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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5 7/1 12-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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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률가로서, 나는 논리를 원하였다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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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7/1 12-16면

법률가로서, 나는 논리를 원하였다

나는 1964년에 ‘마드리드 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보수가 좋고 영향력있으며 존경받는 직책인 유리한 위치에서 공평과 동료 시민들을 위해 봉사할 큰 가능성이 내 앞에 열려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때문에 ‘스페인’의 ‘국선 변호인’ 단체에서 한 자리를 얻을 것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여러 해는 나에게 깊은 실망과 환멸을 안겨 주었으며, 결국 나는 정치와 종교에 대해 회의적인 상태가 되었다.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매우 쓸데없는 일같이 보였다. 나는 여러 해 전에 시작한 과정의 한계점에 와있었다.

그러면 내 생애의 무슨 사건들이 나로 단호한 대안인 자살할 생각까지 하게 하였는가? 나를 이같이 기진맥진하게 만든 점진적인 과정은 무엇이었는가?

어둠 속에서

나는 ‘스페인 내전’(1936-39년) 직후에, 그 당시 ‘스페인’ 보호령이었던 ‘모로코’에서 태어났다. 군 장교인 나의 부친은 그곳에 주둔해 있었다. 나는 세 자녀들 중 둘째였으며 외아들이었다. 나는 군과 ‘가톨릭’이 대단히 높은 대우를 받았던 ‘스페인’ 역사의 바로 그 기간에 전형적인 중류 계급의 가정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스페인’ 사람들은 “반 수도사와 반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한 정신 상태는 생활의 모든 부면에 나타나 있었으며, ‘가톨릭’ 정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다. 조국, 종교(물론 ‘가톨릭’), 전통, 국가주의 정신 그리고 ‘스페인’ 민족의 우월성이 정부의 주도 아래 모든 어린이의 정신에 심어주는 기본 개념들이었다. 당시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으므로, 나는 ‘가톨릭 수도회’와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때가 되면 나도 군 장교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의문과 의심들

12세 때 나의 생애에서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부친이 어떤 ‘가톨릭’ 종교 교육 과정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는 ‘보베르-칸테라’ 성서 한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줄이 많이 쳐져 있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들에 관해 여백에다 써놓은 의문과 ‘메모’들로 가득찬 그 성서를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약 3개월 만에 나는 성서 전체를 통독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그 당시 ‘스페인’의 ‘가톨릭’ 어린이에게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성서를 읽도록 권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선생님들은, 특히 내가 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기 시작하거나 ‘가톨릭’ 교리에 반론을 제기할 때, 나를 설득하여 단념시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란다. 너는 너무 어리지. 어른이 된 다음에 성서를 읽어야 해”라는 말을 어찌나 자주 들었는지 모른다.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코 성서를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의혹의 눈으로, 거의 내가 이단자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성서 낭독 과정에서 떠오른 의문들 때문에 나는 정신에 혼란을 일으켰다. ‘가톨릭’교인으로 훈련받은 나는 그러한 의심을 품는 데 대하여 나 자신을 책망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성모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들을 믿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 역사를 공부하면서, 교회를 연합시키기 위하여 ‘가톨릭’교인들과 삼위일체를 반대한 ‘아리우스’파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끔찍한 전쟁들에 관해 배웠을 때 느꼈던 깊은 염려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삼위일체’가 ‘스페인’에서 언제나 믿어온 교리가 아니었음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 ‘고트’인의 왕 ‘레카레드’가 ‘아리우스’설을 부인하고 ‘니케아’의 상징인 ‘삼위일체’를 믿는 ‘가톨릭’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교리는 기원 6세기에 공식적으로 강요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분명히 정치적인 이유들, 즉 당시 ‘이베리아’의 두 주요 인구 집단인 ‘서고트’인들과 ‘스페인’계 ‘로마’인들을 융합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성서에 대한 개인 연구를 통하여, 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처음 창조물이라는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믿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12세 때 내 자신의 성서에서 발견한 논리였다. 그러나 고민이 있었다. 교회의 전문가들이 좀더 일찍 더욱 확신을 가지고 분별해 낼 수 있었을 내용을 내가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었는가? 그리하여 나는 그 문제를 마음에 숨겨 놓은 채 묻어 두었다.

