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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 열성당원에서 그리스도인 감독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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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 열성당원에서 그리스도인 감독자로
  • 깨어라!—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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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6
깨86 11/15 16-19면

나치 열성당원에서 그리스도인 감독자로

“차렷! 우로 봐! 히틀러 청년단, 뵈블링겐 지구 보고합니다.” 군사 훈련장에서, 열병식 때 그리고 기타 행사가 있을 때, 나는 아주 의기 양양해서 “내 부하들”을 높은 사람들 앞에 사열시켰다. 그들이 나타내는 복종과 정확성은 나를 몹시 흥분시켰다. 나는 새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다. 1930년대 초에, 우리가 새 시대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독일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과 여러 해 동안의 불안정 그리고 정치적 분열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아 왔었다. 실직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그 당시 나는 슈투트가르트의 한 양복점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봉급은 주당 4마르크였으며, 이것을 가지고는 아침 식사와 점심에 묽은 수프 한 그릇 먹을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나만 그런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불안으로 술렁이고 있었던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장래는 참으로 암담해 보였다.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난 것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권위를 가지고 지도하고 또 성과를 올리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제 상태는 개선되었으며, 실직률도 떨어졌다. 아무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상태는 고무적이었다. 이것은 성공이었으며, 그가 하는 말에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열렬한 지지

나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변두리 조그마한 마을인 홀츠게링겐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나는 우리 지방의 스포츠 클럽의 일원이었고, 그 클럽 회원 대부분이 히틀러의 지지자들이 되자 나도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결국 그는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호전되어 가는 상태에 참여할 기회에 마음이 끌렸다.

히틀러가 1933년 집권했을 때—나는 당시 24세였다—나는 이미 나치 당원이었다. 내가 나타내는 열심을 보자 내 친구들은 “빌리, 자넨 이 일을 하든 저 일을 하든 좋은 자리를 차지할 걸세”하고 얘기들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당내의 책임있는 자리 여섯개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영예로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나는 우리 지역 ‘갈색 셔츠’—나치당 돌격대원을 그렇게 불렀음—의 지도직에 임명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중에 나는 히틀러 청년 단원 2,000명 이상을 거느리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계획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급진적인 당에서 전심 전력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벅찬 일이었는가! 나의 열심은 거의 광적이었다. 내 견해에 감히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누구든 화를 당할 것이었다!

총통이 직접 참석할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리는 한 환영식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을 때, 짐작이 가겠지만, 나는 극도로 감격하였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나치 돌격대원과 히틀러 청년단원 70,000명 가량이 갈색 제복을 입고 줄을 맞춰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였다. 그 다음 절정은 이 거대한 군중 앞에서 내가 “그”와 실제로 악수하는 영광을 안았을 때였다!

방해물

마르타와 내가 결혼한 것은 1932년이었다. 나는 내 이상을 함께 나눌 동반자를 갖게 되어 무척 행복하였다! 내가 하는 일에 아내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왔다. 누군가가 방해를 놓은 것인데,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즉 처제인 미나였다. 처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는데, 자기가 배운 모든 “새로 발견한 진리”를 주저하지 않고 언니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치인 내게 그것은 분명히 잘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의 결혼 관계는 매우 긴장되었다. 예를 들어, 총통과 악수하며 감격했던 슈투트가르트 모임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가 생각난다. 마르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건 이제 당신이 더 이상 손뗄 수 없으리라는 뜻이겠군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한 영예, 그러한 특권에 관해서 어떻게 아내가 농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내가 이해를 못한 것인가?

나는 종종 아내에게 큰 소리를 치곤 했지만, 아내는 차분한 반응을 보였고, 이것은 점점 더 나를 격분케 만들었다. 나한테 화와 욕설을 당하면서도 그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내적 힘을 아내는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한번은 실제로 아내를 집밖으로 쫓아낸 일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자존심은 상했지만 나는 아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아내의 태도는 전처럼 여전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잘못된 사람은 혹시 아내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이러한 생각조차 들어 비통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개인적인 이상의 끝, 내 세계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은 세 시간

어느날 나는 열이 나고 몸이 아파서 청년 돌격대 훈련중 집에 돌아왔다. 자리에 누우려고 갔다가 침대 곁 테이블에 놓여 있는 아내의 성서를 발견하였다. 그런 일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아내는 내가 광적인 열심으로 성서를 태워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이유에선가 성서를 집어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큰 바벨론’이라고 불리는 큰 음녀에 대한 내용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 말은 전에 마르타가 사용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귀에 익은 말이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설명을 해보라는 청을 하지 못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 말의 출처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나는 알아 보기로 작정하고 다른 방에 있던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내 손에 성서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성서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하면서 몹시 떨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내에게서 설명을 듣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바벨론이 누구인지 내게 설명할 수 있도록 미나를 좀 불러 줄 수 있소?”하고 청했다.

