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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록 스타아가 되어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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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12/15 17-20면

록 스타아가 되어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십팔년 전 나는 록-뮤우직 스타아였으며 나의 인기는 높이 치솟고 있었다. “브루스, 너는 정말 행운아야!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넌 잘 생겼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돈이 있고, 독신으로 자유로우니 말이야! 거의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너를 알아보고, 너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아니?” 친구들에게는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곤 하였다.

‘만일 내가 즐기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행복의 기준이라면, 왜 나에겐 내적인 평화와 만족이 없을까?’ 나는 의아해 하였다. 나중에 나는 그러한 생활 방식을 추구하여 참다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일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가수로서의 나의 경력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사는 퀴벡주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 기타아를 연주하는 학생을 만나 학교 연주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작은 규모의 악단을 만들었으며 그 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널리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학교 댄스를 조직한 한 사람은 나의 재능에 관한 풍문을 듣고 댄스 시간에 밴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 한곡에 5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나는 동의하였다. 댄스 호올에 도착하였을 때, 빽빽한 홀은 열광적인 댄서들로 만원이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어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을 때, 많은 청소년은 춤추는 일을 잊고 무대 전면으로 떼지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댄스가 쇼우로 바뀐 것이다!

작곡가들은 악단에 소속되어 내가 가수로 활약하기를 원하였다. 나는 동의하였으며 우리는 설탄즈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5년에 매니저는 우리를 매우 널리 알려진 록-밴드 경연 대회에 참가시켰다. 대상은 퀴벡에서 가장 큰 텔레비젼 방송망을 가진 한 방송국에서 주간 쇼우에 등장하는 일이었다. 그 주 전역에서 참가한 28개의 밴드 중, 우리가 대상을 탔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TV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분당 45회전 레코오드에 취입한 우리의 노래는 히트곡의 인기 순위에서 갑자기 정상으로 뛰어 올랐으며, 우리가 나오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은 다른 방송국들에서도 방영되었다. 삽시간에 우리는 퀴벡에서 제일 유명한 악단이 되었으며, 우리가 취입한 레코오드는 오십만장 이상이나 팔려 나갔다. 결국 나는 악단 설탄즈를 떠나 솔로가 되었다. 그러나 헤어지기 전에 우리는 송별 여행을 하였다. 1968년에 몬트리오올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다. 8,000명의 군중이 우리와의 작별을 고하기 위하여 왔다.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롤링 스톤즈, 조니 할리데이 및 아다모(국제적인 스타아들)가 당시에 모을 수 있었던 군중보다 더 많은 군중이었다.

솔로 가수가 됨으로 훨씬더 자유로왔고, 두 말할 나위 없이, 수입도 훨씬 나았다. 새로 얻은 자유로 인하여 나는 유럽에서 십주간의 휴가를 보낼 수 있었고, 그때에 좀더 현실적인 견지에서 록 스타아로서의 나의 생활을 분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깨달은 사실들로 나는 당황케 되었다. 이제 21세의 나이인데 하루 하루 야심은 커가고, 앞서기 위한 경쟁은 흔한 일이었다.

퀴벡으로 돌아와, 나는 즉시 두개의 레코오드를 취입하였으며, 그것은 히트곡의 인기 순위에서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다음, 1969년에 인기 가수를 뽑는 모임에서, 나는 ‘그 해의 남자 가수’로 뽑혔다. 그 저녁의 스포트라이트와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적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제도 내의 부패와 가요업계 내에서 젊은 층이 받는 처우 방법에 나는 넌더리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 함정에 빠져 있었다. ‘내 생활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직업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계속 뇌리에 떠올랐다.

1969년에 록의 우상이었던 롤링 스톤즈의 브리안 조운즈가 26세의 나이로 그의 수영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970년 후반에는 인기 있는 블루우스와 록 연주자 지미 헨드릭스와 미국의 탁월한 여성 록 가수 자니스 조플린이 둘다 27세의 나이로 마약 혹은 마약과 연루된 원인 때문에 사망하였다. 십개월 뒤에 또 다른 록 스타아이며 도어즈의 리드 싱어였던 짐 모리슨이 2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모두는 출세 가도에서 사망하였던 것이다! 나 또한 부도덕한 생활 방식과 마약 사용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들 록 슈우퍼 스타아들의 관례를 따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삶의 참다운 목적은 무엇인가?’

나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한 여성으로서 두 아들을 기르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면해 왔는데 점점 연로해져 갔다. 어머니는 용감하게 자신의 책임을 돌봐왔다. 하지만 무슨 목적을 위해서인가? 점점 늙고 약해져 병들고 마침내 죽기 위하여? 이것이 삶의 목적이란 말인가? 대답되지 않는 이러한 질문들로 인하여 나는 낙심케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는 내가 나가던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과 존경심을 모두 상실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몹시 의심하였다. 나는 새롭고 상이한 마약들을 많이 시험해 보았지만, 여전히 우울하였고 때때로 편집(偏執) 증상까지 나타나곤 하였다.

