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소극적 감정 “소극적 감정—극복할 수 있다”라는 제목의 훌륭한 기사에 대해 감사합니다. (한국어판은 1992년 10월 15일 호) 오랫동안 소극적 감정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런 기사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마침내 소극적 감정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미래를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즐길 축복을 머리 속에 그려 보는 것은 크나큰 도움이 됩니다.
C. I., 이탈리아
저는 연애하던 남자가 철저히 기만적인 사람임을 알고 난 후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여러 달 동안 ‘어리석게도 그런 사람의 말을 믿다니’라든가 ‘사람을 보는 눈이 고작 이 모양이라니’ 같은 소극적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해 ‘결코 두 번 다시 남자를 믿지 말아야지’ 하는 냉소적인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기사에서 제안한, 적극적인 생각을 갖는 실용적인 방법은 자긍심을 되찾는 데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배울 점이 있음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R. M., 미국
소극적 감정이라는 문제를 다룬 것에 대해 갈채를 보냅니다. 그런데 소극적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의식적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잠재 의식적 생각—이를테면 어렸을 때 학대당한 것에 대한 억눌린 기억—역시 강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 기사에서 알려 준 지식을 적용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적용해도 기분이 더 나아지지 않음을 알게 될지 모르겠군요. 그런 사람들의 문제는 더 깊은 데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신 건강이나 감정 건강을 위해—전문가의 도움을 받든 그렇지 않든—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려는 사람을 극단에 치우치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M. W., 미국
그런 설명에 대해 감사합니다. 독자들은 그 기사가 중우울증이나 아동 학대의 후유증 같은 심각한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그 기사에 들어 있는 제안을 적용함으로 어느 정도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사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구나 예사로 경험하는 소극적 감정”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 기사는 중우울증처럼 심각한 병에 대하여는 “전문가의 치료를 필요로” 할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편집자.
눈물 얼마 전에, 저희 회중에서 여러 해 동안 장로로서 섬기다가 사망한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회관에서 운구해 나갈 때 저는 몹시 울었습니다. 하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감정을 제어하더군요. 바로 다음날 “왜 여러 종류의 눈물이 나는가?” 기사가 실린 1992년 9월 22일 호(한국어판은 10월 1일 호) 「깰 때이다」를 받아 보았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눈물이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열렬한 감정의 표시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유익한 기사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S. Z., 독일
손 “경이로운 우리의 손” 기사(한국어판은 1992년 8월 15일 호)는 정말 재미 있더군요. 우리의 손이 경이롭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사를 읽고 나니 창조주의 위대함을 느끼게 됩니다.
K. Y., 일본
기도 “청소년은 묻는다 ···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기사에 대해 감사합니다. (한국어판은 1992년 10월 1일 호) 그 기사는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다. 읽고 나니, 갖고 싶은 물질에 대한 소소한 요청을 위주로 기도해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언제나 즉각 응답하시지는 않기 때문에 꾸준히 기도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B. G.,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