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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짓궂은 장난—과연 재미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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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짓궂은 장난—과연 재미있는 일인가?
  • 깨어라!—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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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4
깨84 2/15 13-16면

짓궂은 장난—과연 재미있는 일인가?

한 인부가 11층의 높은 ‘호텔’ 창문 밖에 매달려 일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는 안전 ‘벨트’로 철저하게 안전 장치를 하고 있었다. 그는 ‘호텔’ 안의 한 친구를 그가 일하는 것이 보이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불렀다. 방으로 들어가서 창밖을 보았을 때 그 친구는 소름끼치는 광경을 보았다. 안전 ‘벨트’가 풀어지고 비명과 함께, 그 인부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끔찍한 참사인가? 아니다.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 인부가 매달려 있는 곳 바로 밑에는 넓은 선반이 있었으며, 거기에 ‘쿠션’을 댔기 때문에 그는 다치지 않고 그 선반 위에 “떨어질” 수 있었다. 재미있는 일인가? 방금 사람이 11층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어느 토요일 아침에 한 남자가 연장을 치워두려고 일하던 기계 공장으로 되돌아 갔다. 그는 그 날 오후에 결혼식에 갈 예정이었으며 제일 좋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직장 동료들은 그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바탕 웃기 위해 그들은 숨어 있다가 그에게 물세례를 퍼부어 양복을 입은 채로 모두 젖게 하였다. 이것도 짓궂은 장난이지만, 재미있었는가? 양복을 못 입게 된 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성서는 짓궂은 장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장난, 신세]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잠언 26:18, 19) 그러나 짓궂은 장난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마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들을 웃기고 그들의 생활에 재미를 더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피해자의 관점에서 몇 가지 실생활의 경험을 고려해 보자.

일이 잘못되었을 때

얼마 전에 컴컴한 영화관에서 한 장난꾼이 “불이야!”라고 소리질렀다. 큰 혼란이 일어났고, 관중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5명이 죽었고 5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한 젊은 남편은 어느 날 아침 근무하러 나갔지만, 회사가 악천후로 문닫힌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는 목욕을 하는 중에 누군가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도둑으로 의심한 아내는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총을 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남편은 짓궂은 장난을 하려고 숨어 있었다. 아내가 가까이 오자, 그는 “우왁!” 하고 소리지르며 뛰어나왔다. 두려움에 질린 아내는 총을 쏘고 말았다.

물론, 모든 짓궂은 장난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레드’가 깨달은 바와 같이, 어떤 장난은 잘못될 수 있다. 그는 휴가중에 조그만 ‘오오토바이’를 빌릴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운전 면허증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필기 및 실기 시험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과를 기다렸다. 이윽고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거세고 재론의 여지없는 투로 그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프레드’는 낙담하였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제 휴가 계획의 일부를 망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시험을 아주 잘 본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욕구 불만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편지 내용이 매우 불친절하였기 때문에 당국에 대해 분개하였다. 나중에, 한 가까운 친구는 그가 풀이 죽은 것을 보고 그 편지가 가짜임을 밝혔다. 바로 그 친구가 직접 그 편지를 쓴 것이었다! 이 친구는 ‘프레드’가 즉시 그 편지가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레드’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전혀 재미없는 좌절감을 맛보는 경험을 하였다.

‘론’은 또 다른 피해자였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그는 한 지방 교회 단체에서 연설하도록 초대한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시간을 내어 그 초대를 고려하면서, 그는 시간표를 재조정하였고 다른 사람들과 그 초대를 의논하였으며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연구하였다. 수락하기 위해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그 초대가 짓궂은 장난임을 알게 되었다.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어떤 사람에게 속은 것이었다. 그는 그 구역으로 새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론’의 반응은? “나는 시간과 정력이 낭비된 것에 대해 욕구 불만을 느꼈지요”라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장난’이 무책임하고 불친절한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읍니다. 또한 가상 계획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한 것을 부끄럽게 느꼈지요. 그리고 앞으로는 장난꾼을 대하는 일에 조심하기로 결심하였읍니다.”

이것은 ‘론’과 ‘프레드’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장난을 웃어 넘길 줄 모른다는 뜻인가?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당신은 기만당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바쁜 사람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무책임하게 낭비되는 것을 가볍게 볼 수 있는가? 당신은 단지 몇 시간 동안이라 하더라도 우울하고 실망하는 것에서 ‘유우머’를 느낄 수 있겠는가? 또 친척 가운데 영화관에서 우르르 밀려나가다 죽거나 부상당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분명히 그러한 짓궂은 장난은 이러한 중요한 명령을 범하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누가 6:31.

‘하지만 그러한 장난들은 너무 지나치게 된 경우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활달한 청소년 집단과 함께 일하는 ‘알’은 짓궂은 장난이 참으로 너무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한다. 그는 직장의 한 신입자를 못살게 구는 일부 청소년들이 그의 흉골에 심한 타박상을 입혔으며, 그 결과 잠시 호흡에 곤란을 느꼈고 며칠간 일을 쉬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실을 언급한다. 다른 청소년들은 서로 물을 끼얹기 위해 분무기 병을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눈에 자극을 받았다. 그들은 그 병들이 이전에 화학 약품을 담아두었던 것임을 잊어버린 것이다. “짓궂은 장난은 결코 할 만한 것이 못되지요”라고 ‘알’은 말한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즘에는 그런 장난을 하지 않을 만큼 사려깊게 되었지요.”

