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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7부: 1530년 이후—프로테스탄트교—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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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7부: 1530년 이후—프로테스탄트교—개혁인가?
  • 깨어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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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9
깨89 9/15 23-27면

과거로 비추어 본 종교의 장래

제 17부: 1530년 이후—프로테스탄트교—개혁인가?

“변혁이 곧 개혁은 아니다.”—에드먼드 버크, 18세기 영국의 하원 의원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회복하였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톨릭 학자들은 종교 개혁이 신학적 오류를 초래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교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참으로 개혁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변혁, 즉 그릇된 숭배 형태를 또 다른 그릇된 형태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한 지위를 얻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종교 개혁가들은 전승을 배척하였다. 그와는 달리 지난 세기중에 “점점 더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성서와 전승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자 했다”라고 「크리스천 센추리」지의 수석 편집자 마틴 마티는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조상들에게 있어서 “성서는 특별한 지위를 지닌 것이었으며, 전승이나 교황권은 결코 그것에 견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성서의 번역, 배부 및 연구에 대한 관심을 가속화하였다. 15세기 중엽—종교 개혁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하기 반 세기여 전—에, 루터와 같은 독일 사람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장차 도래할 프로테스탄트교에 하나의 유용한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구텐베르크는 활자 형태의 인쇄술을 개발하여, 최초의 인쇄본 성서를 생산하였다. 루터는 이 발명품이 커다란 가능성을 지녔다고 생각하였으며, 인쇄술을 가리켜 “참 종교를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최신 최상의 작품”이라고 불렀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성서를 소유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가톨릭 교회가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사태 발전이었다. 1559년에 교황 바오로 4세는, 교회의 승인 없이는 어떤 성서도 지역어로 인쇄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으며, 교회는 그런 일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1564년에 교황 비오 4세는 이렇게 단언하였다. “경험은 성서를 자국어로 읽도록 무분별하게 허락할 경우, ·⁠·⁠· 그로 인해 이득보다는 해악이 더 많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종교 개혁은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교”를 산출하였다. 종교 개혁은 교황의 권위를 개인의 자유 선택권으로 대치하였다. 가톨릭 미사가 프로테스탄트 예배식으로, 장엄한 가톨릭 대성당이 일반적으로 덜 형식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대치되었다.

뜻밖의 혜택

원래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녔던 운동이 종종 사회적,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역사는 가르쳐 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도 그런 경우임이 증명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역사 교수 유진 F. 라이스 2세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다. “중세의 서방 교회는 유럽의 단일 조직체였다. 16세기 전반부에, 그것은 많은 수의 지역 교회로 분열되었으며 ·⁠·⁠· [그에 대해] 세속 통치자들이 현저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이로 인해 “세속 권위와 교직 권위 사이의, 중세의 오랜 투쟁이 완결되기에 [이르렀다.] ·⁠·⁠· 힘의 균형이, 결정적이고 최종적으로, 교회로부터 국가로 그리고 사제로부터 평신도로 옮겨졌다.”

개인에게는 이것이 종교적인 면과 인권 면 모두에서 더 큰 자유를 의미하였다. 가톨릭교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교는 교리나 의식을 감독하는 중앙 기구가 전혀 없었으며, 따라서 종교적 견해가 광범위한 다양성을 지닐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종교 개혁 당시만 해도 여전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종교적 관용과 자유 분방한 태도가 점차 조장되었다.

더 큰 자유로 인해,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던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근대 사회를 도래하게 한 사회, 정치 및 과학 기술 면에서의 발전을 촉발하기 위해서 바로 그러한 자극제가 필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정부 체제와 일상 생활 양면으로 옮겨졌다”고 저술가인 고(故) 시어도어 화이트는 기술한다. 그는 이 윤리를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행위에 대해, 사제의 개입이나 중재 없이, 하나님 앞에 직접 책임을 진다는 신조”라고 정의한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밭을 일구며, 태만하거나 게으름 피우는 일 없이, 아내와 자녀를 돌보면, 부를 누리게 되거나 하나님이 그의 노력을 상주실 것이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교의 이러한 긍정적으로 보이는 부면 때문에 우리는 그 단점을 무시해야 하는가? 「종교 및 윤리 백과사전」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또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경우”이기도 하다면서, 이렇게 부언한다. “예수회와 종교 재판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지만 ·⁠·⁠· 여전히 더 열악한 것이 뒤를 따랐다. 중세에는 훨씬 정직한 무지가 있었다면, 이제는 훨씬 조직화된 거짓이 있게 되었다.”

“조직화된 거짓”—어떤 면에서?

