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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주간에 그는 나에게 진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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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주간에 그는 나에게 진리를 주었다”
  • 깨어라!—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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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3 11/1 13-16면

“여섯 주간에 그는 나에게 진리를 주었다”

나는 (미국) ‘테네시’ 주 ‘플레즌트 뷰’의 한 조그만 농가에서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소작인이었다. 우리 집은 작았고 대부분의 표준으로 볼 때 몹시 가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학교의 나의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함께 놀 온갖 농장 동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어린이로서 매우 만족하였다. 나는 감리교인으로 양육받았다. 감리교인들은 매우 자유 분방하였으며 나도 그랬다. 누구나가 하늘에 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나의 가장 최초의 기억은 우리가 눈으로 갇혀 교회에 갈 수 없었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한 ‘증인’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어머니는 바빴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이 점, 즉 내가 겨우 일곱살이라는 점에 거의 개의치 않았다. 3년 후에 나의 이모는 ‘증인’이 되었고, 그 후 나의 어머니도 ‘증인’이 되었다.

이 때쯤에 나는 고등 학교 상급반이었으며 MYF 즉 감리교 청년회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였다. 나는 다니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내가 일주일에 세번 ‘증인’ 집회에 나가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에는 감리교회에 가고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는 ‘증인’ 집회에 가기로 타협을 보았다. ‘증인’들을 반대할 만한 이유는 없었지만, 나는 괜히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 출세를 앞에 두고 있는데 이제 ‘증인’ 집회에 나가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니! 마침내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나는 그만 두겠어요. 대학에 가겠어요.”

나는 대학에 갔지만, ‘캘리포오니아’에 가서 역시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모 ‘유우렌’과 함께 살았다. 이 때쯤에 이모부 역시 ‘증인’이 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바로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이상적인 계획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대학에 갔으며 만사가 잘 되었다. 나는 여전히 성실한 감리교인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흡연을 하지 않았으며 욕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집회에 나가곤 하였으며 무엇이나 다 훌륭하였다. 나는 또한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멋진” 심리학 수업은 무신론자들이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 여름에 내가 종교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사실 나에게는 지식에 근거를 둔 믿음이 별로 없었다.

그 후로 나의 부모는 내가 극도로 거칠다고 간주하였다. 나는 실제로 극도로 거칠지는 않았지만, 내 고집대로 하였다. 어머니가 ‘캘리포오니아’로 나왔다. 나의 인생 행로에 관한 중대한 의논이 있었다. 나는 결과를 염려하였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들이 고집센 나를 얼마나 지혜롭게 다루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어파아트’를 얻도록 나를 도왔지만, 계속 나와 접촉하였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지만, 그들은 결코 나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저지른 일을 용서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나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그것이 나중에 내가 돌아오기 쉽게 하였다.

어쨌든, 나는 독립하였으며 참으로 잘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학생 ‘데모’에 가담하였고, 그것은 어머니를 몹시 걱정하게 하였다. 나는 SDS 즉 민주 사회 학생회의 분파들에 말려 들었다. 그 분파들은 매우 과격하고, 매우 군국주의적이며 혁명적이었다. 나는 세계를 변화시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나중에 나는 전국 신문 표제에 실릴만큼 중대한 것은 아니지만 소리지르며 돌을 던지는 일부 폭동에 가담하였다. 두 세명의 경찰이 다치고 여러 명의 ‘데모’ 참가자들이 구타당하였지만, 1960년대 초의 ‘데모’의 특징을 이룬 대중적 열기를 띤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모든 열기에 휘말렸지만, 이내 이상에 적합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개입된 단체들 중 하나가 나에게 지하실에 보관해 둔 무기들, 즉 기관총, 수류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이 단체는 내가 평화를 위해 보조를 함께하고 있는 단체였으며, 그들은 “‘캠퍼스’를 폭파하러 가자! 이 제도를 무너뜨리자!”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비난하고 있는 일을 행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건설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때려 부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것은 이유 없는 혁명이었다.

