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씬 더 좋은 것
특정한 명상 기술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은 매우 사람의 마음을 끈다. 즉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소극적인 경향과 나쁜 습관들을 적극적인 것들로 바꾸고, 염려와 두려움을 극복하며, 그렇다. 심지어 건강을 개선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생 문제들에 관한 합당한 내적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다”고 「오우토제네스 트라이닝 퓌르 포르트게쉬리테느」(상급 생도들을 위한 자가 훈련)란 책은 약속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아 실현”과 “내부의 즉 실제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을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 통치로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질적인 해결 방법인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동기가 있는 곳]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예레미야 17:9) 그러므로, 우리의 깊은 의향과 감정, 곧 우리의 “내부의 즉 실제의 자신”은 신뢰할 만한 지침이 못된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만 들더라도, 차별 대우, 노쇠, 중병, 죽음 등이 있다. “합당한 내적 태도”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과연 얼마나 성공을 거둘 수 있는가? 합당한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어려운 인생 문제들을 극복하도록 돕고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로 인해 감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절름발이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이다.
고대에 가장 현명한 사람인,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5, 6) 그러나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명상 기술에 도움을 구한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나에게는 종교적 믿음과 기도가 너무 피동적인 것으로 보였읍니다. 나에게는 더 많은 것, 즉 잠재 의식의 능동적 지원이 필요하였읍니다. ··· 자가 훈련이 내가 그것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과 기도가 꼭 피동적인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 진정한 것이 되려면 도저히 피동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품의 변화가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지만,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명상 기술을 이용하여 자력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는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입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할 것을 강권한다. (골로새 3:9, 10, 신세 참조; 에베소 4:22-24)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빌립보 4:13) 분명히 ‘바울’이 이룩한 성품의 변화는 “잠재 의식의 능동적 지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지원과 인도로 말미암은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 월등한 종류의 명상
더 월등한 종류의 명상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성서 필자는 기도 가운데서 그분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시 77:12) 이러한 종류의 명상은 우리의 주의를 이제 눈앞에 다가온 인간 문제들의 진짜 만병 통치제인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끈다.
이 하나님의 왕국 통치하에서, 인류는 온갖 약점, 나쁜 습관 및 그릇된 경향, 그렇다. 심지어 온갖 질병까지도 완전히 치료받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느니라]”고 시편 103:2, 3은 말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참으로 인간 완전성에 이를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보고나 더 즐거운 말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소식을 듣는 일은 정신적 및 신체적으로 모두 인간에게 유익한 영향을 주지 않겠는가? 그렇다. 잠언 15:30과 16:24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선한 말은 ···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정신을 왕국 통치 아래 있게 될 축복들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하라. 일례로, 시편 37:10, 11을 읽을 때, 땅이 “온유한 자”들만으로 가득찰 때 어떠할 것인지를 잠시 마음 속에 그려보라. 그 다음 다른 사람들의 퉁명스러운 태도로 인해 최근에 화가 났던 일을 생각해 보라. “온유한 자”들이 사나운 자들을 대신할 것이기 때문에 매일의 생활에서 화나게 하는 일들이 사라질 것이다. “악인이 없”을 때 밤에 혼자 걸으면서도 안전감을 느낄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라. 또한, 핵 무기에 의한 대 참사의 위협이 더는 우리의 정신을 괴롭히지 않을 때 얼마나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인지를 숙고해 보라. 이런 식의 명상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수천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고 그분의 말씀의 훌륭한 교훈을 순종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나쁜 습관을 고치고, 수줍음과 염려를 이겨내고 편견을 극복하고, 그들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즐겁게 하는 성품을 발전시키고, 어느 정도 그들의 건강까지도 개선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산 예들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지는가? 정신을 비움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계속 적극적으로 정신을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움으로써이다.—골로새 1:9.
그렇다. “자아 실현”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오는 유익과 만족을 결코 가져다줄 수 없다. 당신은 이러한 월등한 형태의 명상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본 일이 있는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만이 할 수 있는 만병 통치를 결코 해낼 수 없는 위험한 명상 기술을 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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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등한 종류의 명상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와 그분의 목적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