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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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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시는가?”
  • 깨어라!—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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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6
깨86 3/1 4-9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시는가?”

1942년 5월 30일 저녁, 일천 대의 폭격기가 영국을 이륙하였다. 그것은 그때까지 사상 최대의 공습이었다. 나는 4발 엔진의 랭커스터 폭격기 비행 중대의 통신 대장이었다. 각 항공기는 3,600 킬로그램의 폭탄을 적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단위 공장 전체나 몇 구획의 시가를 파괴시키기에 충분한 폭발력을 가진 것이었다.

20,000피이트a까지 상승하여, 우리는 독일의 쾰른시를 향해 항진하기 시작하였다. 비행기 탑승원들은 엔진, 연료, 무전기, 항로 등을 점검하느라 분주하였다. 세명의 기관포 포수들은 기장에게 자신들이 맡은 기관포들을 점검하고 발포해 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 우리는 적의 영토로 진입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우리가 네덜란드 해안을 가로질러 갈 때쯤, 나는 항공기 상체의 전망대에 있는 내 자리에 가 섰다. 거기에서는 사방을 다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유사시에 달아나고 포수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적의 야간 전투기들이 접근하는지 계속 예리하게 감시해야 하였다. 멀리서 나는 하늘을 밝히는 빨간 불빛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대다수의 폭격기 편대들이 벌써 쾰른시를 활활 타오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폭격할 차례가 되다

이제 우리는 목표 지점에 돌진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독일 전투기들은 폭격 지역을 선회하며 언제라도 우리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쾰른을 공습한 일천 대의 폭격기 중 마지막 편대에 속해 있으며, 도시 전체가 화염에 싸여 있었다. 우리는 아직 타오르지 않는 지역을 찾아 10,000피이트까지 강하하여, 그런 지역에 폭탄을 투하해야 하였다.

임무 내용을 지시받으면서, 우리는 우체국 본국이 목표 지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군수품 공장들이 길 건너편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 중 다수는 우리가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우체국 본국이 공장들에 둘러싸여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조종사가 폭탄실의 문들을 열자 긴장이 고조되었다. 항공기 내의 소음마저 더욱 커졌다. 이 순간이 우리가 가장 공격받기 쉬운 때였다. 거의 4발 엔진 항공기 자체 만큼이나 길어 보이는 폭탄이 지금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색깔을 띤 예광탄들이 사선을 그으며 하늘을 횡행하고 있었는데, 만의 하나라도 그 폭탄에 맞는다면, 우리는 끝장이었다!

이제 폭격 조준사가 항공기를 통제하였다. 그는 폭격 조준기로 폭격 지역을 조준하면서 조종사에게 지시를 하였다. “좌측, 좌측으로. 우측, 우측으로, 그대로. 조금만 더 좌측으로, 됐어. 그대로, 목표 지점 위다. 폭탄 투하!” 일순 항공기가 진동하였고, 나는 4톤의 폭탄이 항공기에서 빠져 나가는 ‘쉬익’ 소리를 들었다. 섬광 전구가 우리의 폭격 지역을 반짝 비출 때까지 기다리는 1분간 끝없는 시간이 흐르는 듯 싶었다. 일단 피해 지역의 사진 촬영이 마쳐지면, 우리는 귀환하였던 것이다.

양심의 고통

비행기가 급경사로 기울며 선회할 때, 나는 타오르는 쾰른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나는 목숨을 잃어 버린 남녀와 어린이들을 생각하였다. ‘나는 왜 이 거대한 도시에 사는 수많은 순진 무구한 시민들을 살륙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악한 정권에 대항하는 전쟁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자위하려고 애를 썼다.

귀환 도중에, 나는 60차례의 폭격 임무를 수행하면서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는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초기에, 독일 항공기 한대가 영국 링컨시 부근에 있는 방공호에 폭탄을 일렬로 연속 투하했던 적이 있었다. 거기 도피해 있던 여인들의 손발이 잘려 나간 몸통을 끌어내는 데 내가 거들어 주었었다. 그후 몇달 동안 나는 그 악몽에 시달렸다. 이제, 나는 이러한 생각에 잠겼다. ‘일천 대의 폭격기가 인구가 밀집된 쾰른시를 폭격한 결과로, 그러한 끔찍스러운 일이 오늘 밤 얼마나 수없이 반복되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토록 가공스러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나는 스코틀랜드의 인버네스시에서 종교적 배경하에 자랐기 때문에 이런 점을 종종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믿어온 스코틀랜드 교회의 성원이었다. 나는 주일학교 선생이었으며, 교회의 청년회 회장이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우리는 떼를 지어 인버네스 시청 모퉁이에 서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곤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종교적 열정과 교직자가 되려는 열망에 차 있었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시는가?”

