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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퍽 섬—유형 식민지에서 관광객의 낙원으로
  • 깨어라!—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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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2
깨92 1/15 14-17면

노퍽 섬—유형 식민지에서 관광객의 낙원으로

「깰 때이다」 뉴질랜드 통신원 기

백오십여 년 전 노퍽 섬의 해안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사람들—유형수—이었다. 이 섬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송되는 범죄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유형 식민지였으며 영국 역사상 가장 가혹한 유형지에 속하는 곳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 오늘날에는 해마다 2만여 명의 관광객이 낙원과 같은 이 섬을 방문한다.

그러면 노퍽 섬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유형 식민지에서 관광객의 안식처로 바뀌게 되었는가? 무슨 특이한 사건들이 이 섬의 역사를 장식해 왔는가? 노퍽 섬은 오늘날 관광객들을 위해 어떠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가?

방문하기에 앞서 이 섬의 다채로운 역사를 공부하면서 기대가 부풀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은 1774년에 광활한 태평양의 남서쪽 끝부분에서 항해하던 유명한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자기가 찾던 “거대한 남쪽 대륙”이 아니라, 화산의 노출 부분인 5 × 8킬로미터의 작은 섬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 섬은 남쪽으로 뉴질랜드까지 수백 킬로미터 뻗어 있는 등성이의 일부다. 쿡은 노퍽 공작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명명했다.

“고난의 섬”

「노퍽 섬과 그 주민」(Norfolk—An Island and Its People)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노퍽은 매우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가자 오래지 않아 수평선상에 먹구름이 낄 때처럼 혼란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혼란의 씨는 쿡이 섬을 발견한 지 약 14년 후 필립 킹 중위가 영국 정부를 위해 이 섬을 확보하기 위해 섬에 정착했을 때 심어졌다. 그의 두 번째 목적은 불길한 것으로서 유형 식민지를 세워 영국 교도소의 초만원 현상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그 교도소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1814년에 폐기되었지만, 1825년에 재설립되어 다양한 범죄자를 유치했다. 그중에는 위험한 범죄자도 있었고, 정치범도 있었으며, 매우 사소한 비행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고국에서 이송되어 구치된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해서, 태평양의 평화로운 낙원으로 남을 수 있었던 섬이 1854년에 다시 버려질 때까지 30년 동안 “고난의 섬”으로 변모되었다.

“고난의 섬”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노퍽 섬 발견」(Discovering Norfolk Island) 책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도소]장이 바뀜에 따라 상태가 달라졌다. 친절하고 관대한 체제에 이어 극도로 가혹하고 억압적인 체제가 들어서는 일이 흔했다. 그 기간의 역사는 살인과 폭동의 이야기 그리고 탈출하려다 실패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공하기도 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일에는 처형과 태형이라는 징벌이 따랐다. 1839년에 교도소장 토머스 분베리 소령은 탈출하기 위해 배를 탈취한 다섯 사람에 대해 각각 300대씩의 태형을 명령했지만 행실이 좋은 수감자들에게 상을 주는 제도를 제정하기도 했다.”

감방들과 병영과 그 밖의 구조물들을 포함한 유형 거주지가 죄수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구조물들은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보전되어 있어서 이 섬의 독특한 역사에 이바지한다. 나는 남반구에서 가장 훌륭한 조지 왕조풍 건축물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 벽들과 건물들 사이로 걸을 수 있었다. 그것을 둘러보면서 15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 교도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노퍽 섬과 반란

노퍽의 공동 묘지를 이리저리 다녀 보니 이 섬의 특이한 역사를 더욱더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천이라는 성이 묘비에 흔히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방문중에 종종 지방 주민들이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소속된 종교를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바운티호라는 군함과 거기서 일어난 반란에 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사건은 셀 수 없이 많은 책 그리고 적어도 세 편의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서로 적수인 두 주인공, 블라이 선장과 그의 젊은 부관 플렛처 크리스천도 동일하게 잘 알려져 있다. 1789년 4월, 타히티를 떠난 후 크리스천과 그의 동료 반란자들은 블라이와 충성스러운 선원 18명을 작은 배에 태워 표류하게 하였다. 바다에서 7주 동안 두려움 속에 지내면서 항해 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위업에 속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항해를 한 후, 블라이와 그의 일행은 버려진 지점에서 서쪽으로 거의 6400킬로미터나 되는 티모르—현재는 인도네시아의 일부—에 상륙했다. 블라이는 그후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으며, 반란자 중 세 사람은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한편 바운티호에 탄 채 타히티로 돌아간 플렛처와 여덟 명의 동료 반란자 그리고 19명의 남녀 타히티인은 보복을 면하기 위해 멀리 항해했다. 1790년에 그들은 타히티에서 남동쪽으로 2200킬로미터 떨어진 외딴 핏케언 섬에 도착했다.

