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제 위치에 둠
스포츠는 내가 오리건주에서 자랄 무렵 항상 우리 가족의 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에 야구, 축구, 트랙 경기 및 레슬링 등의 운동을 했었다.
십대 초에 아버지가 야구 코치가 되었을 때, 나는 야구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형과 내가 커감에 따라, 아버지는 보다 수준 높은 야구 경기들에 우리를 데리고 가곤하였다. 그로 인해 야구에 대한 나의 관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야구 심판에 대한 관심이 자라다
내가 단지 열 다섯살 되었을 때, 내 인생에서 늘 첫째 자리에 올 것으로 생각했던 직업에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야구에 대한 관심과 지식 때문에, 나는 나이 어린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들의 야구 경기에서 심판을 봐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한 경기들에서 심판을 봐주는 데 대해 돈을 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나는 심판을 보는 일은 좋아했지만 처음에는 돈받기를 거절했는데, 보수를 받게 되면 스포츠에 있어서는 아마추어 신분이 박탈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학교에서 더는 스포츠에 참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나는 이 일이 내가 인생에서 실제로 하기 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반 직업적인 야구 경기들에서 심판을 보면서 보수를 받기 시작했다. 여름철에는 주당 15게임이나 심판을 보았는데, 주말에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여 하루에 서너 게임을 치르었고 주중에는 더블헤더도 있었다.
스포츠를 사랑하였기에 나는 야구 심판이라는 전문성을 띤 스포츠 직업을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나의 천직이 되기를 정말 원하였기에, 나는 대학을 3학년 때 중퇴하고는 플로리다주에 있는 메이저 리그 심판 학교에 등록하였다.
그 학교를 1957년에 졸업할 당시, 나는 21세에 불과했다. 당시 나는 가장 어린 나이에 직업 심판 생활을 시작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요즘에는 그 나이에 시작하는 것이 별로 어린 편이 아닐 것이다. 그때 나는 조지아-플로리다 베이스볼 리그와 계약을 하였고 그때부터 직업 야구 심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점
그 첫해에는 아주 많은 경험을 하였으며, 나의 일을 정말 즐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얼마나 즐기든 관계없이 생활에는 단지 일하는 것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차츰 인식하게 되었다. 생활에는 영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영적인 필요를 돌보는 길이란 그저 야구 계획에 차질을 주지 않을 경우 일요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교회를 나가든 별 차이가 없었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점은 내가 북부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나갔던 교회들의 교인들 가운데서 나를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첫 시즌이 끝난 뒤, 나는 다음 시즌을 기다리려고 오리건주로 돌아왔다. 오리건주에 있는 동안 나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몇 차례 그들과 성서 연구를 하였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알게 된 성서 진리에 더욱더 매력을 느꼈으며, 특히 부패하고 불만족스러운 이 낡은 세상이 조만간 의의 새 제도로 대치될 것이라는 성서의 약속이 그러했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지만,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였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성서의 희망에 대해 알게 된 바를, 나는 남부에 있는 또 다른 심판 학교에 강사로 내려 가면서 동승한 버스 승객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강의는 1958년 1월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있었다.
후에 조지아주에서의 봄 훈련 기간 중에, 나는 침례받을 계획을 하였다. 그것은 ‘증인’과 접촉한 지 약 6개월 후였다. 그리고 봄 훈련이 끝날 무렵 플로리다주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한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것은 그때 이후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나의 헌신을 상징했다.
1958년 야구 시즌 중에, 나는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심판을 보아야 했다. 머무는 도시마다 가능한 한 자주 그곳의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였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그 지방 ‘왕국회관’ 집회에 참석하였다. 또한 다른 ‘증인’과 함께 전파 사업에 나가는 계획도 하였다.
해결해야 했던 문제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면서, 나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의식하게 되었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모이는 일이 단지 하면 좋은 그런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0:24, 25(신세)에서 이렇게 명령한다. “우리는 서로 고려하여 사랑과 선한 일을 격려하며,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함께 모이는 일을 버릴게 아니라 서로 격려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여러분이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십시다.”
그렇다. 이 부패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날은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과 ‘함께 모이는 일을 버리지 말라’는 명령은 긴급한 것이다. 그러나 집회가 종종 내가 심판을 보아야 할 야구 경기 시간에 열리게 되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양심과의 이러한 싸움은 시즌 중에 내내 계속되었다.
