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직면하여 거둔 승리
“하지만 놀랍게도, 나치에게는 [증인] 역시 제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증인은 심한 압력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다져져서 저항력이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해졌다. 히틀러는 증인을 종말전으로 몰아넣었으며, 증인은 믿음을 지켰다. ··· 증인의 경험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의 생존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귀중한 자료가 된다. 증인은 분명히 생존했기 때문이다.”—역사가 크리스틴 킹 박사의 말로 여겨짐, 「투게더」지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이십 세기 역사에서 지상에서 가장 널리 악평과 박해를 받은 종교 그룹으로 기억될 것이다. 증인들은 오해받았으며 종종 단순히 그들의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 때문에 그리고 전쟁을 배우거나 연습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대당했다. 증인들은 모든 정치 관계에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전체주의 통치자들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증인들은 엄격한 중립과 굽히지 않는 충절의 기록으로 현대사에 기여하였다.a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1966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이 독일에 있다. 이들은 독일의 인간 신 아돌프 히틀러로 대표되는 강포한 국가주의에 경의를 표하느니 차라리 생명을 포기하였다.” 사실들이 보여 주듯이, 여호와의 증인은 그런 순교자들 중에 두드러진 사람들이었다. 일부 경험들은 증인들이 충절 때문에 어떻게 박해를 당하고 죽기까지 하였는지를 예시해 준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나치 통치 기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증인들이 죽음에 직면하여 거둔 승리는 한결같으면서도 비할 바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의 아나니 그로굴의 이야기
“부모는 2차 세계 대전중인 1942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후에 우랄 산맥에 있는 소련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44년에 군 당국은 나를 불러 군대에서 예비 복무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여호와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배우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 어린 나이인데도 5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1950년에 매우 어려운 시기가 닥쳤습니다. 증인으로 활동한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2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지요. 노동 수용소에서 7년 4개월을 견뎌 냈습니다. 굶어서 몸이 부어 오르고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죽은 후 여건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1957년에 당국은 수용소에서 나를 풀어 주었습니다. 다시금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10년 동안 지내게 되었습니다.”
누이가 당한 잔혹한 고문
“시베리아에서 여동생과 다시 만났습니다. 누이의 몸은 이미 병약한 상태였습니다. 누이는 내가 1950년에 체포된 지 꼭 2주 만에 체포되었지요. 누이는 완전히 불법적인 방식으로 심문받았습니다. 심문자들은 누이를 독방에 가두어 놓고 거기다 쥐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쥐들은 누이의 발을 물어뜯고 누이의 몸에 기어올랐습니다. 결국 심문자들은 누이를 가슴까지 차오르는 찬물에 들어가 서 있게 하고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누이는 전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25년 형을 받았습니다. 양쪽 다리는 마비되었으나 손과 팔은 쓸 수 있었습니다. 누이는 5년 동안 수용소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결국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후 부모에게 보내졌는데, 부모는 이미 1951년에 시베리아로 보내져 종신 유형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더 박해를 당함
“시베리아에서 나디아를 만나 결혼하였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시베리아에서도 우리는 전파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나는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고 복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매일 밤 남동생 야코브와 함께 지하실 움에서 「파수대」를 복사하느라고 바빴습니다. 우리에게는 타자기가 두 대, 엉성한 복사기가 한 대 있었습니다. 경찰이 수시로 와서 집을 수색하였습니다. 올 때마다 경찰은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의 유형 기간이 끝난 후 가족 모두와 함께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따랐습니다. 나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섬기도록 임명받았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였습니다. 달마다 여러 차례 국가 보안 경찰관들이 내 직장으로 와서 믿음을 타협하게 하려고 설득하였습니다. 한 번은 여호와의 도움을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느꼈습니다. 그들은 나를 체포하여 키예프에 있는 국가 보안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 6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 기간 내내 그들은 무신론적 선전으로 나를 혼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파수대」와 그 밖의 워치 타워 협회 출판물에 대해 무신적인 태도로 평하였습니다.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압력을 받았습니다. 화장실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풀려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여 형제들을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힘주실 것을 기도로 구하였습니다.
