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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픔에서 희망으로
  • 깨어라!—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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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6
깨86 1/1 11-16면

슬픔에서 희망으로

“회원 및 준회원 전체를 대표하여 본 이사회는 자당의 서거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고인이 평소에 지녔던 인품과 강한 확신 및 믿음은 우리로 온 마음을 다한 유대감을 귀하에게 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이 친절한 말은 어머니가 사망한 후, 내가 받은 애도의 서한의 일부였다. 이 서한은 브라질, 사웅 파울로, 카사 베르데의 복음주의자 성 요한 교구에 속한 가톨릭 신자들의 집단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1966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 가톨릭 신자들까지도 어머니가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을 가지고 창조주를 섬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하여 도피하다

어머니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수세기 동안 터어키의 지배를 받기는 하였어도, 아르메니아인들은 터어키인들과 결코 융화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자기들이 그리스도인들임을 공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어키인들은 회교도들이다.

터어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스타노즈에서, 어머니와 가족은 평온한 생활을 하였었다. 그러나 1915년 어느날 하룻밤 사이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사태가 달라졌다. 터어키 정부의 갑작스런 명령에 따라, 아르메니아인들은 칼이나 농기구와 같은,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을 정부에 징발당했다. 그 다음, 터어키 군인들이 와서 장정들을 모두 데려갔다. 어머니의 가정에서도 부친을 포함하여 많은 남자들이 붙잡혀 갔으며 결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참수를 당하거나 곤봉에 맞아 죽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나의 할머니에게는 노모와 나의 모친을 포함한 다섯명의 자녀들만 남게 되었다. 그후에 모두가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될 날이 왔는데, 군인들이 집에다 휘발유를 뿌려 마을 전체를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살림들을 남겨 둔 채 도망하였다. 매우 당황하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소를 풀어 주는 것을 잊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소의 단말마적 비명 소리를 오랜 시간 들을 수 있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여러 날 동안 하늘은 검은 연기로 덮여 있었다.

피난민인 그들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1925년에 결혼하였다. 그 때 이후로, 부모는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게 되었다. 아버지도 아르메니아인으로서, 소아시아, 카이세르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가족은 훨씬 더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소위 아크소르 (강제 출국) 즉 강제 퇴거령을 받아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두고 광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굶주림 혹은 질병으로 죽었거나 대량 학살되었다.

「타임」지 1982년 8월 23일자는 이러한 발표를 하였다. “1915년에, 내무성 장관 탈라아트 파스하는 촌장들에게 종족 말살을 기도하는 결정을 전달하였다. 그가 보낸 칙령에는 정부의 이러한 결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터어키 내에 거주하는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을 멸절시키라. 범죄 형태의 수단을 취하여서라도 단 한명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연령이나 성별, 양심의 가책 따위는 고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왕국’ 통치 아래 더는 증오하거나 전쟁하는 일이 없이 땅 전체가 낙원이 될 때 그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이 되겠는가! 그 때에는 아르메니아인, 터어키인 그리고 모든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내가 이 놀라운 희망에 관하여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내가 겨우 여덟살이었을 때인 1938년에, 우리 가족은 브라질로 이주하였다. 우리 가족은 대규모 상업 중심지인 사웅 파울로 시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토라웅이라는 땅콩 사탕을 생산하였는데 어찌나 잘 팔리는지 물질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공장을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당시 20세이던 오빠가 세균성 심장 내막염에 걸리게 되었다. 의사들은 오빠에게 단지 수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지만, 그 당시 새로 개발된 약인 페니실린으로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빠의 고열은 계속되었다. 얼마 안 있어 스트렙토마이신이 개발되었다. 우리는 그 약이 기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불행히도 오빠는 그 약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체온은 섭씨 40도에 달하였고, 두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심하였다.

