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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도카이 가라데’—참다운 “화합의 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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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4/1 10-14면

‘와도카이 가라데’—참다운 “화합의 도”인가?

긴장이 감돌았다. ‘네덜란드’의 ‘가라데’ 단체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메!”(“시작!”이라는 일본어)하는 심판의 호령이 떨어지자, 상대방과 나는 시합 자세를 취했다.

상대는 체격이 억센 사람으로, 몸집이 나보다 크고 무거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실전 경험이 부족한 사람임을 알아챘다. 나는 공격 동작을 하는 체하였다. 그는 주먹 지르기와 발차기로 맹렬히 공격해 왔다. 나는 그를 유인하여 또 한번 공격을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늑골 하부를 노출시키는 순간, 나는 폭발적인 주먹 지르기 공격을 가하였다.

그가 ‘매트’ 위에 나동그라진 채 고통스럽게 숨을 내몰아 쉬자 관객들은 움찔하였다. 그는 몸을 격렬하게 떨더니, 돌연 굳어 버렸다. 장내는 섬뜩할 정도로 조용하였다. 의사가 현장으로 달려와 그를 병원으로 옮겨갔다. 나는 잔뜩 겁에 질렸다. ‘혹시 ·⁠·⁠· 그가 죽은 건 아닐까?’

1971년 10월에 이 사고가 있고 나서, 나는 그런 시합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후 칠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라데’를 완전히 그만두기는 했지만, 나는 그 결심을 고수하였다.

그런데, 나는 애초에 어떻게 ‘가라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가라데’를 그만두기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리고 그 부상당한 상대 선수는 어떻게 되었는가?

첫눈에 좋아하다

전자 공학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1965년 9월에 고국인 ‘수리남’을 떠나 ‘네덜란드’로 간 나는 ‘힐베르숨’ 시에 주거를 정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친구 하나가, 새로운 ‘스포오츠’인 ‘와도카이 가라데’의 시범 경기를 보러 가자고 나를 초대하였다. 친구의 기분도 좋게 해주고 호기심도 채울 겸해서 나는 가보았다.

두 일본인 사범, ‘코노’ 씨와 ‘후지’ 씨가 보여 주는 기본 동작 시범을 보고, 나는 그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시끄러운 언쟁이라든가 길거리에서 싸우는 그런 광경이 아니라, 아름답고 ‘발레’와도 같은 동작들이었다.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그들의 몸놀림은 번개처럼 빨랐다. 나로서는 그것이 첫눈에 좋아할 만한 것이었다. 벌써 ‘가라데’ 도복을 입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24세—‘가라데’ 표준으로는 너무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문을 신청했다. ‘겨울 몇달 동안 그저 소일거리 정도로 해두자,’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 그 겨울이라는 것이 십년이 넘는 세월이 되었다.

“화합의 도(道)”

‘가라데’란 일본어인데, “공수(空手)”를 뜻한다. 그것은 한국, ‘오키나와’, 일본 등지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다. ‘와도카이’(“화합의 도”를 의미하는 일본어)의 중심이 되는 것은 ‘마’(間)(적수로부터 적당한 거리 유지)와 ‘키아이’(氣合)(‘타이밍’ 즉 절호의 공격 기회를 포착하는 것) 등, 두 가지 종류의 수련이다. 뿐만 아니라, 유연성도 중요하다. 모든 공수도가 그러하듯이, ‘와도카이’는 신체와 정신의 화합을 중시하는 선(禪)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토오너먼트’로 진행되는 2분간의 ‘가라데’ 대련에서는 상대방의 급소를 노려 발차기와 주먹 지르기를 했을 경우 점수를 따게 된다. 몸을 가격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주먹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실제로 공격하는 것은 규칙상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때로는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내 아내 ‘하니’가 손으로 ‘가라데’를 시도하다가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주먹 지르기로 상대의 얼굴을 겨냥하되, 그 코 끝 바로 앞에서 동작을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하니’는 주먹 지르기에만 정신을 쏟다가—거기까지는 좋았다—그만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나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치고 말았다. 입술이 찢어졌는데, 이는 내가 ‘가라데’를 하면서 입은 유일한 부상이었다. 다음 날, 부어오른 얼굴 때문에 나는 난처한 질문 공세를 받았다!

