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4 2/15 6-9면
  • 오늘날의 세계—관용인가, 무관심인가?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오늘날의 세계—관용인가, 무관심인가?
  • 깨어라!—1984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관용을 얻기 위한 투쟁
  • 초교파주의—관용인가, 무관심인가?
  • 편협이 없는 강한 신념
  • 종교는 ‘심어온 것을 거두고 있다’
  • 편협—과거에서 현재까지
    깨어라!—1984
  • 자유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깨어라!—1999
  • 종교의 자유—축복인가, 저주인가?
    깨어라!—1999
  • 낭트 칙령—관용을 보장하는 헌장?
    깨어라!—1998
더 보기
깨어라!—1984
깨84 2/15 6-9면

오늘날의 세계—관용인가, 무관심인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관용의 시대,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거나 고문하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의 뿌리는 과연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가? 몹시 허풍떠는 관용의 시대는 무관심의 시대에 불과한 것일 수 있는가?

관용을 얻기 위한 투쟁

사실, 관용이란 말은 서구 문명 사회내에서조차 비교적 최근에야 익숙해진 단어이다. 「웹스터 제 삼 신 국제 사전」에 따르면, “관용”이란 영어 단어(tolerance)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앙드레 라랑드’ 저 ‘프랑스’어 「철학 용어집」(Vocabulaire de la Philosophi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용이란 [‘프랑스’어] 단어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전쟁의 결과로 16세기에 생겨난 것이다. ‘가톨릭’은 결국 ‘프로테스탄트’를 관용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는 또한 ‘가톨릭’을 관용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종교 전쟁은 1598년에 왕 ‘헨리’ 4세가 ‘프로테스탄트’에게 제한된 자유를 부여한 법인 ‘낭트’ 칙령에 의해 끝이 났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의 자유는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1685년에 왕 ‘루이’ 14세는 이 칙령을 철회하였고 ‘위그노’들은 또다시 한 세기에 걸쳐 투옥되고 노예처럼 ‘갤리’배의 노를 젓게 되거나 공공연히 살해당하였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전개되고나서야 비로소 종교의 자유가 ‘프랑스’에서 합법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루터’ 교회 군주들 간의 전쟁이 1555년에 ‘아우그스부르그’ 평화 조약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조약은 그들에게 각각 백성에게 그들의 종교를 강요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반대 의견자들에게는 전혀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유럽’에서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30년 전쟁은 1648년에 끝났으며, ‘베스트팔리아’ 평화 조약은 ‘캘빈’주의자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17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일의 관용, 즉 이교 묵인 칙령이 모든 비‘가톨릭’교인들에게 숭배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그 자유조차도 제한된 것이었다.

영국도 관용, 즉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기나긴 처절한 투쟁을 하였다. ‘가톨릭’ 교도들, 영국 국교도들 및 청교도들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면 번갈아 서로 박해하였다. 1689년에 ‘프로테스탄트’교인인 왕 ‘윌리암’ 3세 통치 아래 영국 이교 묵인 조례가 발표되었지만, 삼위일체 교리에 반대하는 어떤 설교도 금지하였고, 비국교도들은 정치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18세기에 여러 가지 조례들이 통과되었고 점차 영국 교회 성원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가톨릭’교인과 ‘유대’교인 및 비국교도들은 특정한 공민권을 박탈당하였다. 182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러한 제한 규정들의 대부분이 제거되었고, 1880년—겨우 1세기 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국내의 종교적 반대 의견자들에게 그들의 신앙에 따라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초교파주의—관용인가, 무관심인가?

그러므로 오늘날의 외관상의 관용은 역사에 뿌리를 내린 지가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관용적인 태도의 동기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진지한 인식인가, 아니면 종교적 무관심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견은 후자의 것이다. 「‘가톨릭’ 백과사전」은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기술한다. “관용은 믿음이 없을 때에만 효력을 발휘한다.” 이 동일한 책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상하게도 일관성이 없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제까지 누려온 관용과 자유를 자신을 위해 주장하면서도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5년에 끝난 제 2차 전세계 바티칸 공의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에 관한 ‘바오로’ 6세의 공식 선언문을 주의깊이 읽어보면 그가 비‘가톨릭’ 종파들이 누리는 자유보다는 ‘가톨릭’이 위협받고 있는 나라들에서의 ‘가톨릭’ 교회가 누리는 자유에 더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리아’ 숭배와 성직자의 독신에 관한 현 교황의 주장은 초교파주의에 관한 그의 개념이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로마’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 준다.

