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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척당한 ‘나찌’주의—누구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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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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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5 9/1 7-11면

배척당한 ‘나찌’주의—누구에 의해?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라는 말은 ‘히틀러’의 ‘제 3제국’ 치하에서 요구된 인사 방식이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지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신비적인 심지어 종교적이기까지한 개념들을 총통의 인격과 결부시켰다.” 이리하여, 그 인사는 통치자에게 적절하게 나타내야 할 존경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참조 로마 13:7.

또한, ‘히틀러’는 “‘국가 사회주의 제국’은 일천년을 지속할 것이다”라고 호언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성서에서 말하는 메시야와 경쟁 관계에 두고 말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천년 동안 땅을 다스릴 하나의 정부를 약속하셨었기 때문이다.—참조 계시 20:4, 6.

‘히틀러’의 경찰 국가에서 ‘나찌’의 목표들과 상치된 의견을 공공연히 표명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오직 그 정권의 정책과 지나친 행동들이 분명해질 때에야 그리고 특히 전쟁의 패배가 명약 관화해질 때에야, 의견의 상치가 반대로 바뀌었다.

그러한 반대는 1944년 7월 20일에 있은 ‘히틀러’의 암살 미수 사건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연루된 사람들 중 얼마는 원래 ‘나찌’주의에 동조하였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40년 후인 1984년 7월 20일에, ‘히틀러’는 다시 한번 신문의 표제 기사를 장식하였는데, 바로 그 날 ‘독일 연방 공화국’의 수상이, 불발로 그쳤던 그 암살 기도 후에 처형되었거나 다른 방법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념하는 한 의식에서 연설을 하였던 것이다.

교직자들의 반대는 어떠한가?

그 당시에 독일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히틀러’와 ‘나찌’주의를 반대하였는가? ‘가톨릭’ 교직자들이 보인 태도는 어떠했는가? ‘베를린’의 ‘가톨릭’ 주교 ‘콘라트 그라프 프레이징’에 관하여, 신문 기자 ‘클라우스 쇼올더’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아직 ‘아이히스테트’의 주교였던 ‘그라프 프레이징’은 그 시초부터 ‘제 3제국’ 내에서 불길하고 범법적인 정권을 간파한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그는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독일의 ‘가톨릭 주교 회의’ 의장인 ‘버트람’ 추기경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나찌’주의에 대한 반대를 서슴없이 말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나찌’주의를 지지하였다. 그래서 ‘쇼올더’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회고해 보면, 누구나 [‘히틀러’와 ‘나찌’주의에 대한] 이러한 충성은 변명할 수도, 그렇다.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교인 가운데서는, ‘마르틴 니이묄러’ 목회자가 ‘나찌’ 정권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로 종종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저술가 ‘H. S. 브레베크’는 이렇게 말한다. “그 목회자를 ‘히틀러’의 정치 목표들과 분리시키는 유일한 질문은 ‘누가 교회를 다스리는가? 교회 자체인가 아니면 당인가?’였다. 하지만,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지지는 무조건적이었다.” 1984년에 ‘니이묄러’의 죽음에 즈음하여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지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독일 내의 거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처럼, 그도 본래, 갈망하던 독일의 부흥이 ‘히틀러’의 통솔력 아래 이루어지는 것을 환영하였다.”

1984년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유럽 침례교 동맹’의 회담에 관하여 「도이치 알게마이네 손탁스블라트」지(「저어먼 트리뷴」지에 영어로 재인쇄되었음)가 보도한 것도 그와 똑같이 사실을 잘 아는 것이었다. 그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우선 ‘제 3제국’의 통치 중에 보인 ‘침례 교회’의 행동에 관한 해명 발언이 있었다. 지금까지, 교구들은 이 민감한 문제와 씨름하기를 꺼려하였다. 하지만, 의회에서 민족당의 수뇌가 이러한 ‘고백’을 하였다. ·⁠·⁠· ‘우리는 [‘나찌’주의를 대항하는] 투쟁에 공개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으며 ·⁠·⁠·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에 대해 분명하게 저항하지 않았읍니다. 우리는 우리 독일당이 그 당시의 이념적 유혹에 굴복하여 진리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려는 더 큰 용기를 증명하지 못하였던 데 대해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읍니다.’”

제반 사실들은 극소수의 교직자들만이 ‘히틀러’의 정권을 거부하는 태도를 나타냈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들조차도 순수한 성서적 이유가 아니라, 보통 환멸감이나 또는 교회의 정책이 동기가 된 것이었다. 진상을 살펴보면, 그들 대다수는 한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지위에 고착하려고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모조품인 정치적 메시야와 그의 “천년 통치”에 “하일”을 외치는 일에 자가 당착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비굴하고 불경스럽고 비성경적인 본을 그들의 교구민들도 따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도 똑같은 불행을 당하게 하였다.—비교 마태 15:14.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러나, 독일 내에 그리스도인 원칙들을 담대하게 옹호한 한 집단이 있었다. 그 집단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교직자와 그들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증인’은 ‘히틀러’와 ‘나찌’당에 타협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인 일에서의 그리스도인 중립을 범하려하지 않았다. (참조 이사야 2:2-4; 요한 17:16; 야고보 4:4) 그들은 압도적인 대다수의 교직자와 그들의 양떼들이 했던 것처럼, ‘히틀러’에게 ‘하일’이나 구원을 돌리지 않았다.

