실히 보여 주는 한 가지 예는 일본의 ‘미나마타’에서 발생한 일이다. 1950년대 초에 그 도시 부근의 어촌 주민들이 먹는 물고기 속의 높은 수준의 ‘메틸’ 수은이 주민들의 청각, 시력 및 말하는 데 심각한 손상을 입히며 유아와 연로한 사람들의 몸과 사지에 불구를 초래한다는 것이 밝혀졌었다. 수은은 그 지역 공장들의 공업용 폐수에서 생긴 것이었다. 일본 정부로 하여금 오염 관리 기관을 설립하게 한 ‘니이가타’에서의 두번째 소동이 벌어지기까지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한 사례들이 세계 도처에서 여러 배로 늘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다수는 산성 비, ‘오존’층의 고갈, 대기 중의 이산화 탄소의 증가 및 독성 폐기물의 처분과 같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이 관련되어 있다. 최종적인 결과는 단순히 일본 어촌 주민들의 신체적 피해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전체 생명 유지 체계의 잠재적 붕괴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환경 상태에 대해 아직도 자기 만족에 빠져있다”고 세계 은행의 환경 문제 책임자인 ‘제임스 A. 리’는 말한다. “지난 수십년 간의 높여진 자각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환경에 대한 염려가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거나 그 결과가 먼 훗날인 것으로 본다”고 그는 부언한다. 사람들과 나라들은 현재의 경제 및 정치 문제에 너무 깊숙이 얽매여 있어 장래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병든 세계 경제와 만연하는 범죄 및 폭력을 포함하여 생활의 질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다른 예들을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많은 것들은 사람들이 현재 탐욕스럽게 쾌락과 부를 추구한 결과이다. “자기 일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표준과 억제책을 내팽개쳐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철저히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을 갖고 싶기 때문에, 사람들—과 정부들—은 과도하게 외상 구매에 열을 올려, 그들의 소유를 무가치한 것이 되게 할 수 있는, 마구 뛰어오르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 “자아 제일주의”와 “지금”이 중요하다는 정신 상태가 남아있는 한 장래가 보다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
터득해야 할 교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과거는 장래에 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무엇보다도, 오늘날 추세와 위험에 관해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쉽사리 입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과거의 행동 방식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많은 양의 정보는 이제까지 그래온 것처럼 계속 무시 될 것이다. 만일 보다 나은 장래가 생활 방식을 희생하고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자진성에 달려있다면(사실 많은 권위자들이 그래야 한다고 인정한다) 우리에게는 낙관적이 될 만한 이유가 거의 없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나오는 “만일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은 매우 불확실한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심각한 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중 다수가 정부와 기관 및 개개인들의 명백한 근시안적인 견해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많은 연구와 회의 및 특별한 임무가 수행되는 목적들은 흔히 자금과 인정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상반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들은 그저 증상들을 어설프게 짚어 보는 것에 불과하다. 지상에는 보다 나은 장래를 위해 필요한 진로를 계획하고 변화를 일으킬 만큼 지혜롭고 강력하며 영향력 있는 정부나 기관 혹은 개인은 없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가? 더 나은 장래를 위한 어떤 희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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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이 더 호소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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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체와 정부 기관들이 일본에서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지체하였을 때,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은 국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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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녀가 옷을 입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모태에서 중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