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를 건 이유
우리는 발전하고 있는 세계에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때에 살고 있다. 풍요로운 서구 사회가 사회적 불안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한편, 온 세계에는 핵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간디’의 비폭력 철학에는 분쟁으로 갈갈이 찢긴 이 세계를 위한 해결책이 담겨 있는가? 인도의 한 언론인이 쓴 이 기사에서는 ‘간디’와 그의 비폭력 이상을 검토해 본다.
‘간디’ 그 이름이 독자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만일 평화를 사랑하고 비폭력적인 세계가 도래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간디’가 비폭력의 아버지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7억 3천만이 넘는 인도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그를 ‘바푸’ 곧 아버지로 기억할 것이며, 물레잣는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허약한 사람으로서 인도에 독립을 가져온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만일 ‘힌두’ 교도라면 그를 정신적 지도자로 생각하여, ‘마하트마’ 곧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출신이나 신앙이야 어떻든 간에, 아마 누구나 ‘간디’가 비범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자였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는 여윈 얼굴에 눈이 크고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얼굴에 비해 너무 큰 코에는 둥근 테의 안경이 걸려 있었다. 움푹 들어간 양 볼은 잇몸으로 웃을 때면 팽팽해 진다. 대부분의 사진에는 그가 물레 옆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거나 허리에 옷을 두르고 면제 천을 어깨에 두르고서 방문객을 맞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얼마 후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폭력에 반대한다. 그것이 유익을 주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그 유익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그것이 주는 해악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간디’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악화된 국면에 처해 있다.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심지어 인도의 도시와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라.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 습관으로 깊이 배어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떠밀면 되민다. 또다시 떠밀면 반격한다. 부유한 나라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별다를 것이 없다. 국가적 증오, 인종적 폭력, 범죄, 핵 전쟁의 위협, 환경 오염은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세계가 비폭력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류는 분명히 자멸하게 될 것이다”라고 ‘간디’는 말했다. 증오는 단지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으며, 비폭력은 나라들이나 집단들만이 아니라 개개인이 실천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단지 이웃의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그를 증오하고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성자라해도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람을 자기와 피를 나눈 형제로 생각해야 한다.” ‘간디’가 그 말을 한 지도 63년이 지났지만, 세계는 여전히 평등이라는 기본적 개념을 가지고 투쟁하고 있다.
위대한 지도자나 사상가를 찾아보기 힘들 때 어떤 사람들은 돌이켜 ‘간디’에게서 해결책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의 이상은 무엇이었는가? 그 이상은 어떻게 틀잡혔는가? 이 불안정한 시대에, ‘간디’가 따른 방법이 해결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