그 대신,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와 같이 말한 사도 ‘베드로’와 뜻을 같이 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 4:12; 또한 참조 시 118:8, 9; 146:3)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히틀러’를 위한 군사적 행동으로 자신들의 손을 피로 물들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히틀러’의 군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요한 13:35; 요한 1서 3:10-12.

‘히틀러’와 ‘나찌’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박해를 받았으며 수천명이 집단 수용소로 보내어졌다. 비인간적인 야만적 행위를 겪으면서도 그들이 보여 준 강력한 믿음과 충절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자이며 악명높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쉬비츠’의 생존자인 ‘안나 파웰크진스카’에 의하여 논평된 바 있다. 그의 저서 「아우쉬비츠에서의 가치와 폭력」(Values and Violence in Auschwitz)을 저술하면서, 그는 ‘여호와의 증인’은 “굳건한 사상 세력이었으며 그들은 ‘나찌’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그들을 “당시 공포 정치화해가던 그 나라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끈질긴 저항력의 섬”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아우쉬비츠’ 수용소에서도 그와 동일한 의연한 정신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동료 수감자들 ·⁠·⁠· 수감자 간부들 및 심지어 친위대 장교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무도 자기 종교의 신앙과 신념에 반대되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호와의 증인’은 모든 전쟁과 폭력을 저항하는 신앙을 위해 수동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렇다. ‘여호와의 증인’은 ‘히틀러’와 그의 ‘제 3제국’에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뢰와 희망을 ‘나찌’주의나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정치 제도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더 나은 것을 가져오려는 인간의 통치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교직자와 그들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나찌’주의의 영적 희생물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훨씬 더 나은 것

오늘날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의 신뢰와 희망을 어떤 종류의 정치적 이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훨씬 더 나은 것, 즉 의로운 새 제도로 안내할 그분이 세우신 하나의 정부 곧 온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념들을 거부한다. 지구 전체를 위한 그 하나의 정부란 ‘하나님의 왕국’이며, 그 정부는 그분의 메시야인 그리스도 예수의 영도 아래 이미 하늘에 설립되었다.—마태 6:9, 10; 베드로 후 3:13.

1933년 2월 1일에, ‘히틀러’는 그의 첫 ‘라디오’ 연설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독일을 변화시킬 것인지 한참 떠벌리다가, 자기와 자기의 당에 충분한 시간을 달라고 그 다음에 그 결과를 보고 심판해 달라고 청취자들에게 호소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12년 후에, 그의 “천년 통치”는 치욕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그의 통치에 대한 심판은 이렇게 내려졌다. 그것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날 무렵에, 그것은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백성에게 그리고 그의 국가 및 세계에 깊은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서에 나오는 메시야인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천년 통치’와 얼마나 다른가! 그 ‘천년 통치’가 끝날 무렵에, 인간들과 지구는 오늘날의 타락한 상태와 비교해 볼 때 거의 알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독자 자신이 성서 계시록 21:4, 5에서 그에 관한 묘사를 직접 읽어보라. 그리고 나서, 어떤 ‘테러리스트’의 공격, 전쟁, 해로운 이념이나 사람들의 행복을 망칠 어떤 일도 당할 염려가 전혀 없는 지상 낙원에서 마음껏 삶을 즐기는 완전한 사람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 그려보라! 그리고 독자도 그 놀라운 장면 속에 사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바란다!—이사야 35:1-7; 65:17-25; 요한 1서 2:17.

[9면 삽입]

대부분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직자들은 ‘나찌’주의에 대한 반대를 서슴없이 말하려 들지 않았다

[11면 삽입]

참다운 ‘천년 통치’는 하나님의 왕국에 의해 있을 것이다

[8면 삽화]

교직자들은 ‘히틀러’를 지지하여 자기들의 손을 피로 물들였다

[10면 삽화]

수천명의 ‘여호와의 증인’(위에 나오는 ‘요하네스 하름스’를 포함하여)이 ‘나찌’주의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이 사망 증명서가 증명하는 것처럼 많은 ‘증인’이 죽임을 당하였다

제국 군법 회의 검사장

‘요하네스 하름스’는 ·⁠·⁠· 1940년 11월 7일에 제국 군법 회의에서 군 사기 저하 혐의로 재판을 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 그 선고는 1941년 1월 8일에 집행되었다.

제국 군법 회의 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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