시즌이 끝났을 때, 나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부모에게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음을 알렸다. 부모는 그 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모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실로 야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그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59년 시즌에, 나는 보다 수준 높은 노스웨스트 베이스볼 리그로 이동하였다. 나는 집회에 더 많이 참석하고 전파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표를 짰다. 직업상 며칠마다 다른 도시로 여행하였지만, 도착하자마자 그 지방의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과 함께 전파 사업에 임할 계획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는 많은 연로하고 장성된 그리스도인과 함께 할 특권을 누렸다.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들은 내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생활에서 영적인 부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야구 경기 때문에 끊임없이 여행하는 것은 나의 그리스도인 활동에 방해가 될 것이었고, 사실이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많이 여행해야 된다면 한 회중에 자리를 잡고 전파 사업에 보다 더 기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
더 많이 일하기 원함
1959년 시즌이 끝난 후, 나는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서 더 많이 일하기로 결정하고 두달 동안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였다. 젊고 독신인 나는 뉴욕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봉사하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할 가능성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한 경험있는 ‘증인’과 그 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신청서를 제출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12월에, 나는 벧엘이라고 하는 뉴욕에 있는 세계 본부에 전 시간 봉사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새로운 야구 계약이 들어왔다! 리그 회장은 내가 일년만 더 야구를 한다면 수준이 더 높은 퍼시픽 코스트 리그로 진출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한 진출은 내가 야구 심판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 몹시 원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추호도 동요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리그 회장에게 고맙지만 야구 직업을 떠나겠노라고 말했다. 인생에는 야구 경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었다. 그때는 세계 역사상 위기의 때였으며, 나의 생명으로 할 수 있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1960년 초에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일하려는 나의 신청서는 수락되었고, 그곳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야구 심판을 즐기는 동안에는, 즐겁지 않은 면들도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선수와 감독들—그리고 팬들—이 내가 내린 어떤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때와 같이 매우 긴장이 감도는 때가 있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또한 야구장에서의 사고로 인해 몇 차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게임의 그러한 면들에 대해 결코 아쉬움은 없다.
결코 후회하지 않음
내가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위해 야구 심판직을 포기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결코 없다. 사실상, 1963년도에 나의 결정을 굳게 다져준 일이 있었다. 뉴욕시에는 뉴욕 양키 야구 팀이 경기하는 그 유명한 양키 스타디움이 있다. 야구 심판을 할 당시, 나는 언젠가 그 스타디움에서의 큰 경기에서 심판을 볼 꿈을 가졌었다!
과연 1963년 여름에 나는 양키 스타디움에 갔는데, 야구 경기 심판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개최중인 ‘여호와의 증인’의 커다란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수만명이나 되는 하나님의 종과 함께 그 스타디움에 있게 된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다. 사실 나는 프로그램의 일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내가 서 있는 연단은 본루(本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이곳 양키 스타디움 구장에서 야구 경기의 심판으로서보다 이렇게 서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더 나은 일인가!’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내게 매우 흡족한 일이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벧엘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내 조안느를 만났다. 그는 뉴욕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지방 회중과 연합하면서,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벧엘에서 봉사한 지 4년 후인 1964년에, 나는 벧엘을 떠나 결혼하였다. 여러 해 동안, 아내와 나는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흥미롭던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버몬트주와 와이오밍주에 있는 회중들을 돕는 특권을 즐겼다. 그리고 나와 동일한 관심사에 동참하는 아내를 갖게 된 것은 참으로 힘이 되었다.
하지만 1969년에, 우리는 중병에 걸린 나의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오리건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우리 딸 엘리스가 태어났다. 현재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세속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긴 하지만, 우리는 계속하여 봉사에서 창조주를 정기적으로 섬기며 우리 딸이 창조주의 법과 목적을 존경하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또한 때때로 나는 회중에서 여러 가지 자격으로 섬길 기회도 갖고 있다.
1984년에는 2주 동안 뉴욕에 있는 벧엘로 되돌아오는 특권도 누렸다. 그것은 대개가 사업을 하는 많은 가장과 더불어 그곳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건축 일을 돕기 위해 임시 자진 봉사자로 일한 것이었다. 아내는 내가 가는 것을 기쁘게 협조해 주었다. 벧엘에 있는 공장과 사무실 및 숙소 시설을 확장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특권이었다. 2,500여명의 자진 봉사자가 거주하는 거대한 복합 건물은 전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들 가운데서 현재 진행중인 거대한 확장을 인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흔쾌한 두주간 이었다.
그렇다. 나는 야구와 관련된 직업을 포기한 것을 단 한순간이라도 결코 후회해보지 않았다! 여전히 야구를 즐기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 위치에 두고 있다. 나는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 것과 인생에는 스포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창조주께서 곧 가져다 주실 의의 새 제도에서 그분을 영원히 섬길 희망을 갖고 지금 나의 창조주를 섬기는 일이다.—리처드 디체인의 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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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수가 내가 내린 판정에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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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조안느 및 딸 엘리스와 함께 성서 연구를 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