핏케언 섬은 여러 형태로 반란자들을 응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섬 생활은 불편을 주었다. 질투가 폭력과 죽음을 불렀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과 그에 따른 곤경들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연명해 가면서, 그 “이민단”은 살아 남았다. 당시로서는 1856년에 그들의 후손이 서쪽으로 약 7000킬로미터 떨어진 노퍽 섬에 정착할 기회를 가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핏케언에서 노퍽으로

1990년 6월 8일, 노퍽 섬에 동이 틀 무렵 날씨는 춥고 비가 내렸다. 그러나 그러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섬 주민들은 19세기 중엽의 옷을 다채롭게 차려 입고서 연례 바운티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부둣가에 모였다. 나는 관심을 가진 관찰자로서 선원들이 134년 전인 1856년에 있었던 상륙을 재연하면서 풍랑과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해는 반란이 있은 지 67년이 경과한 때였다. 그때에 193명의 핏케언 섬 사람이 노퍽 섬의 새로운 거처로 이주했다. 일부 사람은 나중에 돌아갔으며, 그래서 핏케언에는 오늘날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노퍽의 새로운 정착자들—유럽인과 타히티인의 혈통을 함께 지닌 강인한 민족—은 사납고 반항하는 반란자들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굳게 뭉치고 종교적이며 우호적인 공동 사회를 이루었다. 농업과 어업이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그들은 핏케언에서의 경험을 통해 계속 고립된 상태에서 자급 자족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수심이 깊은 항구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배를 통해 외부 세계와 최소한의 접촉을 하기조차 어려웠다.

공항과 변화

남태평양의 섬 나라들 중 매우 많은 경우가 그러하듯이, 제2차 세계 대전은 노퍽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공항 건설이었다. 공항으로 인해 외부 세계와 빈번한 접촉이 있게 되었으며, 현재 이 섬의 주된 수입원인 관광업이 생겨났다.

우리 일행이 노퍽 공항에서 내리기 전에, 정부 관광국의 현지 대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 주었다. “주의해서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동물이 우선입니다.” 가축이 도로를 어슬렁거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오는 방문객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방식에 매료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면세 쇼핑 그리고 초기의 유형 식민지와 나중에 바운티호에서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독특한 역사도 마음을 끈다.

섬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광업에 의존함을 시인하지만, 최근 관광업의 성장 추세는 자급 자족을 더 많이 하던 지난날을 향수에 젖어 회상하는 노퍽의 오래 된 주민들 중 일부 사람에게 골칫거리다. 한 주민에게 지난날을 그리워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수확한 것을 함께 나누었지요. 지금은 모든 것을 돈을 위주로 합니다.”

“와타위에 유”

어느 날 오전 호별 봉사를 하면서 위와 같은 인사를 받았다. “와타위에 유”(What a way you)는 “안녕하세요?”(Hello; how are you?)로 번역된다. 노퍽 섬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어가 사용되지만, 1856년의 이주민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즐겨 쓰는 언어를 가지고 왔다. 옛 영어와 타히티어가 혼합된 그 언어는 그들이 핏케언에 체류하던 중에 발전된 것이다. “핏케언어” 곧 “노퍽어”는 피진 영어보다 훨씬 더 독자적인 복잡한 언어이며 경쾌하여 듣기가 좋다.

「오늘의 노퍽어 회화」(Speak Norfolk Today) 출판물에서 더 많은 예를 살펴보았다. “투엘 살란 고 더 미팅”은 “열두 명이 집회에 갔다”(Twelve people went to the meeting)를 의미한다. “에스 구드 디에, 엘 두 프 구 피셴”은 “좋은 날입니다. 낚시하러 가기 안성맞춤이군요”(It is a fine day, just right for going fishing)에 해당한다.

“꼭 오셔서 한번 구경하세요”

관광객을 위한 한 팜플렛은 노퍽을 “세상에서 가장 우정적이며, 가장 목가적이고, 역사적이고, 아름답고, 편안하고, 안전하고, 매혹적이고, 손상되지 않았고, 모험적이고, 독특한 휴양지”로 묘사한다. 그곳에 사는 어느 주민은 나에게 이렇게 자랑했다. “현 사물의 제도에서는 우리가 낙원 상태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곳을 떠나 다른 어느 곳으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남양에 위치해 있지만, 그곳의 시골은 전형적인 온대 지역이다. 완만하게 구릉진 푸른 언덕에는 아름다운 교목과 관목과 화초가 많이 자란다. 전망이 좋은 곳이면 어디서든 광활한 태평양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가옥들이 여유 있게 자리잡고 있다. 범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계속 열심히 일하므로, 정부 보조금은 별로 필요치 않다. 자립적이며 적응력 있는 태도가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작은 섬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은 좋은 소식을 전파한다.

이 독특한 섬의 후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요를리 쿰 룩 오른”—“꼭 오셔서 한번 구경하세요.”(Do come and have a look.) 그러한 초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기뻤다.

[15면 지도와 삽화]

전망이 좋은 곳이면 어디서든 광활한 태평양을 볼 수 있다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노퍽 섬

핏케언 섬

뉴질랜드

[16면 삽화]

관청 건물들과 교도소 벽들; 멀리 보이는 것은 필립 섬

전형적인 대칭형 노퍽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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