급히 나의 생활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가요계 밖에서 다른 직업을 찾아 보았다. 1975년에 칠개월의 계약으로 건축용 강재(鋼材) 회사에 고용되었다. 강재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비교적 조용하고 온건한 한 연로한 일꾼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성서를 읽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적인 평화를 얻는 데 성서가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 보기 위하여 한권을 구입하기로 결심하였다.

계약이 만기되어 그 일을 그만 두었을 때, 나는 작곡가로서 훌륭히, 생활비를 벌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멀리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만족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성서를 한장씩 읽곤 하였다.

낮에도 흔히 어파아트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는 모르몬 교인들, 교구 사제, ‘여호와의 증인’의 방문을 때때로 받았다. 그들과 삶의 목적에 관해서 여유있게 이야기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겸손하였고 나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의 대답은 전적으로 성서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종교 대표자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본래 의심 많은 나였지만, 내 또래의 ‘증인’인 로저와 성서를 연구하는 일에 동의하였다. 자주 이런저런 이유로 주간 성서 연구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로저는 인내하였으며, 그 점에 대해 나는 지금 깊이 감사한다. 그의 도움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나에게 욕구 불만이 되었던 그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얻게 되었다.

내가 참석한 ‘왕국회관’에서의 첫 모임은 참으로 내 마음을 울리기에 족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나는 이웃에게 순수한 관심을 보이는 겸손한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제공된 내용들은 솔직하였으며 성서에 기초를 두었다.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게 되었다. 멀지 않아 하나님께서 행동하시어, 시편 37:29과 다니엘 2:44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 아래 이 지상에 평화로운 낙원을 가져 오실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낡은 제도의 불공평으로 인한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서의 실용적인 충고는 나의 생활을 ‘바르게 하도록’ 도와 주었다. (디모데 후 3:16, 17) 그동안 동거해 오던 사랑하는 다니엘르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곧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아내도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으며, 때가 되자 그 역시 여호와께 헌신하였다.

“생활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여호와의 도움과 브루스의 지원과 본으로 저는 성서의 의로운 원칙에서 참다운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읍니다.” 다니엘르의 고백이다. 우리 두 사람은 1978년에 침례를 받았다.

나는 ‘몬트리오올 국제 공항’에서 세관 중개인으로 일하는 나의 직업을 좋아하지만, 내 마음은 주로 봉사자로서의 나의 활동에 있다. 사실,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성서 연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은 나에게 큰 기쁨이 된다. 이러한 종류의 주는 것은 확실히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 공동번역.

그리고 지방 회중의 봉사의 종으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많은 기쁨과 만족을 경험하고 있다. 매우 바쁘고 할 일이 가득한 생활이지만, 나는 찾고 있던 내적인 평화와 삶의 참다운 기쁨을 지금 맛보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연예계에서의 경력이 끝나긴 하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참된 생명”을 나에게 열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나는 참으로 감사한다.—디모데 전 6:19.

그렇다. 나는 여전히 음악을 사랑한다! 나는 특히 고전 음악과 포오크-록 그리고 재즈를 다소 즐긴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들을 것인지에 대하여 보다 선택적이 되었다. 일부 현대의 노래들은 부도덕하고 마약 지향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런 종류의 음악은 나의 생활과 생각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소박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하여 노래를 부른다. 그런 이유로 아내와 친구들과 함께 다 같이 노래를 부를 기회를 갖는 적은 규모의 사교 모임에서 많은 즐거움을 얻는다.

가수로서의 나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인기가 높아졌을 때, 행복감은 얼마나 감소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연예업계를 떠나서 ‘여호와의 증인’이 됨으로 나의 인기는 떨어졌겠지만, 나의 행복감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조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낙심 가운데 빠져 있거나 성서에 의지하여 매달려 산다고 생각한다. 한 라디오 아나운서는 나의 레코오드를 한장 틀어준 다음 나의 생활에 관하여 이러한 말을 하였다. “불행하게도, 브루스는 성공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성서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자신을 위하여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훌륭한 것이었으니까요.”

다니엘르는 이러한 말로 동의를 표한다. “참으로, 성서 진리에 관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브루스와 저는 우리의 생활에 참다운 목적을 더할 수 있었읍니다.”—브루스 흐아르드의 체험담.

[18면 삽화]

다니엘르와 내가 행복하고 성취감이 있는 생활을 하는 데 전파하는 일과 연구는 한 몫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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