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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제 불능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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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1
깨91 2/1 4-7면

통제 불능 세상

사람은 참을성 없이 즉석 만족을 추구하는 일로 인해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생태계: 사람은 환경을 마구 황폐시킨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필경 재난이 따른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땅의 자원을 착취하면서 오염을 막는 일은 별로 하지 않을 경우 산업체와 정부가 돈을 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보호론자들이 항거하는데도 불구하고 착취는 계속된다.

경제: 세계 도처의 나라들은 갈수록 돈을 더 많이 빌리며 당장의 경제 필요를 위해 부채 더미에 올라 앉는다. 그런 나라들은 경솔하게도 경제 전문가들의 준엄한 경고—그 모든 부채에 대한 이자는 나중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는 혹은 세계적 부채를 기초로 삼은 세계 경제는 심상치 않게 흔들리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들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붕괴될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한다.

도덕: 마약·알코올 남용자, 도박꾼, 온갖 유형의 범죄자들, 간음자, 음행자—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그들은 서로 다른 무리지만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즉 무엇인가를 지금 당장 원하는 사람들이다! 원하는 것이 성(性)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혹은 단지 환각이든 많은 사람은 그처럼 덧없는 쾌락을 위해 결혼, 가정, 양심, 재정적 안전, 건강, 명망, 심지어 생명을 기꺼이 내던진다.

오늘날의 세상을, 유치할 정도의 탐욕에 지배되는 통제 불능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세상에 매우 만연되어 있는 근시안적 태도와 성실하게 싸운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원대한 시각과 자기 제어력을 침식시키는 세력이 훨씬 더 강력하고 더 팽배해 있다.

침식시키는 영향력

현대인, 특히 보다 산업화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선전의 홍수 속에 산다.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잡지, 신문, 그 어느 것이든 즉석 만족을 교묘하게 조장한다.

광고 매체들은 하염없이 계속 사라고—크레디트 카드를 사용하여 바로 지금 당장 살 수 있다고 외쳐댄다. 전화 한 통화면 무수히 많은 물건을 구할 수 있다. ‘지불 걱정은 나중에!’라는 광고는 안심시키려는 제안인 것 같다. 그런 광고는 감각을 유도하기 위해 불가사의할 정도의 기술로 고안된 것이다. 잡지를 들여다보면 향기의 물결이 독자를 휩싼다. 라디오를 틀면 며칠 동안 끈질기게 뇌리를 맴돌 광고음이 나온다. TV를 켜면, 휘황찬란한 영상이 시청자를 옴쭉 못하게 한다. 음악 비디오 형태로 나오는 그런 영상은 흘끗 보기만 해도 여지없이 주의력을 사로잡으며 스쳐간다.

텔레비전은 즉석 만족을 광고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그런 만족을 분배하기까지 한다. 버튼 하나를 누르기만 하면 즐거움을 맛보려는 충동을 만족시켜 준다. 자신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을 보여 줌으로써 흥취를 맛보게 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를테면 행동파 사람은 자신의 적수가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될 경우 폭력을 휘두른다. 조숙한 어린이는 버릇없는 농담으로 부모를 창피스럽게 한다. 감각에 치우치는 낭만적인 사람은 쉽사리 간음이나 혼전 성관계에 빠진다. TV는 그런 인물들이 자제력이 부족하다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력적인 인물로 미화하며, 극적 영광을 듬뿍 받게 하거나 승인의 표시로 일제히 가장된 웃음을 선사한다.

그와 비슷하게, 최근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 Monthly)지의 한 기사는 오늘날의 할리우드 영화가 “매순간에 만족을 짜내려고 교묘하게 기획된 흥행물”로서 “영화마다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다!’고 거듭 외쳐댄다”고 말하였다. 오늘날의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 폭력을 능가하는 것은 결코 없는 것 같다. 과거의 영화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발길질에 가담하려는 충동을 억누르게” 하였는데, “반대로 현재의 폭력 영화는 주로 관객으로 하여금 죽이고 때리고 사지를 절단하는 느낌을 맛보도록 부추기는 데 사용된다”고 그 기사는 질책한다. 사실, 영화에서 행동과 폭력이 줄거리와 대사를 상당히 밀어냈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화는 상영 시간은 그대로지만 대본은 1940년대보다 25퍼센트나 짧아졌다.

세계 종교들은 인간성을 오도된 ‘순간 열중’에서 벗어나게 하여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이상적인 위치에 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종교 지도자들 자신이 즉석 만족을 추구하는 데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계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하거나, 도덕 표준을 묽게 하여 고집 센 양떼의 환심을 사려고 하거나, 심지어 성서를 의로운 겉치레로 내세우면서 뒤로는 제멋대로 위선적 행동을 하는 것에 관한 기사를 자주 대하게 되지 않는가? 그런 종교 지도자들은 즉석 만족의 흔한 실상—죄의 매력의 일부—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도덕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죄의 개념을 부드럽게 하며, 죄의 정의를 ‘유전상의 문제’ 그리고 ‘대체 생활 방식’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고쳐 놓는다.—8면 네모 참조.

