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7 4/1 10-14면
  • 희랍어를 안 것이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희랍어를 안 것이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
  • 깨어라!—1987
  • 비슷한 자료
  •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된 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9
  • 성서 행간 번역판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0
  •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인쇄하고 배부하는 일
    여호와의 증인—하나님의 왕국 선포자
  • 「신세계역」은 정확한 번역판입니까?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자주 하는 질문
더 보기
깨어라!—1987
깨87 4/1 10-14면

희랍어를 안 것이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니컬러스, 희랍어를 공부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라네.” “아, 네, 알겠읍니다. 벤튼 선생님. 그렇게 해보죠.” 이것은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시에 있는 사립 학교, 필립스 아카데미 고등 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나는 이미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희랍어까지 공부하기를 바라다니? 아뭏든, 나는 어학을 좋아했다. 희랍어를 공부해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2학년에 들어서자, 학기 초에 희랍어 수강 신청을 냈다. 공부를 하다 보니 희랍어가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 있고, 표현이 아주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그러면서도 아주 단순하고 쉬운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곧 이 언어에 매료되었다. 이것이 내가 희랍어를 통한 아주 흥미 진진한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경위이다—물론 그로 인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는지는 나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었다!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는 프린스턴 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 4학년 때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졸업 후 뉴햄프셔주에 있는 세인트폴스라는 한 감독 교회 남자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자라온 배경과도 일치했다. 소년 시절 나는 오랫동안 지방 감독 교회의 성가대 대원이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은 다 유니테어리언 교도이거나 아니면 감독 교회의 교인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 고교회파(高教會派)의 감독제주의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반면, 성서적인 이해나 영적인 이해는 거의 얻어 본 적이 없었다. 성서는 교회의 형식주의에 파묻혀 그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세인트폴스에서 나는 그러한 형식주의에 다시 한번 깊이 빠져들었다. 교직원이나 학생 할 것없이 모두가 다 평일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리고 일요일에는 두번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나는 그곳에서 4년간 라틴어와 희랍어를 가르쳤다. 그곳에서 첫해를 지낸 뒤 수잰이라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 이후 3년 동안 라틴어와 희랍어 석사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했고 또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목표로 공부를 계속할까 생각하던 중,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나에게 희랍어를 가르쳐 주었던 체이스 박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이곳 앤도버에 마침 일자리가 하나 생겼네. 자네가 물론 대학원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네만, 일단 이리로 내려와서 우리와 이야기 좀 해보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했고, 결국 그곳에서 희랍어를 가르치기로 이야기의 결말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죽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해왔다.

새집에서 살게 된 지 3주가 조금 넘었을 때, 누군가가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 여자는 수잰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때가 1968년이었다. 아내와 그 여자가 성서와 더불어 연구한 워치 타워 출판물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책이었다. 이 책은 하데스, 프쉬케, 스타우로스와 같은 일부 희랍어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수잰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묻곤 하였다.

“여보, 이것이 캐런과 내가 성서에서 공부한 낱말인데요. 스타우로스는 단순히 ‘말뚝’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어요?”

“암, 그렇고 말고. 그 낱말의 뜻은 분명히 ‘말뚝’이지. 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스타우로스에서 ‘십자가’라는 의미를 끄집어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놀랄 일은 못되지. 교회는 적어도 콘스탄틴 시대 이래 그런 식으로 일을 해왔으니까.”

나중에 나는 캐런의 남편을 만났다. 그리고 일반적인 대화를 몇차례 나눈 뒤에 정기적인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감독제주의는 나에게 성서 지식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고, 따라서 성서에 대한 믿음도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논리에 대한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연구 방식이 필요했다. ‘증인’—종종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는 인기없는 소수 집단—에게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만한 학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과연 이치적일까?

