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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 독일에서 박해를 살아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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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 독일에서 박해를 살아 남음
  • 깨어라!—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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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8
깨88 11/1 18-21면

나치 독일에서 박해를 살아 남음

한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극적인 박해의 시기가 전개되었던,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일로 독자를 안내하고자 한다.

나의 부모는 1919년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헌신하였다. 이듬해에 내가 태어났고, 나의 동생 요하네스는 1921년에, 에파는 1922년에 그리고 끝으로 게오르게가 1928년에 태어났다.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리던 그 당시에, 우리가 살던 도시 비텐베르게에는 성경 연구생의 자녀가 우리들뿐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 곧 나치들이 1933년에 권력을 장악했을 때, 많은 교사들이 나치 당원이 되었다. 나는 “하일 히틀러!”라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히틀러 소년단원인 급우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성서를 포함하여 나치들이 금지한 출판물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하지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을 때, 나를 괴롭히는 일은 절정에 달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의 동생 요하네스는 “하일 히틀러!”를 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체 학급 앞에서 뺨을 얻어 맞았다. 어머니는, 나치 통치 초기에 루돌프 헤스와 국무 장관인 프리크 박사가 그런 자유를 공개적으로 옹호한 바 있는 숭배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법을 언급하면서, 교사가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없다고 항의하였다.

교사는 어머니의 말을 묵살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총통이 권력을 잡았으니, 모두는 서둘러 대열에 가담하는 것이 좋을 거요!” 그리고 나서 교사는 이와 같이 소리쳤다. “당신과 당신 가족이 망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소!”

어머니는 교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응답하였다. “진크네히트 씨, 결정하실 분은 하늘과 땅의 하나님 여호와이시지, 당신이 아니예요!”

우리 가족에 대한 박해

그후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더니 불쑥 “우린 다니엘의 사자 굴에 던져졌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아무런 통고도 없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뚜렷한 생계 수단이 전혀 없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식품을 가져다 주었고, 더러는 밤중에 조심스럽게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나중에 진공 청소기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일을 하면서 당시에 금지된 워치 타워 출판물을 배부하기도 하였다.

1936년에 독일 밖에 있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은 히틀러 정부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학대를 중지하라고 경고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독일에 있는 우리 증인들은 1936년 12월 12일, 오후 5시부터 7시 사이에 전국적으로 결의문을 배부하였다. 나는 바로 그때에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2월에 나의 부모는 베를린에 있는 존더게리히트(특별 재판소)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혐의 내용은 금지된 조직의 출판물을 배부하였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우리 자녀 네명 모두 비텐베르게 지방 법원에 출두하라는 내용의 또 다른 소환장이 날아왔다.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우리 부모가 우리들에 대한 영적 부양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터무니 없는 주장인가!

법원 관리들은 당시 16, 15, 14, 8세 된 어린 우리들이 성경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변호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하일 히틀러”란 말이 “구원은 히틀러로부터 온다”는 의미란 것을 지적하였고,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런 구호를 사용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우리를 우리 부모로부터 빼앗아 베를린 근처의 슈트라우스베르크에 있는 감화원으로 보내도록 판결하였다.

우리가 붙잡혀 가기 전에, 부모는 우리 자녀들을 철도역으로 데리고 가서 볼펜부텔에 있는 할머니에게로 보냈다. 부모는 자신들에 대한 재판이 미결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으며, 결과를 두려워하였다. 역 플랫폼에서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서 아주 확고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우리보다 더 잘 보호해 주실거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느낀 까닭에, 부모는 우리를 부둥켜 안고 이사야 40:11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인용하였다.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리로다.]” (사체로는 본지에서.) 우리는 크게 위안을 느꼈다.

아주 깜짝 놀랄 만하게도, 부모에 대한 소송은 증거 부족으로 기각되었다.

나치들로부터 도망함

얼마 안 되어 나치들은 또다시 어린 우리들을 뒤쫓았다. 나치들은 우리의 “견해”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우리들과 만나기 위한 조처를 하였다. 나치들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볼펜부텔에 있는 할머니를 떠난 다음 서로 헤어져서 각각 다른 곳에 거처를 정했다. 나는 라인란트에 있는 호텔, 뒤스부르거 호프의 프런트 데스크 사무원 일자리를 구했다.

