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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찌-파시스트’가 ‘증인’을 공격하다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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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3/15 10-13면

‘나찌-파시스트’가 ‘증인’을 공격하다

100세

미국에서 있었던 ‘증인’에 대한 폭력은, 몇 년 후에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스페인’ 및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사실상 온건한 것이었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에서 12년간의 독재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찌’주의에 복종하지 않는 단체들에 대한 강압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1933년 4월에 ‘나찌’ 경찰은 ‘협회’가 공산주의와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의 공장을 점거하였다. 그러한 기도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돌격대원들이 6월에 다시 와서, 공장을 폐쇄하고 건물 위에 역 만자기(卍字旗)를 게양하였다. 6월 29일에 이러한 조치가 ‘라디오’를 통해 독일 국민에게 보도되었다. 독일의 ‘루터’ 교회는 ‘나찌’들에게 협조하였고, 독일에서 ‘증인’이라고도 알려진 ‘성실한 성경 연구생’에 대한 금지령을 기뻐하였다.a ‘루터’교 교직자 ‘오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협조의 첫 결과들이 오늘 ‘성실한 성경 연구생들의 만국 성경 연구회’와 ‘작센’에 있는 그 세포 단체들 위에 내려진 금지령에서 이미 보고되고 있읍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하는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집단 수용소로!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으라는 예수의 법칙에 고착하여,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은 선거에서 투표하기를 거절하였다. ‘나찌’들은 그들에게 공개적인 수치를 가하였다. ‘작센’ 주 ‘오샤츠’ 출신인 ‘막스 슈베르트’는, 돌격대원들이 들고 있는 “나는 악당이고 조국의 반역자이다. 나는 투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쓴 표지가 있는 마차에 실려 행렬해야 하였다. 그는 군중이 “그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라고 합창하는 거리를 돌아다녀야 하였다. 폭도의 대답은 “집단 수용소로요!”였다. 곧이어 수천명의 ‘증인’이 그러한 악명높은 수용소들로 끌려갔다. 그러한 곳들의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독일에서의 상황에 관한 영국 정부의 한 공식 간행물은, 1933년에 이미 “채찍질과 고문이 일과였고, 국가 사회주의[나찌] 운동은 무모하게도 그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복수를 한다는 것은 독일에서 주지의 사실”이었음을 알려 준다. ‘부켄발트’ 집단 수용소에서 고생한 재소자였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동 시간은 하루에 16시간이었다. 일요일에나 주간 중에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 중에는 심지어 몹시 무더운 날씨에도 물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 ·⁠·⁠· 물론, 하는 일은 종종 정상적으로 잘 먹은 사람이라도 힘에 겨운, 무거운 돌을 운반하는 것이다.”

영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 당시 그 수용소 내에는 약 8,000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1,500명의 ‘유대’인들과 800명의 ‘에른스테 비벨포르셀’(만국 성경 연구생)”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 재소자들은 한달에 두번 편지를 쓰고 받았다. ‘성경 연구생’에게는 바깥 세상과의 통신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 어떤 독일 교도 관리는 최고의 존경심을 가지고 이 남자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들의 담대함과 종교적 믿음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고통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공언하였다. ·⁠·⁠· 수용소 내에서 매일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부켄발트’의 재소자였던 또 한 사람은 재소자들이 “슬픔이라는 신생 도시”(new City of Sorrow)에서 받은 접대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들은 수용소 밖에서 소장인 ‘뢰들’의 다음과 같은 말의 인사를 받았다. “너희들 가운데는 이미 교도소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서 맛본 것은 너희들이 여기에서 맛보게 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집단 수용소 안으로 들어온 것이며, 그것은 지옥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 이 수용소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형벌, 곧 체형과 주검이 있을 뿐이다.”

집단 수용소들은 비뚤어진 정치 철학의 희생자들로서, 끔찍하게도 수백만이나 되는 인명을 거두어들였다. 이 사람들은 계획적으로 격하되고, 존엄성을 빼앗긴 다음 목숨을 빼앗겼다. 그 수백만명의 희생자들 각자가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과 괴로움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종족을 전멸시키고 말겠다!’

희생자들일 뿐 아니라 순교자들이기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석방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자료에 의하면, ‘히틀러’와 그의 친위대 측근들이 조직한 병적인 잔혹성과 야만적 행위의 희생자들인 10,000명의 남녀 ‘증인’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그들 증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부인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한 기회를 받아들인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크리스틴 E. 킹’ 박사의 「나찌 국가와 신종파들: 비국교도들의 다섯 가지 사례 연구」(The Nazi State and the New Religions: Five Case Studies in Non-Conformity) 참조.