“화란 깍지콩”

처음에 일주일에 세 시간씩 수련을 했다. 열 가지 손쉬운 교습, 즉 ‘인스턴트’식 ‘가라데’ 같은 것은 없다. 사범 한명이 말한 대로였다: “[무예]의 터득이란 마치 생강 뿌리처럼, 서서히 발전되는 법일세. 어릴 때에는 그 맛이 부드럽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더 매워지고 화끈해 지는 것이지.”

대부분의 연습 대련에서 내가 승리하자, 나의 ‘센세이’(선생 혹은 사범)는, “‘가라데’ 교습을 도와 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교습을요? 물론입니다!”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도조’(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1968년 봄, 나의 ‘센세이’는, “‘가라데’ 시합 ‘토오너먼트’에 출전해 보지 그래,” 하고 말했다. 내게는 많은 격려가 필요치 않았다. 뜻밖에도 나는 우리 도장의 출전 ‘티임’의 주장으로서 1968년 5월에 열린, ‘네덜란드’ 및 ‘벨기에’ ‘가라데’ 단체 선수권 대회에 처녀 출전하여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키 178‘센티미터’, 몸무게 66‘킬로그램’의 체격을 가진 내가 나약해 보였던지, 어느 ‘스포오츠’ 잡지는 나를 가리켜, ‘화란 깍지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체중과 힘의 열세를 기술과 ‘스피이드’, 그리고 계산력으로 보강하였다.

1971년에 나는 ‘네덜란드’ 국가 선수권 보유자가 되었다. 권위있는 잡지 「블랙 벨트」지는 나를 “‘유럽 가라데’ 선수 상위 10명” 명단 가운데에 두 차례(1971년과 1972년) 게재하였다. 1972년 4월에 나는 ‘가라데’ 사범 자격을 따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1971년 가을 “화합의 도”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이상적인 견해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큰 고양이”와 겨루다

그때 나는 ‘파리’ 소재 ‘피에르 드 쿠베르탱 호올’에서 열리는 ‘유럽 가라데’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유력한 우승 후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나는 다년간 ‘프랑스’ 선수권 보유자인 ‘도미니크 발레라’와 맞붙게 되었다. 90‘킬로그램’의 체중에 180‘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발레라’는 ‘큰 고양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뒷축반달차기와 날렵하고 힘찬 앞차기 및 살인적인 돌려차기로,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제압하고 만다는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발레라’와 격돌할 차례가 온 것이다. 국영 TV를 통해서 숱한 시청자가 지켜보고 7,000명의 관중이 ‘발레라’를 응원하는 가운데 그는, 선수권을 차지하려는 나의 꿈과 늑골까지도 몇대 부숴놓겠다는 기세였다. 「블랙 벨트」지는 그 대련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도미니크’는 ·⁠·⁠· 화란 깍지콩 정도는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 하지만 신속히 발전하는 화란 선수는 ‘도미니크’의 시초의 앞차기를 제지하고서는 놀란 ‘챔피언’의 머리에 주먹 지르기를 한 차례 가격하여, 깨끗한 반점(半點)을 따냈다. ·⁠·⁠· 다시 ‘발레라’는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또 다시 길게 ‘마에게리’(앞차기)를 내뻗는다. 처음 것이 요행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듯, ‘라 로세’는 상대편의 다리를 제지하면서 또 한 차례 ‘발레라’의 머리를 향해, 휙 소리나는 매끈한 주먹 지르기를 가한다.”

여기서 나는 전체 ‘토오너먼트’를 통해 ‘챔피언’을 공격한 유일한 점수를 따내고 있었던 것이므로 선수권 대회에서 최대의 화제 거리가 되었다! 참으로 명백한 승리였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블랙 벨트」지는 다음과 같이 계속했다.