어느 날 호텔에서는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 일행의 방문을 흥분 속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였을 때,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나를 제외하고—경례를 하고, 관례적인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고위직 관리 중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나중에 뒷방에서 나와 대질하였다. 나는 “이번엔 끝장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그를 불러냈다. 분명히 괴벨스 박사가 그를 급히 찾았을 것이다. 나는 커다란 호텔의 여러 복도 가운데 하나로 재빨리 사라져서, 그날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1943년 말경, 도시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폭격 후의 청소와 복구 작업을 거드는 일에 처음으로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사용되었다. 호텔에도 일부 창문들과 문들의 수리가 필요하여, 죄수들이 그 일을 하도록 할당되었다. 나는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임을 식별시켜 주는, 그들의 줄무늬 상의에 있는 자주색 삼각 표시를 보고 흥분하였다! 불행스럽게도,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SS 친위대원들은 나를 향해 총을 겨누면서 “저리 비켜!”라고 소리쳤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당시의 끔찍한 세계 상태로 인해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아마겟돈에서 끝나고 말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때 연합군이 독일로 진군하고 있다는 정보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치 폭정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뻐하기 시작했다.

전후 기간

연합군 점령의 먼지 구름이 가라앉은 후, 형제들은 공개 전파 활동을 재조직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 가족도—장장 10년 동안 헤어져 있고 나서—재결합을 하여, 독일 북부의 하노버에서 살고 있었다. 전후 첫해인 1946년에, 우리는 하노버에 있는 약 50명의 형제 모두가 참석하기에 충분한 크기였던 우리 집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최근에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 형제들과 교제하고, 기름부음받은 자들이 표상물을 취하는 것을 보는, 실로 기억에 남을 만한 기념식이었다! 그 일은 나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 주었다.

1946년에 우리는 또한 독일 북부에서 전후 최초의 대규모 대회를 가졌다. 즐거움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 연사들까지도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서 연설 도중에 간간이 말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랑하는 형제들이 주위에 철조망이 없는 가운데 평화스럽게 앉아서 교훈을 즐기는 것을 보았을 때,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후에 나는 파이오니아 대열에 참여하였으며, 인근 도시인 레르테에 임명되었다.

그곳으로부터 나는 비스바덴에 있는 독일 지부에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내가 1947년에 도착했을 때는 벧엘 가족 수가 20명도 못되었다. 우리는 임시로 큰 교외 주택에서 일하였는데, 장소는 비좁았다. 1952년에 나는 벧엘로부터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입학하라는 초대를 받았으며, 제 19기로 졸업을 하였다. 그후 나는 번역자로 계속 일하도록 비스바덴에 다시 임명되었다.

34세 되던 때인 1954년에, 나는 결혼하기로 결정하였다. 에디트는 파이오니아였으며, 또한 오페라 가수로서 얼마의 계약 의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우리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중세풍의 도시인 로르에 파견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임명이 또다시 변경되었다. 에디트가 우리의 아들 마르쿠스를 임신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전 시간 봉사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또 다른 아들 로이벤이 태어났다. 이제는 이 아들들이 34, 30세가 되었다. 토론토 북부의 온타리오 주, 손힐 회중에서 한 아들은 장로로 그리고 다른 아들은 봉사의 종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나는 그곳에서 주임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인내하는 자들을 축복하신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분의 백성은 나치 통치의 공포 가운데서 살아 남았으며, 증가된 신권적 봉사를 위해 재조직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치들에게 일어난 일을 유의해 보자. 나치들은 전쟁 전 초기의 몇해 동안, 뉘른베르크의 체펠린비제에서의 초창기 승리를 기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1946년 9월에 기억에 남을 만한 대회 장소로 바로 그곳을 사용하였다. 실로 절정을 이룬 일은 9월 30일, 월요일에 있었다. 그 도시의 사무실, 상점 및 음식점들은 모두 그 날에 문을 닫았다.

그러면 바로 그 월요일에 사업체들이 문을 닫은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범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발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9월 23일에 선고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9월 30일로 연기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들이 감금되어 판결문을 듣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다름 아닌 바로 그 날짜에, 전에는 나치들의 행진 광장으로 사용되던 곳에서, 이전에 박해받던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축하 행사를 거행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불공정하고 압제적인 이 제도에 대해 예언된 임박한 멸망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 결코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때는 “정녕 응”할 것이며, “결코 거짓되지 아니”할 것이다. 여호와는 충성스러운 분이시다. 그분은 시간을 완전히 통제하신다. 그러므로, “정한 때”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며, 그때 그분은 “정녕” 자신의 적들을 멸절하시어, 자신에게 영광이 되게 하시고 그분을 숭배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때는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하박국 2:3)—콘스탄틴 바이간트의 체험담.

[18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박해를 살아 남은, 콘스탄틴 바이간트와 그의 가족

[21면 삽화]

1937년에 히틀러에게 경례를 하는 나치들. 1946년에, 나치 지도자들이 선고를 받고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바로 이 뉘른베르크 스타디움을 대회장으로 사용하였다

[자료 제공]

U.S. Nation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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