우리는 미국에 있는 의사에게 연락하였고, 그는 페니실린과 병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약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약을 항공 우편으로 받아 가지고 병원으로 막 달려가려는 때에, 오빠가 사망했음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22세로 사망한 것이었다. 온 가족은 종일토록 울었으며, 우리를 위안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망의 밝은 빛

비탄에 젖은 어머니는 성서와 아버지가 여러 해에 걸쳐 구독하시는 워치 타워 출판물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딸들인 우리에게도 그 서적들을 읽도록 간청하였다. 아버지는 이미 그렇게 해 왔었으며,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관심이 생겼다. 나의 세 자매들은 그 출판물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성서만을 읽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죽기 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나는 회상해 보았다. 만일 죽은 후에도 생명이 있다면 나에게 접촉해 보겠노라고 오빠는 말했다. 하지만, 죽은 뒤에, 그는 자기가 어디엔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어떠한 신호도 보내온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도서 9:5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을 읽었을 때, 나는 오빠가 어느 곳에도 살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읽는 것은 참으로 큰 위안이 되었다. (요한 5:28, 29) 그러나 계시록 20:5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는 말을 읽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그 귀절은 천년이 끝나고 나서야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나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야” 하고 언니는 말했다.

“언니는 어디에서 그걸 알게 되었지?”하고 나는 물었다.

“네가 읽고 싶어하지 않던 책들로부터지.”

“어느 책인데요?”

언니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책을 하나씩 읽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가진 책들은 열두권도 더 되었다! 계시록 20:5의 설명을 발견하기 위하여 때때로 밤을 새워가며 읽곤 하였다. 워치 타워 서적들을 읽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는지 모른다!

「계시록」을 설명하는 책인 「빛」(Light) 제 이권과 기타 출판물을 주문하는 편지를 막 띄우려던 때에, ‘증인’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서 그러한 책들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회관으로 초대하였다. 우리는 가기로 결정하였다. 집회 후, 친절하게도 그 증인들은 시간을 내서 자정이 될 때까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부활에 관한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계시록 20:5에 나오는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 중에 살아날 것이지만, 천년 통치의 끝에 있을 최종적 시험에서 충실을 입증할 때까지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제 부활의 약속은 희망의 밝은 빛과 같았다.

“너무 깊이 파고드는데”

바로 그 주말, 오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집집으로 다니며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을 생존한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생활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왔다. 할머니는 프로테스탄트 교인이었다. 할머니가 다니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성서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었더니, 할머니는 “그러면 우리 교회 교역자에게 말해 보려무나”라고 하였다. 그 교역자는 우리와의 대화에 동의하였으며, 우리가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구세주이신가요?” 내가 그에게 먼저 질문하였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해 주시고, 우리는 죽은 후에 천당으로 가지”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지옥에 가게 되지.”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이,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충실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읍니까?”

“천당으로 갔지.”

“그러면 예수의 사망 전에 불충실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읍니까?”

“지옥으로 갔지.”

“그렇다면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선한 사람이 천당으로 갔고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갔다면, 그리고 그의 희생의 죽음이 있은 후에도 마찬가지라면, 무슨 의미로 예수는 구세주가 되시나요? 그리고 예수에 관하여 결코 들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갔읍니까? 그리스도가 없이도 그들이 천당으로 갈 수 있읍니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하고 지옥불에 들어갔읍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께서는 온 세상의 구세주가 아니십니까?”

“너무 깊이 파고드는데” 하고 그 교역자는 대답하였다. “그 정도로 깊이 성서를 연구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나 자신도 그 정도로 깊이 연구하지는 않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정직하고, 선한 생활을 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어디에서든지 상을 받게 될 것이니까.”

“성서는 단지 선한 도덕과 좋은 예절에 관한 책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읍니다!”하고 나는 되물었다.

당시의 내 나이는 18세에 불과하였고, 그는 백발의, 연로한 아르메니아인 교역자였다. 그후로 할머니는 그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되돌아 간 일이 한번도 없었다. 할머니는 ‘증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함께 1948년 8월 22일에 침례를 받아 여호와께 대한 헌신을 상징하였다.