프로테스탄트교는 교리의 개혁을 약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직화된 거짓”이었다. 흔히 종교 개혁가들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교회의 정책이었지, 교리의 거짓됨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프로테스탄트교는 가톨릭교의 이교에 물든 종교 사상과 의식들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어떻게 그러하였는가? 두드러진 예가 삼위일체 교리인데, 그 교리는 프로테스탄트 세계 교회 협의회의 회원이 되는 주된 기초이다. ‘오늘날 성서 해석 학자와 신학자들은 성서 어디에도 그 교리를 분명히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종교 백과사전」에서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리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강하다.

프로테스탄트교는 타락한 형태의 교회 정체(政體)를 개혁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교는 “중세 가톨릭교를 그대로 본뜬 권위를 행사”하였으며 “로마 가톨릭의 체제에서 분리되어 프로테스탄트식 변형을 이루었을 뿐”이라고 마틴 마티는 말한다.

프로테스탄트교는 또한 ‘믿는 것에서 하나됨’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분열된 여러 프로테스탄트 분파가 생기면서, 성서에 따른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에베소 4:13.

조직화된 혼란—그 이유는?

1989년인 오늘날, 프로테스탄트교는 너무 많은 분파와 교파로 분열되어, 전체 숫자를 가늠하기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숫자를 헤아리는 일을 끝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집단들이 형성되거나 다른 집단들이 사라진다.

그렇지만, 「세계 그리스도교 백과사전」은 (1980년 현재의) 그리스도교국을 “20,780개의 독립된 그리스도교 교파”로 구분함으로써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는데, 그 대다수를 프로테스탄트교가 차지하고 있다.a 그 중에는 7,889개의 전통 프로테스탄트 집단, 프로테스탄트교가 주축을 이루는 10,065개의 비백인 토착 종교, 225개의 성공회 교파 및 1,345개의 어중간한 프로테스탄트 집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건강의 표시이자 병의 표시”라고 불리는 이처럼 혼란스러운 다양성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교」(Protestant Christianity) 책은 그 현상이 “인간의 창조성과 인간의 유한성 때문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생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견해를 과대 평가하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라고 언급한다.

얼마나 참된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도 않고서, 교만한 사람들은 구원, 해방 혹은 성취를 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한다. 종교적 다원론은 성서에서 전혀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

종교적 다원론을 조장하는 데 있어서, 프로테스탄트교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숭배받고자 하는 방법에 관하여 전혀 지침을 세우지 않으셨다는 견해를 비치는 듯하다. 그와 같은 조직화된 혼란이, 성서에서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는 진리의 하나님과 일치하는가? ‘교회에 가고 안 가고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는 흔히 듣게 되는 프로테스탄트식 정신 태도는, 아담과 하와를 잘못된 신앙과 그에 따르는 재난으로 인도한 독립적 사고 방식과 그 무엇이 다른가?—I 고린도 14:33, 새번역; 참조 창세 2:9; 3:17-19.

성서의 특별한 지위를 무시하다

초기 종교 개혁가들이 성서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나중에 고등 비평을 창출하였으며 “따라서 성서 본문을 다른 여느 고대 문헌과 같이 취급”하였다고 마티는 말한다. 그들은 “성서 필자들의 영감받은 기록에 그 어떤 특별한 지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받은 기록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종교 개혁가들이 프로테스탄트교의 실제 기초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믿음을 침식하였다. 이것은 회의주의, 자유 분방한 사고 방식 및 합리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많은 학자가 종교 개혁을 현대 세속주의의 주원인으로 간주하는 것도 근거 없는 생각이 아니다.

정치에 몰두하다

위에서 언급한 열매는, 종교 개혁가 개개인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설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프로테스탄트교가 참 그리스도교를 회복시키지 못하였다는 분명한 증거다. 프로테스탄트교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통해 평화를 조성한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에 휩쓸렸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국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나라들로 분열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마자 분명해졌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십여 차례의 전쟁으로 유럽 대륙을 피로 물들였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그 전쟁들을 가리켜 “1520년대 독일과 스위스에서 있었던 종교 개혁으로 인해 불붙은 종교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삼십년 전쟁(1618-48년)인데, 이것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교인과 가톨릭 교인 사이의 정치 종교 양면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영국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1642년에서 1649년 사이에, 국왕 찰스 1세는 의회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국왕의 반대자들 대부분이 영국 국교회의 청교도측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쟁은 때때로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린다. 국왕의 처형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 아래 짧은 기간 지속되었던 청교도 자유 공화국의 설립과 더불어 전쟁은 끝이 났다. 이 영국 내전이 주로 종교적 투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가들은 진영을 정하는 데 있어서 종교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이 전쟁중에, 프렌드파 혹은 퀘이커교인으로 알려진 종교 집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집단은 프로테스탄트 “형제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다. 수백명이 감옥에서 죽었으며, 수천명이 모욕적인 일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심지어 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까지 널리 퍼졌는데, 1681년에 찰스 2세는 윌리엄 펜에게 아메리카에 퀘이커교의 식민지를 설립하도록 칙허장(敕許狀)을 발부해 주었다. 그 식민지는 나중에 펜실베이니아 주(미국)가 되었다.