위의 자료에 의하면, 그 10,000명 가운데 약 2,500명은 결코 풀려나지 못하고—그들은 ‘다하우’, ‘밸센’, ‘부켄발트’,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 ‘아우슈비츠’, ‘마우타우젠’ 및 기타 수용소에서 죽었음—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본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을 지켰다. ‘가스’로 처형된 사람들은 차치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구타, 기아 및 의학 실험으로 인해 죽었다. 여자들을 포함한 또 어떤 사람들은 교수형이나 총살형 혹은 목베임을 당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히틀러’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히틀러’에게 구원을 돌림으로 그리스도인 중립을 범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끝까지 충실하였던 것이다.—마태 24:13.

1934년에 독일과 다른 나라들의 ‘여호와의 증인’은 ‘히틀러’에게 ‘증인’에 대한 그의 잔인한 대우를 항의하는 전문들을 보냈다. 한 목격 증인은 ‘히틀러’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벌떡 일어나면서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 종족을 독일에서 전멸시키고 말겠다!’고 소리질렀다”고 보고한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 “종족”은 전멸되었는가?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그러나 ‘히틀러’와 그의 ‘나찌’주의는 사라진 지 약 39년이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독일 연방 공화국에는 현재 107,000명이 넘는 활동적인 ‘증인’이 있으며, 그에 더하여 금지령하에 있는 동독에 수천명의 ‘증인’이 더 있다. 그 “종족”은 전멸되지 않았다. 오히려 증가하였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것이다!

‘파시즘’이 증거를 중단시키려 하다

예수께서 하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이러한 말씀은 ‘나찌’ 독일에서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적용되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원칙과 본을 따랐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탈리아’에서도 그들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가톨릭’ 교회가 1929년에 ‘뭇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와의 종교 협약에 서명하면서, ‘브루클린’의 ‘워치 타워 협회’와 ‘이탈리아’에 있는 ‘증인’ 사이의 연락을 끊어버린 종교 탄압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25명의 충실한 ‘이탈리아’인 ‘증인’으로 된 한 집단은 2년에서 11년에 이르는 투옥형을 선고받았다. 일부 ‘증인’은 그들의 형을 마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파시즘’이 먼저 무너져 그들이 석방되었기 때문이다.b

전후인 1946년에, ‘이탈리아’에는 35개의 작은 회중들과 연합한 120명의 ‘증인’이 있었다.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여호와의 증인’은 현재 ‘이탈리아’에서 두번째로 큰 종교이며, 약 1,600개의 회중과 연합한 활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115,000명이 넘는다. 그렇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959년에 ‘스페인’의 내무성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관하여 보안 총 책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따라서, 그리고 설명된 악인들의 더 이상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막을 목적으로, 귀하는 [모든 경찰 본부들에] 회람장을 돌려야 한다 ·⁠·⁠· 그 회람장에서 귀하는 이러한 활동들을 단순히 경계하는 것만 아니라, 그들의 활동을 말살시켜 버릴 조처를 취할 것을 지시해야 한다.”—‘고딕’체로는 본지에서.

재개된 박해의 물결은 ‘스페인’을 휩쓸었고 1970년까지 계속되었다. 수백명의 ‘증인’이 단순히 성서를 연구한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혹은 정치 문제에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투옥되었다. ‘증인’과 그들의 활동은 말살되었는가? 그와는 반대로, 1970년에 정부는 그들에게 마지못해 법적 인가를 하였다. 1959년에는 겨우 약 1,400명의 ‘증인’이 있었지만, 1970년에는 11,000명이 된 것이다! 14년이 지난 지금은, 56,000명이 넘는 ‘증인’이 840여개 회중으로 조직되어 있다!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마드리드’ 부근에 훌륭한 지부 본부를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 「파수대」와 「깨어라!」(국문은 「깰 때이다」) 잡지가 ‘이베리아’ 반도를 위해 인쇄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 2차 세계 대전까지 그리고 그 전쟁중에 있었던 ‘나찌-파시스트’의 공격 물결은 ‘여호와의 증인’을 말살시켰는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것이다!

[각주]

a ‘나찌’의 잔악 행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 97-190면에 나와 있음

b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증인’이 살아남은 자세한 이야기를 위해, 「1983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111-147면 참조.

[11면 삽화]

많은 증인들이 악명높은 집단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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