나는 전쟁이 벌어지던 6년(1939-45년)간 때때로 군목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십니까?” 하고 묻기도 했다. 군목들은 항상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 그분은 우리 편이오! 우리는 세계 지배를 꿈꾸며 발악하는 사악한 독재 정치와 싸우고 있으며, 오로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군대만이 그것을 쳐부술 수 있소!” 하지만, 나는 그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장교 식당에서 나는 부대의 가톨릭 사제와 한 식탁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신부님,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항공기의 탑승원들 중 하나가 가톨릭 교인인데, 우리가 독일의 폭격 임무를 띠고 이륙하기 전에 당신은 그를 축복해 주었지요. 그런데, 독일에 있는 똑같은 가톨릭 종교도, 이리 건너와서 우리 도시들을 파괴하는 독일 항공기 내의 가톨릭 교인인 탑승원을 축복해 주고 있읍니다. 그래서,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바로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드시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쎄요. 그것 참 곤란한 질문이군요. 그 문제에 관해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만일 히틀러가 세계를 지배하도록 놔둔다면 당신이나 나나 또는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질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독일의 가톨릭 교회와 교인들은 히틀러에 대한 그들의 지원을 철회하지 않는 건가?’ 나는 종전될 때까지 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

1945년 5월 18일, 나는 런던의 버킹검 궁전에서 국왕 조오지 6세 앞에 선 채, 유럽내의 철통같이 방어된 산업 목표 및 도시들의 얼마에 대한 60차례의 비행 임무를 완수한 공로로 ‘공군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다. 도시와 마을을 파괴하고 인명을 앗아갔다는 공로에 대한 훈장이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의 비행 임무를 수행하며 두번째 복무 기간을 마치고 귀환한 13명의 비행 중대 대원들 중에서, 아무런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후 같은 해에 나는 제대하였고, 아내 바바라 및 어린 아들과 함께 영국의 돈캐스터시에 정착하였다. 내가 극도로 침울해진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 나는 신경 쇠약에 걸렸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공습 폭격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그 모든 일에 내가 맡았던 역할 때문에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실까?’하고 줄곧 자문해 보았다. 나는 자주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

방해받은 오찬

어느 날,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려서 아내가 나가보았다. 아내는 한참 동안이나 문간에 있었으며, 나는 다음 요리를 기다리다가 지쳤다. 그래서, 다소 화가 나서 식탁에서 일어나, 아내와 방문객이 나누고 있는 대화에 거칠게 참견하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오?”하고 물었다.

그 남자는 친절하게 대답하였다. “부인께서 이 책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나는 이웃을 방문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그만 두시오!”하고 나는 쏘아 주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란 말만 들어도 화가 났다. “우리는 우리의 선원들이 큰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온 식량은 잘 먹으면서 참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소!”

문 앞의 그 남자는 아주 온유한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한 가지 점은, 전쟁중에 어디에 살든 ‘여호와의 증인’은 중립이었으며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동일한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 교인은 프로테스탄트 교인을 그리고 가톨릭 교인은 가톨릭 교인을 죽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문제로 서로 죽이지 않았으며, 다른 누구도 죽이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 드시는 편

그의 대답을 듣자, 나는 불현듯이 전쟁중에 품었던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시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질문을 그에게 해보았다.

“그거야 쉬운 질문이지요” 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는 요한 복음 13:34, 35를 펴서 보여 주면서 읽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분명히, 우리가 참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든지 또 정치가들이 그와는 반대로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우리는 틀림없이 서로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예수의 명령을 실행하고 있지요. 비록 독일에서 많은 ‘증인’이 중립이라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서 죽고 또 이 나라에서도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더라도 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을 드신다고 믿고 있읍니다.”