처제는 아마도 그때 내가 강제 수용소에 감금시킬 덫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제는 혹시 떠올랐을지 모를 두려운 생각을 일체 떨쳐버리고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바로 그 세 시간이 실제로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프로테스탄트 교인으로 성장했으며, 이따금씩 교회에도 갔었다. 그러나 실제로 종교심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큰 바벨론에 관해 성서가 알려 주는 점이 사실상 교회들을 묘사하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점차로 나는 어떻게 백성과 나라들이 “그 음행의 ·⁠·⁠· 포도주”에 희생이 되었으며, 어떻게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는지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계시 18:3) 그리고 거기에는 나치 독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나의 설명을 들을수록, 나는 성서의 말씀과 그 현대적 성취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 모든 점들이 그토록 여러 세기 전에 예언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나를 스쳤다. 이제 나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느꼈을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그렇다. 이것이 바로 진리다! (사도 9:1-19) 내가 결심을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직도 열이 높았지만, 나는 일어나서 당원 자격과 교회 신도 자격 모두를 사임하러 갔다. 물론 여기에는 나치당에서의 여섯 가지 직책 모두를 사임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담대함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나치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고 그들의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무자비하게 탄압당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한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때까지 바로 그러한 방침을 열렬히 지지하는 자로 일해 오지 않았는가? 이제 내 사업에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내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충절의 시험

마을에서 내가 으뜸가는 화제 거리가 된 지 3주 후, 마르타와 나는 우리의 첫 아이를 갖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합병증으로 인해서 아이가 2주 만에 죽고 만 것이다. 마르타의 생명이 몇배 더 불안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 형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였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일은 우리를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었으며, 그분은 마르타가 회복되게 하셨고,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셔서, 귀여운 에스터를 다시 볼 강한 희망을 갖게 하셨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 심지어 오랫동안 변치 않고 찾아 주던 단골 손님들 대부분이 내 양복점 이용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자기들에게 언제나 잘 봉사해 왔고, 정직했으며, 일을 잘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몇주 안가서 그 불매 운동은 차차 시들해 지기 시작했다. 비록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밤에만 오곤 했지만 고객들은 다시금 찾아왔다. 얼마 가지 않아서 내 사업은 이전보다 더 잘 되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증인’의 책자를 받았는데, 그것을 즉시 읽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속히 돌렸다. 그러나 이 책자들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그 책들을 찾아내려고 게슈타포가 자주 찾아왔다. 어느날 오후 2시쯤 예기치 않게 두명의 게슈타포 앞잡이가 들이닥쳤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바로 전날, 우리는 소책자를 한권 받았는데, 이것은 그 날 저녁에 돌리려던 것이었다. 그들은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 눈 앞 라디오 위에 놓여 있던 바로 그 소책자를 보지 못한 채 돌아서서 떠나 버렸다!

우리는 항상 체포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빌리, 자넨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알고 있나? 자넨 돌았어”—내가 당을 사임할 때 그 지방 나치 최고위 관리는 내게 그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남동생이 내 아내의 동생 중 하나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분명히 가족적 유대로 인해서 그는 나를 고발하지 못했다. 나를 잘 알고 있고, 내 성실성을 알아 주며 나를 존경하던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덮어 주기로 뜻을 같이 한 것 같았다.

나는 1935년의 소위 자유 선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왕국’에 대한 충성에서, 우리는 중립을 지키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날 저녁 8시경, 약 80명의 나치 돌격대원들 한떼가 우리 집 앞으로 행진해 와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밤중에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쳐댔다. “여기 살고 있는 자들은 독일에 대한 반역자들이다. 독일에는 너희 같은 자들이 있을 곳이 없다. 너희들은 교수형을 받아 마땅하다. 유다처럼 마귀에게나 가라!”

한때 나치였던 나는 반역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예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하였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한 15:18) 그러므로 이렇게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줄 뿐이었다. 이 돌격대원들 중 많은 수는 나중에 그들의 패망할 수 밖에 없던 운동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전후에 살아남은 두명의 돌격대원은 자기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해 사죄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었다.

분기하여 활동함

나치 정권의 방해가 사라지자마자, 독일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재조직되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당시 6명 뿐이었던 홀츠게링겐의 자그마한 우리 집단이, 이제는 백여명으로 성장한 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 직계 가족내에서만도 전파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이 28명이나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지금까지 근 40년 동안 나는 회중의 감독 직분을 즐거이 수행해 왔다. 물론 내가 과거에 늘 그랬던 명령적이고 거친 어조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아랫목자들에게 요구되는 사랑과 겸손 그리고 온유하게 봉사하는 영으로 그렇게 해왔다.—마태 23:10, 11; 베드로 전 5:2, 3.

1934년 10월, 내가 나치 사상과 큰 바벨론에서 깨끗이 관계를 끊은 지 반 세기가 지났다. 몇년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로 그 달에 전세계의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히틀러에게 전보를 쳤었다. 그 전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귀 정부가 자행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학대는 전세계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리고 있읍니다. 더 이상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귀 정부와 귀 정당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나는 살면서 그 말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참으로 적절한 때에 기만적인 나치의 선전과 주장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이전의 많은 동지들이 저질렀던 것처럼, 그 죄에 참여해서 나중에 그 재앙을 당하는 고통을 면하게 된 것이다.—빌리 바너의 체험담.

[18면 삽입]

나는 종종 아내에게 큰 소리를 치곤 했지만, 아내는 언제나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17면 삽화]

이미 나치 당원이었던 1928년의 스포츠 클럽 친구들. 위 왼쪽에 있는 젊은이와 나(앞줄 중앙)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19면 삽화]

빌리 바너, 그의 아내 마르타 그리고 처제인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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