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희생은 풍부한 보상을 가져온다
“희생은 풍부한 보상을 가져온다” (한국어판은 1987년 9월 1일호) 기사에 실린 리넷 시그의 경험담에 대하여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그 부인이 나타낸 것과 동일한 정신 태도를 가질 수만 있다면 좋겠읍니다. 나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늘 투덜거리는 사람입니다. 오만하기도 하고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정말로 보다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점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리넷의 체험담이 도움이 되었읍니다.
K.W., 일본
수음
수음에 관한 여러분의 기사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한국어판은 1987년 9월 15일호) 수음이 성욕을 없애 줄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는데, 이제 그 기사의 도움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그 기사를 읽고 난 지금 나는 이 나쁜 습관을 반드시 극복할 것이며 그렇게 하여 고린도 후서 7:1의 말씀을 이행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J.T., 미국
수음에 관한 그 기사는 그 습관이 잘못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은 별로 주지 않습니다. “지체를 죽이라”고 촉구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은 없읍니다. 그 문제를 대처하는 방법에 관한 실용적인 제안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읍니다.
S.J., 미국
그 기사는 그 주제로 발행되는 세 기사 중 첫 번째 기사였읍니다. 두번째 기사는 1987년 11월 8일호 (한국어판은 1987년 11월 15일호)에 “청소년은 묻는다 ··· 수음을 피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라는 제목으로 실렸읍니다. 세번째 기사는 1988년 3월 8일호 (한국어판은 1988년 3월 15일호)에 실릴 것인데, 그 제목은 “청소년은 묻는다 ··· 어떻게 수음의 습관과 싸울 수 있는가?” 입니다. 두번째와 세번째 기사에는 요청하신 실용적인 제안이 들어 있읍니다.—편집자.
수음에 관한 여러분의 기사를 읽고 매우 착잡하였읍니다. 나는 수음을 행하면서도 죄책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읍니다. 그 기사를 읽고 생각하게 된 것은 ‘만일 수음이 잘못이라면, 우리들처럼 너무 어려서 결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 나이에 매우 흔한 성욕을 어떻게 달래란 말인가? 더구나 수음의 “교육적” 가치 즉 청소년이 성적 절정감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신체 기관의 본래 기능을 이해하게 되는 측면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하는 점이었읍니다.
T.D., 브라질
우리의 첫 번째 기사에서 설명하였듯이, 수음은 성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극합니다. 성서의 교훈은 ‘사욕 [성욕, 신세]과 같은 지체를 죽이라’는 것이지, 욕망에 부채질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골로새 3:5)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는데, 그로 볼 때 어떠한 육체적인 욕망에도 절대로 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5:23-25은 그리스도인이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제를 포함한 성령의 열매를 배양하도록 촉구합니다. 수음은 청소년이 성적 절정감을 아는 데 필요한 방법이 아닙니다. 신체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것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그러한 신체적인 변화에 관하여 미리 자녀를 교육해야 합니다. 더우기 수음은 결혼 생활에 대비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이기적인 만족에 관심을 모으게 합니다. 그것은 미래의 결혼 배우자를 즐겁게 하도록 준비시켜 주지 않습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