“자기 주변의 관중이 ‘프랑스’인들이라는 것과, 두번째 반점(半點) 때문에 ‘발레라’가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될 것임을 깨달은 심판은, 두번째 주먹 지르기는 무시해 버렸다. 공모라도 하듯, 관중 역시 그 시합이 끝날 때까지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련은 끝났다. 나는 심판의 승리 판정이 날 것으로 기대하면서 판정선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심판은 상대방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놀란 ‘발레라’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버렸다. 우리 측은 서면으로 항의했다. 30분간의 심의 끝에 ‘유럽 가라데’ 연맹 회장은 이의를 묵살하고, 시합을 속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오너먼트’는 계속되어 결국 ‘발레라’가 ‘챔피언’이 되었다.

주먹과 비둘기(힘과 화합을 상징하는 것들)를 구호로 내세우는 그 ‘스포오츠’계에서 일어난 뻔뻔스런 이 부정 행위는 그것에 대한 나의 환상을 산산이 부수어 놓고 말았다. 주먹은 남아 있었지만, 비둘기는 내게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2년만 있으면, 말과 행위에 있어 참다움이 증명된, 탁월한 화합의 도를 발견하게 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성서 진리를 듣게 되다

언제나 나는 하나님을 깊이 존경하였으며 기도를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아내와 나는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라났었다. 1971년 12월에 결혼한 이후, 문제가 닥칠 때면 우린 함께 기도하곤 했다. 성서를 가지고 있긴 했어도 성서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그래서 1973년 1월 어느 금요일 오전에 ‘암스테르담’에서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오자, 나는 주저없이 그들을 안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서 대답을 들었다. 그때의 첫 대면은 참으로 유쾌한 것이었다. 그 다음 매주 금요일마다 그들은 찾아왔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으로 연구를 했다.

그때쯤 해서 나의 유학 기간이 끝났고 우린 ‘수리남’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떠나기에 앞서, 증인들은 우리 부부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해서 뜻밖의 송별 ‘파아티’를 열고 몇권의 성서 출판물로 된 선물까지 주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하면서 보여 준 그들의 사랑에 찬 참을성과 충실성은 우리들의 정신과 마음 속에 애정 어리고 지속적인 인상을 심어 주었다. 우린 맛을 본 그 진리를 잊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심어진 그 ‘씨에 물을 주는 일’이 다시 시작되기까지는 일년 반이 더 흘러야 했다.

직접 도장을 열다

‘수리남’ 정부를 위한 새 일자리 때문에, 수도 ‘파라마리보’에서 약 5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공항에서 가까운 자그마한 부락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거기에 증인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성서 연구를 계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와도카이’ 교습을 시작해 줄 것을 청하는 ‘가라데 팬’들이었다. 승부 시합에 참여하는 것은 중단했었지만, 나는 하나의 ‘스포오츠’로서 ‘가라데’를 여전히 좋아했으므로, 수도에 내 자신의 도장을 열기로 동의했다.

오래지 않아, 일주일에 나흘은 ‘가라데’를 가르치는 데 바치게 되었다. 정부와 관련된 정규 직업 일이 오후 2시에 끝나는 즉시 퇴근하여서는 밤 10시나 되어서야 귀가하곤 했다. 또한 일요일과 방학 기간에는 수련생들과 함께 관광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들이 거리에 나다니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가라데’ 수업을 끝내고 나면, 그들의 학교 문제나 가정 문제에 대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이처럼 바쁜 일정 탓으로, 내 자신의 가정은 몹시 소홀히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화합의 도”를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바침에 따라 내 자신의 가정의 화합은 그 만큼 더 무너지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좀 신경을 써 달라는 말을 아내가 할 때면 짜증을 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는 매우 바쁘게 일하였다. 아내는 변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증인이세요?”

1975년 5월이 되자 그 변화가 왔다. 그 마을을 집집마다 방문하고 있는 두 사람을 아내가 문득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그 두 사람이 우리 집으로 올 때까지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증인들이세요?” 그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아내가 물었다.

“아, 예, 그런데요.”

“어서 들어오세요. 우리가 성서 좀 계속 연구할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놀란 그 증인들은 참으로 기꺼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전자 공학 연수차 내가 미국으로 가게 되자, 성서 연구는 다시 중단되었고, 나중에 아내와 아이들도 ‘네덜란드’로 가서 몇달간 머물게 되었다. 1978년 초가 되어서야 정상적인 생활로 다시 안주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안정되자 곧 증인들이 다시 찾아왔다.