14세 때 시력이 몹시 나빠졌기 때문에 나는 직업 군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술을 공부할 결심을 하였으며, 결국 고전 문학과 고대 철학을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부에서 나는 성장해 온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신앙 속에서 살며 생존한 다른 나라와 문화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그 중 어떤 문화 속에서 태어났다면, 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념과 신앙 속에서 성장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결과, 다른 종교, 개성 및 인생관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생이란 참으로 독단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떤 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혹은 전혀 종교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는가를 결정하는 우연의 희생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연의 변덕에 맡겨 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불공평해 보였다.

반감을 가진 이유들

그 당시 우리는 고대 도시 ‘톨레도’에 살고 있었다. 그 도시의 낡고 꼬불꼬불하고 좁은 거리들, 오랜 역사 및 회교도와 ‘유대’교인과 ‘가톨릭’교인의 믿음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인 건물들은 나로 하여금 세 가지 문화, 그들의 신앙 및 생활 방식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였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두 가지 종교 즉 ‘유대’교와 회교가 그렇게도 확고하게 ‘삼위일체’가 아니라 유일신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가톨릭’교인과 ‘유대’교인들 그리고 그리스도교국과 회교국 사이의 오랜 적의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17세 때 나는 ‘마드리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우선 사람들이 크게 다양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다. 나중에 나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좌파와 ‘마르크스’주의자 집단들 및 기타 좀더 온건한 집단들과 계속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기대했던 참다운 성실과 지적인 정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만이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올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나는 무사히 1964년에 법학 공부를 마쳤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방황하게 되었다. 인류를 위한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이 때는 모든 것이 쓸데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나의 생활에 변화가 왔다.

나의 생활을 바꾸어 놓은 방문

나는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속 성서를 읽었다. 법률가로서의 나의 정신은 나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 있는 무한한 지혜—개인과 공동 사회에 대한 관심, 권리 및 의무가 균형잡혀 있는 놀라운 공평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나는 그러한 율법의 동기가 되었고 그러한 율법이 성취되는 데 필요한 깊은 사랑에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율법이 온전히 적용되는 세상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을 꾸었다.

하루는 내가 성서를 책상 위에 펴놓았는데, 나의 부친이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 ‘페르난도’와 ‘구이예르모’를 집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였다. 부친은 성서를 가리키면서 “내 아들은 당신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할 겁니다. 그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보세요”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왜 다른 사람들이 거짓 숭배 행위로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정죄하셨으면서 ‘아브라함’에게는 그 일을 하도록 요구하셨는가?” “그분의 목적이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지상에 있는가?” “그분은 지상에 만물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들어서 우리로 전혀 죽고 싶어 하지 않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페르난도’와 ‘구이예르모’는 각 질문에 대하여 성서를 사용하여 하나씩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감명을 받았다. 약 두 시간의 대화가 있은 후에, 나는 “무슨 출판물을 가지고 있읍니까?” 하고 물었다. “아, 네, 많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 책만 가지고 있읍니다”라고 말하면서 ‘페르난도’는 256면의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날 오후에 나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 내 방에서 혼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성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는 성서가 실에서 풀린 뒤섞인 진주더미에 불과하지 않았다. 주요점들을 전부 갖춘 생생한 묘사는 논리적이었고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자신을, 예수의 병 고치는 손 아래서 자기 주위에 있는 물건들의 모양을 알아보기 시작한, 기쁨에 넘친 맹인에 비하였다. (마가 8:22-25) 나는 진리를 찾아 구하였으며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살아계셨다. 그분의 아버지이며 우주에서 한분뿐인 사랑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인류를 위한 자신의 행복한 목적—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맡겨진 그분의 왕국을 통하여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분을 사용하고 계셨다.—사도 3:21.