나의 부모는 항상 나에게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쳤었다. 우리 집에는 총이 있었다. 우리는 한 어린이를 문 독사를 쏘았다. 우리는 닭장에 있는 족제비를 쏘았다. 우리는 돼지들을 총으로 쏘았다. 그것이 가장 자비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도살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새나 기타 동물들에게 총을 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식품이나 보호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농장에서 나는 항상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자랐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였다. 나는 평화를 위해 행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저녁에 학교에서의 연설들은 바로 훌륭한 강연들 중에서 가장 고상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총과 수류탄에 관해 들은 것이다! 나는 급히 빠져 나갔다. 그리고 나가서 나는 달아났다. 나는 모든 단체를 떠났고, 모든 교제를 중지하였으며 모든 관계를 끊었다. 나와 교제하던 남자는 내가 그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와 결혼하였다. 그러다가 세 달도 못되어 그는 군에 입대하였다! 나와 함께 평화 운동에 참여하던 이 남자가 군에 입대한 것이다.

나는 ‘테네시’로 돌아와서 ‘오스틴 피이’ 주립 대학교에 다녔고, 다시 남자들과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971년이었다. 이 때에 나의 군인 남편은 내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기지에서 살기를 원하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영화관에서 국가를 연주하고 국기 배례를 할 때 내가 일어서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당신의 모든 군대 친구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려고 하겠는가? 그들이 나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내가 그들에게 정부에 대한 모든 존경심은 없어진 지 오래됐다고 이야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나는 ‘베트남’에 대해 치를 떨었다. 나에게는 머리 속에 금속판을 대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친구들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그것은 나의 오빠가 나에게 총에 쓸 실탄을 사오기를 원했을 때 그것을 거절할 정도로 나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그가 쏘는 것은 모두 우리의 곡식을 먹는 찌르레기였다. 혹은 토끼였으며, 식구들은 그것들을 먹었다. 그러나 그때쯤 되어 나는 어떤 종류의 총도 아주 싫어하였기 때문에 오빠를 위해 실탄을 사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과는 결국 이혼하였다. 그는 나에게 2‘캐럿’짜리 ‘다이아몬드’인 아름다운 결혼 반지를 주었었다. 나는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단지 석 달만 가지고 있었으며 나중에 그는 그것을 자기 자녀에게 넘겨 주거나 자기 어머니에게 돌려 주기를 바랬다.

나는 ‘내시빌’로 이사하였고 한 회사의 부사장과 ‘데이트’를 하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큰 사업이 해결책일지도 몰랐다. 나는 평화 운동을 시도해 왔지만 그것은 너무 호전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사업계에 뛰어들겠다. 그것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때쯤에 한 형사가 찾아 왔으며 나는 ‘데이트’를 하고 있는 이 부사장이 장물과 ‘코카인’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회사 소속의 다른 부사장 하나가 나를 궁지에 몰아 넣고 이 남자에 관한 모든 내막을 알아내기 원하였다. 그것은 회사 내의 권력 투쟁이었으며 나는 어디에도 속하기를 원치 않았다. 기업은 아주 신속히 그 매력을 잃었다.

이 때쯤에 나의 어머니, 나의 다정한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집회에서 ‘레이 로이드’와 ‘수지 로이드’에게 애걸을 하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빈정거리는 투로 만일 어머니가 교육받은 ‘증인’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와 성서를 연구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레이’가 강연을 하였다. 어머니는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 딸애하고 연구를 해주세요. 그 애는 ‘내시빌’에 삽니다.” ‘레이’도 ‘내시빌’에 살았지만, 나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레이’와 ‘수지’가 나의 이동 가옥에서 나와 연구를 하기 위해 ‘내시빌’을 가로질러 멀리서 올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멀리서 왔다. 그리고 나는 얼마간 흥미가 있었으나 ·⁠·⁠· 웬지, 그렇게 흥미를 느끼지 않아 그것이 안타까왔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 이제까지 내가 지금처럼 난처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우선, 나는 ‘수지’에게서 책을 몇권 받았으며—그 책들의 색깔은 내 거실 장식에 어울렸음—그것도 한동안 이었다.