그 추세를 막는 도구

세상 분위기가 그러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 어떻게 즉석 만족의 미끼에 무턱대고 걸려드는 일 없이 결정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답변이 조금 놀랍게 여겨질지 모르나, 성서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의 짐작과는 달리, 성서는 쾌락을 금하지 않는다. 성서는 고행이나 엄격한 금욕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성서는 우리에게 쾌락을 적절한 위치에 두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성서는 창조주를 ‘자기 행사를 인하여 즐거워하시는’ “행복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디모데 전 1:11, 신세; 시 104:31) 사람과 관련하여 전도서 3:1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중에는 웃을 때, 춤출 때, 안을 때, 사랑할 때가 포함된다고 이어지는 구절은 알려 준다. 잠언 5:18, 19에서는 남편들에게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말하여 부부간의 성적 쾌락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만족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며, 온갖 형태의 만족을 독단적으로 배격해야 하는 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흔히 자제라는 요소가 생략된다.—갈라디아 5:22, 23.

우리는 자신의 쾌락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우선 순위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쾌락보다 분명히 앞자리에 와야 한다. 그것은 우리 생활에서 첫째 자리에 와야 한다. 그 다음 자리에 동료 인간에 대한 원칙에 근거한 사랑이 와야 한다. (마태 6:33; 22:36-40)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만족을 그러한 두 가지 우선 순위 다음 자리에 둘 것이다.

성서에 근거를 둔 우선 순위는 또한 필요할 경우 우리가 만족을 단호히 거절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술취함, 간음, 음행, 도박, 탐욕, 마약 남용, 폭력을 배격할 것이다. 이러한 죄는 각기 그 나름대로 즉석 만족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한 죄를 금하는 하나님의 법은 분명히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다. 장기적으로 볼 때, 죄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최악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질병, 가정 파탄, 빈곤일 수 있다. 죽음처럼 최종적인 것 혹은 천박하고 성취감 없는 생활처럼 비참한 것일 수 있다.

훌륭한 본을 따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그렇게 생활한 남녀들의 본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경우 그런 사람들은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의 만족을 유보하였다. (참조, 히브리 11장) 이 점에 있어서 모세는 잘 알려진 본이다. 모세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삶이 열려 있었다. 그가 파라오의 궁에 계속 살았더라면 권력, 영향력, 부, 필시 성적 쾌락을 누릴 풍부한 기회, 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세는 멸시받는 노예 민족 이스라엘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1:25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고 대답한다. 모세는 즉석 만족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며 덧없는 것임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순간의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집중하였다. 히브리서 11:26에서 “[그가]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하는 바와 같다. 모세는 그 상을 실제적인 것으로 그리고 상을 주시는 분을 실재하시는 분으로 여겼다. 27절에서는 “[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알려 준다.

모세가 내린 결정을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자기라면 부와 권력과 명예를 택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모세가 즉석 만족의 행로를 택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그를 알기라도 할 것인가? 그의 이집트식 이름이 박물관의 갈라지고 패인 돌조각, 고작해야 몇몇 고고학자들에게나 알려진 보잘것없는 파편에 상형 문자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혹은 그보다 더 가능성 있는 것으로서, 34세기 전의 흙과 모래 속에 묻혀 잊혀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의 상은 무엇이었겠는가? 모세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손쉬운 행로를 택했다면 여호와의 기억 속에 확실하게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모세라는 이름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에게 고무적인 힘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다. 우리의 미래 역시 보장될 수 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격려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생활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가져야 한다는 세상의 선전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자문해 보자. ‘내가 원하는 것은 창조주가 내게 원하는 것과 일치한 것인가?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나의 영적 추구를 뒷전에 두는 것인가? 어떤 면으로든 나의 상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벗들과 가족에게 어떤 종류의 본을 세우고 있는가?’

하나님의 원대한 지혜를 버리고 이 세상의 근시안적 태도를 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잠깐의 쾌락을 위해 지속적인 행복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일시적인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무튼 우리의 창조주는 우리에게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만족을 베푸신다. 시편 145:16에서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이러한 만족 중에는 즉시 맛볼 수 있는 것도 있고, 시간과 참을성을 요하는 것도 있다. 여호와를 섬기는 삶은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다. 아름다운 창조물, 따사로운 벗관계, 해볼 만하고 보람 있는 일의 즐거움, 생활상의 매우 당혹스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배우는 기쁨이 있다. 그 외에도 창조주는 우리에게 영원히 만족을 줄 생명을 베푸신다.—요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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