그는 수긍이 가게 말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그 서적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 훤히 동이 틀 무렵까지 그 서적을 읽으면서 성귀들을 확인해 보았다. 우리는 내가 참전했던 세계 대전과 같은 전쟁들이 어떻게 하나의 “표징”, 즉 조만간 하나님의 정부가 모든 독재 정치를 종식시키고 땅을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로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들 것임을 입증하는 표징의 일부가 되는가를 배웠다.—마태 24:3-14, 신세.

약 1주일 후에, 우리는 그 서적과 자기 주소를 남기고 간 그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던 것이다. 며칠 후에 그는 다시 방문해 주었고, 우리는 그와 함께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두번째 연구를 마치고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왕국회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아내와 나는 1948년에 침례를 받았다.

또 다른 고지에서의 봉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내와 나는 전 시간 봉사자로서 일하고픈 욕망을 품게 되었다. 물론 우리의 아들이 남미에서 선교인이 되었을 때 그 욕망은 더욱더 강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때까지 매우 훌륭한 주택과 보수가 좋은 직장 등 편안한 환경 속에서만 지내왔기 때문에, 그것은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문제였다. 우리는 더 이상 젊지도 않았으며, 두 사람 다 얼마의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가 실제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많이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우리가 20년 이상 살아왔던 집이 매각되었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1973년 6월에 우리는 라파스 공항을 향해 볼리비아의 황량한 고원 지대 상공을 나르고 있는, 비행기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였다.

아들과 며느리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공항을 떠난 지 몇분 후에 우리는 멈춰 서서, 우리가 보아온 것들 중 가장 장관을 이루는 광경이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을 보았다. 수도인 라파스는 평평한 고원 지대의 1,000피이트 아래 달의 분화구와 유사한 깊은 분지처럼 생긴 우묵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는 초저녁이어서, 우리는 우리 발 아래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전체 도시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너머에는, 꼭대기에 눈이 덮인 일리마니 산이 석양의 마지막 햇살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영국 공군 복무 시절에, 나는 고도 10,000피이트 이상을 비행할 때는 항상 산소를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여기서 우리는 거의 12,000피이트의 고도에서 살게 될 것이었다.—산소 마스크도 없이 말이다! 우리가 호별 방문을 하면서 산소가 희박한 대기 때문에, 헐떡거리며 라파스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일은 얼마나 고된 투쟁이었던가! 그러나, 눈이 덮인 채 치솟아 있는 안데스 산맥의 연봉(連峰)들을 항상 바라보면서 거의 변함없는 햇살 속에서 지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던가!

하지만, 가장 즐거운 일은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에 사람들이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소식을 기록한 카아드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어로 말할 것을 기억해 내곤 하였다. 물론 그 언어는 때때로 어려웠다. 그러나, 그곳 생활 12년에, 나는 스페인어로 공개 강연을 하고 또 한 회중에서 장로로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얼마의 즐거운 경험들을 하였으며 2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연구하여 침례를 받도록 도와 주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아내와 나는 영국으로 돌아가, 거기서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전해 주고 있다.

우리가 쾰른을 폭격했던 그 끔찍스러운 밤을 돌이켜 생각하고 내가 초래했던 파멸과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심정이 괴롭다. 그 당시 나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전쟁에 가담하여 싸우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는가?’ 하고 자주 궁금해 하곤 했었다. 나라들이 전쟁을 벌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나는 얼마나 감사했던가. 그때 그 ‘증인’이 내게 설명해 주었던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을 드신다.” (요한 13:34, 35)—데이빗 워커의 체험담.

[각주]

a 1피이트는 0.30미터에 해당함.

[5면 삽입]

일순 항공기가 진동하였고, 나는 4톤의 폭탄이 항공기에서 빠져나가는 ‘쉬익’ 소리를 들었다

[6면 삽입]

‘나는 왜 이 거대한 도시에 사는 수많은 순진 무구한 시민들을 살륙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가’하고 자문해 보았다

[5면 삽화]

일천 대의 폭격기들이 쾰른을 향해 날아갔다

[자료 제공]

RAF Museums, London

[6면 삽화]

내가 참여한 60 차례의 폭격 임무 중 한 목표였던 쾰른

[자료 제공]

U.S. Army photo

[7면 삽화]

‘제 2차 세계 대전’시, 아내 바바라 및 아들과 함께 한 워커

[자료 제공]

“Topical” Press Agency, LTD., London

[8면 삽화]

한 볼리비아인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말해 주고 있는 데이빗 워커와 그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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