나는 이동 가옥을 ‘플레즌트 뷰’로 옮겼으며 부패한 부사장을 조사하던 형사와 ‘데이트’를 시작하였다. 나는 초도덕주의자였지만, 이 형사는 그 누구보다도 최대의 범죄자임이 판명되었다. 내가 그와 함께한 일들은 대단히 불법이었고 아주 저속한, 내가 이전에 행한 어떤 일보다도 상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내시빌’ 경찰의 한 형사로서 20년된 ‘베테랑’이었다. 나는 마약에 빠져들었으며, 의사들은 그때 ‘마리화나’가 해롭지 않으며 LSD와 ‘스피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었지만 나는 마약에 취해 한 일들을 일부 돌이켜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나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친구들이 몇 있었지만, 내가 ‘데이트’하고 있던 이 형사는 최고 악질이었다. 나는 그들 모두와 나 자신에게 너무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모든 일을 그만 두었다. 나는 또한 그때 매우 아팠으며, 의사는 나에게 6주 동안 집에 있으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수지 로이드’를 기억하였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성서 연구를 부탁하지 않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나는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전화 번호가 바뀌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내가 왜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지?” 하고 자문하였다. 나는 당황하였다. 그에게 전화를 걸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걸었다. 나는 다시 전화기를 들고, 그의 새로운 번호로 ‘다이얼’을 돌린 다음 불쑥 이렇게 말하였다. “‘수지’, 나에게 6주의 시간이 있어요. 나에게 성서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는 그렇게 하였다. 먼저 교리를 다루었지만, 곧 그는 범위를 넓혀 성서의 정확성, 그 논리 정연함 및 그것이 영감받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에게 성서가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존재함에 틀림없다. 이것이 ‘수지’와 연구함으로써 얻은 큰 소득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되찾은 것이다. 우리는 연구마다 4시간씩 일주일에 3번 연구하였으며, 그 후에 ‘코오피’를 마시고 2시간 이상 성경을 토론하였다. 2주 후에 ‘수지’는 내가 왕국회관의 집회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였고 나는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성서와 더불어 연구하던 서적을 끝마쳤다. 약속한 6주일이 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연구를 계속하기를 원하였다. 이 때쯤에 우리는 나의 이동 가옥이 아니라 ‘수지’의 집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지’에게 “그런데 ‘수지’, 이제 끝난거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린 무얼하죠?” 나는 ‘증인’들이 항상 또 다른 책을 연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가 이것을 제안하기를 기다렸으며, 나는 기꺼이 수락하려고 하였다. 그와는 달리,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 이제, 6주가 되었읍니다. 이젠 정말로 ‘캐디’의 마음에 달려 있읍니다.”

나는 몹시 위축되었다! 나는 겨우 조그맣게 “중지하리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중얼거릴 수 있었다.

집으로 차를 몰면서 나는 내 일생에서 그처럼 비참하게 느껴본 적이 결코 없었다. ‘증인’들이 매달리며 나와 연구하기를 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려고 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연구를 항상 그런 식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낙담하여 몹시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차를 몰았다. 갑자기 나는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나는 연구를 원하고 있어. ‘수지’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차를 세우고 공중 전화를 찾아서—한밤중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님—‘수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이’가 받았고, ‘수지’가 욕조에서 나왔으며, 나는 흐느끼는 가운데 그에게 내가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두달 후에 나는 침례를 받았다. 나는 나의 이동 가옥을 팔아 빚을 청산한 다음, ‘캘리포오니아’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곳이 내가 침례를 받은 곳이었다. 침례를 받은 후에 나는 전 시간 호별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다. 세속 직장이 있기는 하였지만, 첫 달에 나는 전파하는 일을 150시간 하였다. 다음 달에는 140시간을 하였다. 줄이라는 조언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세째달에 단지 100시간을 하였다. 곧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왕국에 관해 알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테네시’로 돌아오면서, 나는 역시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개리 홉슨’을 만났다. 몇달 후인 1976년에, 우리는 결혼하였다. 우리는 함께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7년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여호와의 왕국을 선포하며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다.—‘캐디 홉슨’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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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멋진’ 심리학 수업은 ·⁠·⁠· 어느 여름에 내가 종교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15면 삽입]

“나는 평화를 위해 행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그러던 중에 나는 총과 수류탄에 관해 들은 것이다!”

[15면 삽입]

“나와 함께 평화 운동에 참여해 온 이 남자가 입대한 것이다!”

[16면 삽입]

“줄이라는 조언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세째달에 단지 100시간을 하였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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