그러나 그때,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에 의해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멸시받고 박해받기까지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옳음이 증명되는 예가 종종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 이들 ‘증인’이 있다—소수 집단이며,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다니고, 길 한쪽에 잡지를 들고 서 있고, 비웃음당하며, 종종 멸시받고 박해를 당하기까지도 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의 말을 들어볼 가치가 있을지도—그들에게 무언가 가치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어쩌면 나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어떠한 분인가를 알려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도움이 되는 가설 즉 이론을 하나 세웠다. 내 이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으로 시작되었다. (1) 다수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2) 대중적인 의견만 아니라면, ‘여호와의 증인’의 생각이 그릇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성서 토론을 하고 난 뒤에, 나는 다루어야 할 세번째 기본적인 가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나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 ‘증인’에게 그 문제를 제기했다. “아서, 성서의 말씀이 단순한 옛날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는 책이 제게 있읍니다!”하고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워치 타워 협회’가 그 당시 최근 (1969년)에 발행한 서적, 「성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책을 한부 갖다 주었다. 그 책에는 성서의 역사적 정확성을 확증해 주는 과학적 및 고고학적 사실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또한 성서가 영감받은 책임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성취된 예언을 다루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정, 즉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만 한다는 가정이 확증되었다!

아서와 그외의 ‘증인’은 당시 제시된 논점에 관한 모든 성경 귀절을 한데 모으는 기술을 보였고, 그처럼 “영적인 것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설명”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모호하거나 상호 모순되게 보였을 내용을 명확하게 하고 상호 조화를 이루게 해주었다. (I 고린도 2:13, 새번역) 나의 질문은 성경 귀절로 대답되었고, 부분들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룬 진리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나의 두번째 가정, ‘증인’이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역시 옳았다.