슬픔에서 희망으로

가정에서 일어난 슬픈 일들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곤 하던 어머니와 우리 네 자매는, 이제 즐거움에 넘쳐 다른 사람들에게 ‘새 질서’와 부활의 희망에 관하여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한 비길 데 없는 희망을 가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세속 일로 돌아가 제과업을 돌볼 것인가? 내가 가졌던 목표대로, 전문적 피아니스트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의 전 시간 전파자가 될 것인가?

그 점에 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1948년에 개최된 ‘여호와의 증인’의 대규모 대회에 처음 참석한 지, 한달 뒤에 나는 정규 파이오니아(전 시간 복음 전파자)가 되었으며, 그후 얼마 안 되어 다른 세 자매들도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보람된 생활 방식이었다!

1953년에 나에게는 새로운 특권이 주어졌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선교인이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 ‘길르앗 학교’ 제 22기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나빴다. 어느날 단 둘이 있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만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유일한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어머니에게 똑같은 것을 요구하신다면, 어머니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호와께 거절은 못하겠구나.”

“여호와께서 그보다 훨씬 쉬운 일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즉 어머니의 딸들 중 하나가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선교인이 되는 일 말이에요. 보내시겠어요, 어머니?” 내가 드린 질문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선교인으로 훈련받기 위하여 떠나게 될 것임을 말씀드렸다. 큰 언니 시라노우체가 부모를 돌보기 위하여 남게 되었다.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다음 브라질로 돌아와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고, 나는 두명의 ‘증인’밖에 없던 곳인 산타 카타리나주의 라게스에서 이년 가까이 봉사하였다 그곳에서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6년에, 몹시 사모해 오던 특권 즉 ‘워치 타워 협회’, 브라질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특권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집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 일이 한번도 없으며, 심지어 1962년에 과부가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라곤 조금밖에 없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만족하였으며 최상의 격려가 되는 편지들을 써보내곤 하였다.

20년 동안 지부에서 봉사를 한 뒤에, 길르앗 제 33기에 참석했던, 한 언니인 베하노우츠 역시 지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번역부와 교정부에서 일하고 있다.

다른 두 자매도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막내인 구레미아는 14세 때인 1949년에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고, 1960년부터 (전파하는 일에 매월 140 시간을 바치는) 특별 파이오니아를 해오고 있다. 어머니가 사망한 뒤인 1966년에, 큰 언니 시라노우체가 특별 파이오니아로서 구레미아의 짝이 되었다. 그들은 현재 사웅 파울로 주에 있는 산들로 둘러싸인, 카콘데라는 작은 마을에서 봉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일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일은 없다. ‘빌립의 네딸’과 같이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여호와와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린다. (사도 21:9) 우리 넷은 약 400명 되는 사람들이 이 동일한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 특권을 누려왔다. 또한 이곳 브라질에서 ‘증인’의 수가 1,300명에서 170,000명 이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아 왔다.

우리에게 각별히 흥미로왔던 것은, 1978년에, 독일 뮌헨에 있는 ‘올림픽 경기장’에서 개최된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의 터어키어 회기에서 목격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케 하는 것이었다. 바로 아르메니아인들과 터어키인들이 함께 앉아 평화와 참된 사랑 가운데 성서 교훈을 듣는 모습이었다! 그 날 회기가 끝난 다음, 누가 자기의 차로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였는지 아는가? 터어키인 ‘증인’이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기적을 낳으신다!

우리의 인자하신 창조주께 끝까지 충성을 유지한다면 얼마나 많은 기쁨을 더 누릴 수 있겠는가!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승리를 보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활로 돌아오는 것을 직접 환영하게 될 것이다!—호자 야제드지안의 체험담.

[12면 삽입]

어머니의 가정에서도 많은 남자들이 붙잡혀 갔으며, 결코 다시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12면 삽입]

‘단 한명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고려하지 말라’

[13면 삽입]

어떤 종교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서적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15면 삽입]

아르메니아인들과 터어키인들이 함께 앉아 평화와 사랑 가운데 성서 교훈을 듣고 있었다!

[14면 삽화]

브라질, 워치 타워 본부에서 일하는 호자 야제드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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