결정에 직면하다

이번에는 연구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오래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우고 있는 내용이 ‘가라데’에 대한 나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례로,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만 있다는 ‘바울’의 말은 내가 ‘스포오츠’에 바치고 있던 시간의 양과 상충되는 것이었다.—디모데 전 4:8, 신세.

더우기, 증인들이 내게 강조했듯이, ‘가라데’는 상대방에게 상해를 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거니와, 고의가 아닐지라도 사람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사실이 그러했는데도, 나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가 그토록 정열을 쏟아 추구한 그 모든 것을 어찌 내버린단 말인가?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호신용 무기를 의존하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에 나는 동감이었다. (전도 9:18, 신세 참조) ‘하지만 정말이지 ‘가라데’ 수련을 무기를 소지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마지 못한 마음으로 숙고해 보면서, 일본 ‘가라데’ 협회의 공동 창립자인 ‘이사오 오바타’가 이야기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겨 보았다. “정신은 총이요 몸은 탄환이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하신 예수의 말씀은 ‘가라데’ 수련자들에게도 해당된단 말인가?’ 석연치 않은 심정으로 골똘히 생각하였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마태 26:52.

어느 날 나는 모든 학생들을 체육관에 집합시켰다. 대부분이 고교생들이었다. 또 한판의 승부를 벌인 것이 아니라 학생들은 자기들 ‘센세이’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 다음, 무술(武術)이란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들은 내가 체육관을 영구히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남은 수련 기간을 마쳐야 하고, 그들의 승급 및 승단 심사를 감독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당장 그만둘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이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여 나의 결심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1978년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가 적시에 개최되어 나를 강화시켜 주었다.

대회의 전체 회기를 모두 참석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른 해에는 한 두번의 저녁 회기에나 얼굴을 내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직장에서 휴가를 냈다. 대회가 시작됐을 때에는 우리 가족 전원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린 모든 회기를 속속들이 즐겼다. 나에게 있어서 그 대회는 일종의 묵시나 다를 바 없었다. 생애에 걸쳐 내가 애써 추구했던 온갖 덕—하나님께 대한 존경심, 기도의 소중함,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진정한 ‘와도카이’[화합의 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만 나는 이처럼 자신을 강화시켜 주는 체험을 하게 해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는 마음이 복받쳐 올랐다.

수개월 후인, 1978년 12월 24일에 아내와 나는 침례를 받았으며, 우리의 생활의 새로운 장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더 좋은 것

그 결정은 숱한 축복을 가져왔다. 가정의 긴장감이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예전에 없던 연합이 있고, 세 딸이 여호와의 숭배자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깊은 즐거움이 있다.

침례를 받은 이래 두번 다시 ‘가라데’를 사용한 적은 없다. 하지만 몇년 전에, ‘가라데’를 유발시킬 뻔했던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어느날 밤, 잠이 깨자 집안에 도둑이 든 것을 알게 되었다. ‘가라데’에 의존하는 대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최상의 방어책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수년간의 침묵을 깨면서, 이제는 좀 구식이 된 듯 싶은, 그러나 소름이 끼치는 ‘가라데’ 기합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갔다. 주효한 전략이었다! 도둑은 줄행랑을 놓았고, 동시에 나로서도, ‘가라데’에 의존하지 않고 보다 안전한 방어 수단을 사용한 것으로 마음이 편안하였다.

아, 참, 부상을 당하고 병원으로 급히 실려간 그 선수가 어떻게 됐는지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죽지는 않았다. 나의 주먹 지르기로 늑골 세대가 부러졌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유혈죄를 짊어지지 않게 된 것에 대해, 나는 안도하고 있다.

회고해 보면, 단 한 가지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나는 ‘가라데’를 더 일찌기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최초로 성서를 연구하고부터 여호와께 대한 나의 최종적 입장을 취하기까지, 근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참을성을 보이면서,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계속 격려해 준 증인들에게 나는 정말 감사한다. 탁월한 화합의 도를 발견한 것은 참으로 기쁨에 넘치는 일이다!—기고, ‘해롤드 라 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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