이 때쯤 나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증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아서와 함께 호별 방문을 나갔다. 침례 교인인 한 여자가 ‘증인’에 관한 소책자를 한부 주었는데, 아마 ‘증인’의 잘못을 폭로하는 내용 같았다. 그것은 여러 곳에서 희랍어를 참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희랍어에 얼마나 조예가 깊은지 호기심이 생겼다. 수주일 내에 그와 비슷한 소책자를 여러 부 더 구해서 조사해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책자가 주로 삼위일체에 관한 점을 다루고 있었다. 그 책자들은 삼위일체를 사실로 가정하고 나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문적인 근거를 여기 저기서 신중하게 선택해 놓았다. 사실상, ‘증인’의 가르침에 대한 공격은 종종 삼위일체와 「신세계역 성경」에 초점을 맞추었다. 희랍어에 있어서도 영어와 마찬가지로 어떤 단어들은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일례로, 영어의 “bow”라는 단어는 정중한 인사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나비 모양의 리본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으며, 화살을 쏘는 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서 연구에서는, 어느 한 단어가 다른 상황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기 위해서 문맥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 귀절들도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이 단지 자기 자신의 가정에 의존해 있는지 혹은 증거에 의존해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나는 이들 소책자를 쓴 사람들이 빈번히 증거를 조작하고, 그 증거를 그릇되게 설명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워치 타워 협회’는 모든 증거와 가능성을 살펴보고, 결론을 제시하고, 그러나 결정은 독자 자신이 내리도록 하는 면에서 아주 정직했다. 논쟁점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 난 뒤에, 나는 ‘워치 타워 협회’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위일체론자들은 분명히 몇 군데에서 증거를 조작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내 생각으로는, 요한 복음 8:58이다. 그 귀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흠정역: Before Abraham was, I am.) 삼위일체론자들은 여기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내가 있느니라” (I am)라는 표현을 집어내어, 그것을 여호와께서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흠정역: I am that I am.) 하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연관시킨다. 이 경우에 예수와 여호와 두분 다 ‘내가 있다’ 혹은 ‘나는 있다’ (I am)라는 표현을 쓰셨기 때문에, 이것이 예수와 여호와가 한분임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희랍어 원문에서도 요한 복음 8:58에서 분명히 현재 시제 있다 (am)를 쓰고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서 문법책들에서조차도, 과거를 나타내는 표현이 문장 내에 있을 때, 현재 시제를 나타내는 동사가 때때로 과거에 시작한 어떤 일이 현재까지 계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a 이것은 프랑스어나 라틴어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신세계역」에서 ‘내가 있다’ (I am)라는 표현 대신에 “내가 있었다 (I have been)”라는 표현을 썼을 때, 이것은 희랍어를 정확히 번역한 것이다. (요한 8:58) 하지만 삼위일체론자들은 ‘아니야,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하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나는 ‘워치 타워 협회’를 비방하는 사람들 쪽에서 오히려 증거를 그런 식으로 그릇되게 설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 이제 ‘워치 타워 협회’의 희랍어에 대한 학식이 믿을 만한 것이니까 그들의 다른 저작물에서도 그 점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고 나는 추리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나는 진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어서 1970년에 침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기 바로 전 해에 ‘워치 타워 협회’는 「희랍어 성경 왕국 행간 번역」이라는 제목의 출판물을 발표하였다. 이 출판물은 나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이 되었다. 아마 다른 어떤 단행본보다도 이 출판물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각 페이지의 좌측난에는 원래의 코이네 희랍어 원문이 실려 있고, 각 행 밑에는 희랍어의 문자적 번역이 실려 있다. 각 페이지의 우측난에는 현대 영어로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신세계역」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출판물이 나올 바로 그 즈음에, 나는 필립스 아카데미에서 신약 성서의 희랍어 강의를 맡도록 임명되었다. 희랍어를 신약 성서에 나오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신학자로부터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희랍어에 관해 더욱더 객관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성서의 언어를, 전통에 얽매인 관념이나 교리적인 관념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한 선입견은 사실상 우리로 하여금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과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갖게 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구 조사를 할 때 단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만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단지 그 정도밖에 보고 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규명하면 어떻게 되지?’하고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을 지지하기 위해 어떤 것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며 어떤 것이 부적합한지 그것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내가 만난 대부분의 신학자는 희랍어를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 왕국 행간 번역」에 나타난 희랍어 학식 수준은 상당히 높다. 이 책은 희랍어를 진정으로 연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비록 희랍어를 잘 모른다 할지라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상당히 과소 평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워치 타워 협회’의 보석과 같은 출판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것에 관해서 얘기해 보자. ‘워치 타워 협회’의 이러한 학술적인 저작물들—특히 희랍어와 관련된 것들—을 통한 온갖 도움 외에도 시기 또한 나에게 작용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1968, 69, 70년의 해들—그 당시 세상이 어떠했는지 기억하는가?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국가와 지배 계층이 하고 있는 일들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히피 운동에 동조했다. 그러나 한편, LSD를 복용한다든가 마리화나를 피운다는 생각도 좋아하지는 않았다. 히피들에게는 진정한 해결책이 없었다. 지배 계층에게도 해결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런 와중에서 더 나은 해결책, 더 큰 의의, 더 큰 어떤 목적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직업이 가르치는 일이든 보험을 장려하는 일이든 또는 그밖의 어떤 일이든 간에 단순히 그런 일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인생은 단순히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위해 일류 사립 학교에 들어가서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런 길을 걸어봤지만, 여전히 무엇인가 부족을 느꼈다. 나는 판에 박힌 듯한 틀을 벗어나 그보다 좀더 큰 것, 진정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성서 진리에서 찾았다. 성서 진리는 그 모든 것—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진리는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 사람들이란 자동차 수리공, 도랑 파는 사람, 철도 기관사 등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었으며, 내가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잘 알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예수께서 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었다. 그분은 사람들과 관련을 맺으셨으며, 그들의 필요에 응하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의 서한의 많은 부분은 사람이 사람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문제에 관한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번은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만약 그들이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에 마구 집어넣기 시작한다면, 나는 그곳에 들어가서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 나도 넣어 달라!’