현대의 초교파주의에서, ‘프로테스탄트’ 및 희랍 정교회의 세계 교회 협의회가 주류를 이루는 것에 대해, 「브리태니커 신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20세기의 초교파주의 운동은 바로 비신학적 요소들의 해명을 통해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다시 말해서, 초교파 운동은 영적 문제들을 제외한 모든 문제에서 교회들을 연합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 운동은 사회 정치 문제들을 다룬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주장에 의하면 여러 나라에서의 “해방 운동”을 지원하는 자금을 댄다고 한다. 최근에 구세군은 세계 교회 협의회가 “복음이 아니라 정치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게릴라’ 운동에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 기구를 탈퇴하였다. 그러므로 초교파주의 운동의 교리상의 관용은 사실상 교리에 대한 무관심의 표시임이 자명하다. 한편, 그 협의회의 정치 참여는 확실히 특정한 정부의 총애를 받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편협이 없는 강한 신념

‘맥클린톡’과 ‘스트롱’ 공편의 「성서, 신학 및 교회 문헌 백과사전」에서,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읽게 된다. “순수한 그리스도 교회라면 편협을 전혀 모르며, 따라서 결코 박해의 죄를 범할 수 없다.”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그 「백과사전」은 ‘존 조오틴’이라는 ‘프랑스’ ‘위그노’ 부모에게서 난 18세기의 한 영국 ‘프로테스탄트’인이 “박해가 시작되는 경우, 그리스도교는 끝난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 그 사전은 계속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설립된 후 그리고 부와 명예가 그 교직자들에게 부여된 후 였으며, 그리하여 박해의 가공할 해악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고 복음서의 종교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 배교가 시작된 후에야 “그리스도인들”이 편협한 박해자들이 된 것이다. 그러한 박해를 예언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관용하지 않을 때가 오고 있다. ·⁠·⁠· 그들은 진리에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인간이 만든 신화를 찾아 헤맬 것이다.” (디모데 후 4:3, 4, ‘J. B. 필립스’의 「현대 영어 신약」) 그리스도교국 교회들의 신경에는 인간이 만든 많은 신화들이 들어있으며,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자들이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신화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인격체의 신”에 관한 신화는 기원 4세기의 소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격렬한 반대와 박해를 일으켰다.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자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강한 종교적 신념이 없다거나 또 그들이 오류와 싸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참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노라.]”—고린도 후 10:4, 5.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인간이 만든 종교적 신화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유일한 무기로 성서 진리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그들 자신이 종교 및 정치 세력에 의한 잔인한 박해에 희생되어 오긴 하였지만, 결코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도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박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러한 ‘바울’의 충고를 따른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 12:17-19.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범죄자들과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들을 회중에서 추방시키기 때문에 사실상 편협한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는 인간의 표준이나 개인적 편견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범죄자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 전 5:9-13)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추방된 자들을 헐뜯거나 중상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그러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성서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인 회중의 순수성과 주체성이 모두 유지된다. 그러한 조처는 반대 의견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하여 박해해 온 교회들의 조처와 얼마나 다른가!

종교는 ‘심어온 것을 거두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한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 6:7) 확실히 이 점은 여러 세기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게 편협을 나타내 온 종교 조직들에게 적용된다.

성서 마지막 책에서, 거짓 종교는 “땅의 임금들”과 “음행”을 하는 음녀로 묘사된다. (계시 17:1, 2; 18:9) 이것은 종교가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정치에 정조를 판 것을 의미한다. (요한 17:16) 성서는 반종교적 정치 요소가 종교의 간섭에 싫증을 낼 것이며 음녀를 적대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들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이며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실 것이다.—계시 19:2; 17:16, 17.

종교를 적대하는 이러한 예상하지 못한 사태 변화로 말미암아 편협이 역사상 전례 없는 정도로 표면화될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거짓 종교의 멸망이 몰고올 반신적(反神的) 사회의 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백성에 대한 잇따른 공격은 하나님의 개입을 유발할 것이다. 그분은 지상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공격하는 그러한 “왕들”과 “장군들”과 “장사들”을 결코 관용하시지 않을 것이다!—계시 19:17-21; 17:14.

모든 염소와 같은, 편협한 박해자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편협한 박해의 희생자들이 되어 온 많은, 그분의 양같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태 25:31-46) 마침내, 참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다시 말해 “당신의 왕국이 임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라는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마태 6:9, 10, 필립스역.

종교를 향한 편협이 극에 달할 때 당신은 어떤 입장에 있을 것인가? 당신은 계속 무관심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9:22, 2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와 같다.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느니라.]” 그렇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은 의로운 경향을 가진 개개인들에게 옳은 것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할 시간을 주는 선한 목적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관용에 시한을 정하셨다. (사도 17:30, 31) 모든 증거는 이 관용의 기간이 거의 끝났음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성서는 당신에게 너무 늦기 전에 거짓 종교에서 나오라고 촉구한다!—계시 18:4, 5.

‘여호와의 증인’들은 당신이 여러 세기에 걸쳐 그토록 많은 편협을 보여온 거짓 종교로부터 벗어나도록 기꺼이 도울 것이다. ‘증인’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라. 그들은 당신이 성서 속에 들어 있는 놀라운 희망, 즉 동료 인간에 대한 인간의 편협이 과거지사가 될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다.

[7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들은 오류와 싸우기 위해 폭력이 아니라 성서 진리를 사용한다

[8면 삽화]

세속적인 세력은 「계시록」에 음녀로 상징된 세상 종교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게 될 것이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