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자녀를 잃는 슬픔
자녀를 잃는 슬픔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서, 그처럼 사실에 입각한 실제적인 기사를 써주신 여러분께 정말 찬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한국어판은 1987년 8월 15일호) 슬프게도 아내와 나는 최근 다섯살 반 된 아들을 심장 마비로 잃고 말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말한 내용을 모두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죄책감이나 분노 등과 같은, 여러분이 그 기사에서 열거한 모든 감정을 경험했읍니다. 또한 우리는 “언제나 위로가 되지는 않는 표현들”을 모두 겪어 보았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읍니다. 우리는 신세계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오직 우리 어린 아들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게 될 때에만, 마음의 상처가 실제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에서 우러난, 이해심 있는 일련의 기사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 기사 내용을 적용하여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K. I., 영국
자녀를 잃는 슬픔을 극복하는 일에 관한 귀지의 기사에 대해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작년 8월에 우리 아들이 자살을 했읍니다. 귀지에 실린 내용은 감정의 평온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읍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읍니다. 그러나 자녀의 사망 이후에 사람들이 겪게 되는 여러 단계에 대한 지식은 필요한 내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15면에 실린 내용처럼, 어떻게 자살을 평범한 죽음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읍니다. 물론 평범하게 여길 만한 죽음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자살의 경우에는 언제나 부활의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아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될는지 모르겠군요.
J. D., 미국
자살을 한 소년, 조지에 대한 기사가 실린 이유는 자살이 평범한 죽음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지의 아버지가 그처럼 엄청난 비극을 어떻게 특정한 성귀에 나오는 위로의 말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읍니다. 물론, 자살을 하는 것이 매우 심각하고 비극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을 올바르게 조정하실 것임을 항상 확신할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책임의 정도, 회개의 가능성 등, 관련된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뜻과 조화되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자비를 나타내실 것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읍니다.—편집자.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
“세계 평화—언제, 어떻게?” 기사에 실린 내용에 관해서 편지를 드립니다. (한국어판은 1987년 6월 15일호) 그 기사에는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한 내용이 있읍니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여하한 환경하에서도 동료 인간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자신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완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H. N., 미국
‘동료 인간을 죽인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시사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손상시키거나 죽일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공격자로부터 도피할 수가 없는 경우, 그 그리스도인은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 행위로서 타격을 가하기도 할 수 있을 것이며, 혹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손에 쥐고 있는 어떤 것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단지 방어 수단으로 그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격자를 죽이거나 구타하려고 하지 않으며, 다만 그 공격을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공격자가 치명타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발 사고여야지 의도적으로 가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