또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일어서서 계수되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 나에게는 한 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다. 박해를 가하는 제도에 속하든지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속하든지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서 원칙을 적용하며 의를 옹호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계수되고 싶었다.

나는 과학적이고 지적인 부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시간을 바쳤다. 이제는 마음이 감동을 받아 움직일 차례가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실생활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은 어떤 날짜 때문이거나, 아마겟돈 때문이 아니었다. 재앙을 모면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도 아니었다. 내 마음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이 옳다. 이쪽에 있는 다른 집단들은 틀렸다. 나는 옳은 쪽에 속하고 싶다.

어느 날 아침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데 이런 모든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마음 속으로 헌신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나는 마음의 문제에 이르기 전에 지적인 부면을 집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이것은 나의 헌신을 지식에 기초한 견고한 믿음의 터전 위에 세워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다음 성귀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요한 17:3, 신세.

이렇게 해서 내 인생은 이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지금은 사랑—여호와께 대한 사랑, 예수에 대한 사랑, 여호와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니컬러스 킵의 체험담.

[각주]

a A. T. 로버트슨저 1934년판 「역사 연구를 통한 희랍어 신약 문법」 879-80면; H. E. 대너저 1957년판 「희랍어 신약 문법 교본」 183면; 또한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1984년판 1582-3면, 부록 6F 참조.

[11면 삽입]

그 “낱말의 뜻은 분명히 ‘말뚝’이지. 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스타우로스에서 ‘십자가’라는 의미를 끄집어냈는지 모르겠어”

[12면 삽입]

그들은 자신의 선입견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것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며 어떤 것이 부적합한지 그것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14면 네모]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신세계역」에 대한 희랍어 학자들의 논평

“나는 여러분의 전도 사업과 그 사업이 수행되는 세계적인 범위에 관심이 있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편견없는 솔직하고 활기찬 번역을 볼 때 무척 기쁩니다. 그것은 진지하게 연구해서 얻은 깊고 광범위한 지식을 훌륭하게 전시한 작품이라고 나는 공언할 수 있읍니다.”—「미국역」의 희랍어 “신약 전서”의 역자, 에드가 J. 굳스피드의 1950년 12월 8일자 서신.

“이 번역판은 희랍어 원문의 참다운 의미를 영어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 한도로 전달하려고 노력한 아주 능숙하고 총명한 학자들의 작품임에 틀림없다.”—히브리어 및 희랍어 학자 알렉산더 톰슨. 「디퍼런시에이터」 1952년 4월호 52-57면.

“이 신약 성서 번역판은 성서 번역상의 많은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학자들이 바로 우리 시대에 활약하고 있다는 증거이다.”—「앤도버 뉴튼 쿼털리」, 1963년 1월호.

“이 신약 성서 번역판은 위원회를 구성하는 번역 위원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러나 희랍어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갖춘 번역 위원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앤도버 뉴튼 쿼털리」, 1966년 9월호.

“이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행간 번역이 아니다. 희랍어 원문이 원래의 상태 그대로 실려 있고, 각 행 밑에 적혀 있는 영어는 단순히 희랍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 이 번역판을 한부 검토해 본 후, 나는 희랍어에 관심이 있는 2년째 된 여러 학생이 이 번역판을 보조 교재로서 한부씩 갖추도록 했다. ·⁠·⁠· 익명의 위원회에 의해서 번역된 이 번역판은 철저히 현대 영어를 사용하며 일관성 있는 정확성을 기하고 있다. 요컨대, ‘증인’이 찾아와 문을 두드릴 때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나 희랍어를 공부하는 학생이나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이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그 ‘증인’을 초대해서 이 행간 번역을 한부 주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네브라스카 대학교 토마스 N. 윈터 교수의 「희랍어 성경 왕국 행간 번역」에 대한 평에서, 「클래시컬 저널」지 1974년 4-5월호.

[10면 삽화]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는 니컬러스 킵

[13면 삽화]

「왕국 행간 번역」을 찾아보고 있는 니컬러스와 그의 아내 수잰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