왜 사람들은 짓궂은 장난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부 사람들은 장난에 대해 지나치게 발달된 혹은 왜곡되기까지 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 자신을 억누르기 어려워한다. ‘프레드’는 그에게 한 장난이 어떤 나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친구가 약간 장난삼아 저지른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론’은 그에게 피해를 입힌 장난꾼이 “일들이 좀 활기를 띠게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알’은 짓궂은 장난을 청소년의 넘치는 활력의 한 표현으로 본다.

‘알’은 또한 또 다른 요인으로 경쟁심을 든다. “누군가가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지요”라고 말하면서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피해를 본 사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에게 갚아 주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모두가 흥분하게 되고 너무 지나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친구에게 물을 조금 끼얹을지 모릅니다. 갚음을 하기 위하여, 그 친구는 그 장난꾼에게 물을 한 ‘바께스’ 붓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다 보면 장난꾼은 맞비긴 상태가 되도록 그 피해자를 옷을 입은 그대로 ‘풀’장으로 밀어 넣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원래 목수였던 ‘스탠’은 아주 순진한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이 짓궂은 장난의 목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특히 2명의 직장 동료가 그를 놀리기를 좋아하였다. 그 이유는? ‘스탠’은 두 가지 가능한 이유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아주 순진해서 한바탕 웃을 일을 만들어 내기가 쉬웠기 때문일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아니면 그들은 그를 더욱 세련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일 수 있읍니다.”

후자가 그들의 동기일 경우, 그것은 성공하였는가? “아니었다”고 ‘스탠’은 말한다. “그는 누구에게나 신경질적이고 의심을 품게 되었지요. 그것은 그의 성품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불건전한 영향을 미쳤읍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라.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갈라디아 6:10) 짓궂은 장난은 이러한 충고를 따르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보다 나은 견해를 갖게 될 수 있는가?

합당한 ‘유우머’는 좋은 것이다. ‘유우머’가 없다면 세상은 삭막한 곳이 될 것이다. 농담섞인 말은 긴장을 풀어주거나 신경 과민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람들과 농담하는 것은, 심지어 점잖게 놀리는 일까지도, 애정의 표시일 수 있다. 그러나 ‘유우머’는 또한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다. 놀리는 일이 어떤 사람의 약점이나 결점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경우, 그것은 악의적인 것이다. 더우기 사람들을—잠시 동안 만이라 하더라도—당황하게 하거나, 부끄럽게 만들거나 그들을 속이거나 놀라게 하는, 혹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또는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짓궂은 장난은 분명히 불친절한 일이다. 남의 옷이나 기타 소지품에 해를 입히거나, 귀중한 시간을 도둑질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큰 불편을 느끼게 하는 혹은 일부 계획된 활동을 수행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지체하게 하는 짓궂은 장난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서는 “서로 친절하[시오]”라고 말한다.—에베소 4:32, 새번역.

그런 장난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항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를 놀리는 장난 따위를 언짢아 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장난할 때 그들이 언짢아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 모두가 때때로 우리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함께 웃는 일에서 즐거움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난처한 입장에 빠졌을 때 그를 보고 웃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장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어떻게 느낄 것인지 결코 미리 알 수 없다. 한 남자는 함께 근무하는 소녀들을 약간 놀렸다. 처음 몇 사람은 아주 좋게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 웃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맨 마지막 소녀는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화를 냈으며 감정이 상하였고, 그 농담은 더는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서가 “동료감을 나타내고, 형제애와 부드러운 동정심과 겸손한 정신을 가지”라고 격려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베드로 전 3:8, 신세) 설사 당신은 자신이 짓궂은 장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대상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료감”은 당신이 그들의 감정을 고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이 짓궂은 장난을 하기를 즐긴다는 사실이 그것을 옳은 일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 “겸손한 정신”을 갖는다면 그것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동정심”은 확실히 당신으로 하여금 동료 인간에게 어려움을 주기를 원치 않게 할 것이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짓궂은 장난을 할 때,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 담대함이 필요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놀릴 때, 갚음을 하지 않기 위해 자제가 필요할 수 있다. (갈라디아 5:22, 23) 그리고 어떤 사람이 상습적인 장난꾼이라면, 단지 그런 사람과의 교제를 피하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짓궂은 장난이야말로 심각해지는 경우가 너무나 흔한 것이다.

가짜 편지의 피해자인 ‘프레드’는 몇 년 전에 짓궂은 장난에 관해 깨달은 바가 있다. 그가 잘 아는 한 부부를 방문하였으며, 그 집 부인이 아직 집에 없었기 때문에 침실에 들어가 숨었다. 그 집 부인은 집에 돌아와서 그가 와 있을까 생각하고 그를 찾아 보았다.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부인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 부인이 화장대 앞에 서 있을 때 ‘프레드’는 침대 밑에서 손을 뻗쳐 그 부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부인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버렸다. 그가 너무나 겁을 냈기 때문에 ‘프레드’ 자신이 놀래버렸다. “나는 내 경험으로부터 배웠읍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결코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 않을 겁니다.”

참으로 현명한 결심이다! 사려깊고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14면 삽입]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보고 웃는 것은 매우 불친절한 일이 될 수 있다

[15면 삽입]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거나, 놀라게 혹은 당황하게 하여 그들을 보고 웃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일인가?

[16면 삽입]

경험은 짓궂은 장난이 너무 지나친 것이 되는 경우가 흔함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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