개종자들을 찾으려고 해외로 눈을 돌린 종교는 비단 퀘이커교만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다른 종교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프로테스탄트 “변혁”이 있은 후에, 가톨릭 교인은 다수의 프로테스탄트 집단과 함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진리와 평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하려는 노력을 증가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인가! “믿는 자들”인 가톨릭 교인과 프로테스탄트 교인들도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공통된 정의에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형제로서의 평화와 연합을 나타내는 데 실패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과 ‘이교도’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본지 다음 호의 제18부를 읽어 보기 바란다.

[각주]

a 1982년에 발행된 이 참조 문헌은, 1985년까지는 그 수가 22,190개에 달할 것으로 어림잡으면서, “현재 새로운 교파의 실증가가 해마다 270개(매주 5개씩)”에 달한다고 알려 준다.

[26면 네모]

종교 개혁이 낳은 초기 교파들

성공회: 교리, 정책 및 예배식이 영국 국교회와 같으며 캔터베리 대주교의 명목상 지도력을 인정하는 25개 자치 교회와 그 밖의 6개 단체. 「종교 백과사전」은 성공회가 “주교들의 사도 계승에 대한 믿음을 지켜 왔으며 종교 개혁 이전의 많은 의식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고 알려 준다. 그 숭배의 중심은 “지역어로 된 종교 개혁 당시의 예배서로 아직까지 사용되는 유일한 것”인 「성공회 공도문」(The Book of Common Prayer)이다. 미국의 성공회 교인들은 1789년에 영국 국교회와 결별하고 미국 성공회를 설립하였으며, 1989년 2월에는 성공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다시 한번 전승과 결별하였다.

침례 교회: 물에 완전히 잠기는 성인 침례를 강조했던 16세기 재세례파(재침례파)에서 생겨난 369개 교파(1970년). 「종교 백과사전」은 침례교인들이 “조직적 혹은 신학적 연합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려 주면서, “미국의 침례교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지만, ·⁠·⁠· 대가족을 이룬 다른 많은 종교의 경우와 같이, 일부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라고 부언한다.

루터 교회: 프로테스탄트교의 그 어느 집단보다도 전체 신도 수가 가장 많다고 자랑하는 240개 교파(1970년). 「세계 연감 및 사건 기록 1988년」(The World Almanac and Book of Facts 1988)은 그 교파들이 “아직도 민족 계열(독일, 스웨덴 등)에 따라 상당히 분열”되어 있다고 알려 주면서, 하지만 “주된 분열은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분열”이라고 부언한다. 루터교인들이 국가 진영으로 분열되는 일은 제 2차 세계 대전중에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미국 루터 신학교의 E. W. 그리치가 말하는 대로, 그때 “[독일에 있는] 루터교 목회자와 회중의 극소수가 히틀러에 저항했지만, 루터교인의 절대 다수는 침묵을 지키거나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감리 교회: 1738년에 존 웨슬리가 주창한, 영국 국교회 내부의 한 운동에서 비롯된 188개 교파(1970년). 그가 죽은 후에 별개의 집단으로 떨어져 나왔다. 웨슬리는 감리교인을 “성서에 규정된 방법대로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개혁 교회와 장로 교회: 개혁 교회(1970년 현재 354개 교파)는 교리 면에서 루터파보다는 칼뱅(캘빈)파에 더 가까우며, 스스로를 “개혁된 가톨릭 교회”로 간주한다. “장로교”란 장로들이 관리하는 교회 정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장로 교회는 모두 개혁 교회이지만, 개혁 교회라고 해서 모두 장로교식 정체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23면 삽화]

아름답게 장식된 구텐베르크 라틴어 성서의 지면

[자료 제공]

영국 도서관의 허락하에 게재함

[24면 삽화]

구텐베르크와 그가 발명한 활자 인쇄기

[25면 삽화]

존 웨슬리, 감리 교회의 설립자 (1738년)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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