그러나,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태 7:24) 정신에서 마음에 이르는 길이 장애물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으며, 나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다.—빌립보 3:8.

‘새들, 열기 및 기운을 막는 잡초들’에 의하여 시험받는 기간이 지난 뒤, 1971년에 나는 침례로 여호와께 대한 나의 헌신을 상징하였다. (마태 13:4-7, 19-22) 나의 아내 ‘루씨아’는 4개월 뒤에 침례를 받았다. 나의 모친은, 지금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는 두 명의 처남들과 함께, 1973년에 침례를 받았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진리를 변호함

1974년 말에 ‘마드리드 라디오’ 방송국은 ‘증인’에게 수혈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 관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하였다. 1970년 이래 법적으로 등록이 되기는 하였지만, 보도 기관과 교직자들은 여전히 우리를 금지의 그늘 아래 있는 종파로 대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코’ 장군의 사위인 유명한 외과 의사가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을 때 우리가 얼마나 흥분하였겠는가를 상상해 보라.

나와 ‘증인’ 간호원과 다른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약간 사자 굴에 들어가는 ‘다니엘’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탁자 주위에 다섯명의 의사와 ‘가톨릭’ 사제가 앉아 있었다. 이 나라 전역에서 그 ‘프로그램’을 들었기 때문에 큰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아직도 금지령 아래 있다는 사제들의 거짓말에 못을 박았다. 작은 마을들에 사는 격리된 ‘증인’ 봉사자들은 특히 이 도움에 감사하였다.

1984년에 나는 ‘라 클라베’(열쇠)라고 하는 ‘스페인 텔레비젼’ 정규 ‘프로그램’에서 진리를 변호할 기회를 가졌다. 그 토론에는 ‘크리쉬나’교 운동의 대표들과 정부의 종무 책임자, 종교 역사 교수 및 심리학 박사가 참석하였다. 공격이 퍼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리를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스페인’의 대법원 앞에서 ‘증인’을 대표하는 특권을 가진 일도 있었다. 또 다른 경우에 나는 ‘마드리드 아우토노모우스 대학교’에서 청중에게 성서의 소식을 제공하였다. 다른 ‘증인’ 연사가 “여러분은 자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단 일분이라도 타고 있는 불덩이에 자녀의 손을 올려 놓으시겠읍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교국은 하나님께서 소름끼치는 영원한 불의 지옥에서 그보다 훨씬 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빠, ‘새 질서’는 아직 멀었나요?”

‘페르난도’와 ‘구이예르모’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마태 10:40) 그 이후 나는 행복한 가족—아내이며 떨어질 수 없는 내조자 ‘루씨아’와 네 자녀 ‘레베카’, ‘하코보’, ‘아비가일’, ‘아벨’—을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인도 아래 바로 이 지상에 존재하는 훌륭한 형제 관계 안에 들어오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 한 가족으로서, 우리는 그분의 독수리 날개 같은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느낀다.—출애굽 19:3, 4.

큰 자녀 둘이 우리와 함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 종종 그들은 “아빠, ‘새 질서’는 아직 멀었나요?”라고 묻는다. 나는 “아주 가까왔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단다”라고 대답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실패하지 않을 것과 이 제도의 끝이 가까왔다는 징조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명백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 고난의 때는 “당신의 왕국이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진실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왕국 통치가 이 지구를 덮게 될 영광스러운 과도기임을 나타낸다.—마태 6:9, 10, 신세; 하박국 2:3.—‘훌리오 리코테 가리도’의 체험담.

[13면 삽입]

“나는 ‘삼위일체’가 ‘스페인’에서 언제나 믿어온 교리가 아니었음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

[14면 삽화]

‘‘톨레도’에 있는 ‘가톨릭’, 회교 및 ‘유대’교 건물들은 나로 하여금 세 가지 문화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였다’

[16면 삽화]

아내 및 자녀들과 함께한 ‘훌리오 리코테 가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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