“그 후 경찰서장이 나를 보러 와서 내 앞에 의자를 놓고 앉더니 내가 옹호하는 것에 대해 정말 확신하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그에게 간단히 증거하면서 진리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나도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감옥에서 3년이나 5년을 산다 해도, 아니 한쪽 다리로만 서서 60년을 산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잠시 조용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건데. 당신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소?’ 그는 앉아서 다시 깊이 생각하더니 ‘집으로 가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은 뜻하지 않은 힘을 주었습니다. 더는 배고프지 않더군요. 그저 떠나고 싶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내게 힘을 주셨음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요 몇 해 사이에 구소련 지역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성서 출판물이 넉넉하게 있지요. 우리는 순회 대회와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별 방문 봉사를 포함하여 모든 부면의 전파 활동에 참여합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는 여러 시련에 직면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시험받은 충절
1960년대 말에 파괴적인 내란이 나이지리아를 휩쓸었다. ‘비아프라’라는 이름으로 개칭된 때에, 떨어져 나간 지역의 군인들은 사상자가 늘어나자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며 전쟁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비아프라의 여러 증인들이 추적과 학대와 죽임을 당하였다. 한 여호와의 증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쥐 같았어요. 군인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숨어야 하였으니까요.” 숨을 겨를이 없는 때도 있었다.
1968년 어느 금요일 아침, 32세 된 전 시간 봉사자 필립이 우무이모 마을에서 한 노인에게 전파하고 있을 때, 비아프라 군인들이 강제 징집 운동을 벌이며 울타리로 둘러싸인 그 지역으로 들이닥쳤다.
“무얼 하는 거요?” 하고 지휘관이 물었다. 필립은 여호와의 다가오는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지금은 설교할 때가 아니오!” 하고 한 군인이 소리쳤다. “지금은 전시요. 멀쩡한 남자들이 쓸데없이 쏘다닐 때가 아니란 말이오.” 군인들은 필립의 옷을 모두 벗기고 양손을 함께 묶은 다음 끌고 갔다. 43세 된 그리스도인 장로 이즈리얼 역시 숨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녀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다가 붙잡혔다. 오후 2시경까지 군인들은 100명 이상을 끌어 모았다. 군인들은 끌고 온 사람들을 우무아차음그베데알라의 군 부대까지 25킬로미터를 뛰어가게 하였다. 뒤에 처지는 사람은 채찍으로 맞았다.
이즈리얼은 중기관총을 운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필립은 경기관총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였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군사 활동을 금하시므로 그 활동에 가담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그러자 부대장은 그들을 감금하도록 명령하였다. 오후 4시에 영창에 있는 그들을 포함하여 징집된 모든 사람에게 한 줄로 서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 다음 군인들은 각 사람에게 군 입대에 동의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서류에 서명하라고 하였다. 필립은 서명할 차례가 왔을 때, 디모데 후서 2:3, 4의 말을 사용하여, 부대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면서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싸울 수는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반역자로 여기실 것입니다.” 부대장은 필립의 머리를 치면서 “그리스도의 군인이라는 네 임명은 끝났어! 너는 이제 비아프라 군인이야” 하고 말하였다.
필립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아직 제게 그분의 군인이 된 제 임명이 끝났다는 통지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통지를 받을 때까지 제 임명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군인들은 필립과 이즈리얼을 들어 땅에 내동댕이쳤다. 이 두 사람은 얼떨떨한 채 눈과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끌려갔다.
총살 집행대 앞에서
그날 늦게 이즈리얼과 필립은 총살 집행대 앞에 섰다. 그러나 군인들은 총을 쏘지 않았다. 그 대신 주먹과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그 때 부대장은 그들을 때려서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24명의 군인에게 그 일을 시켰다. 여섯 명은 필립을, 다른 여섯 명은 이즈리얼을 때렸다. 나머지 열두 명의 군인은 각목이 부러지면 대주었고 지친 군인과 교대하였다.
필립과 이즈리얼은 손과 발이 다 묶였다. 이즈리얼은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맞았습니다. 한 군인이 때리다 지치면 다른 군인이 이어서 때렸지요. 우리가 의식을 잃은 후에도 계속 때렸습니다.” 필립은 이렇게 말한다. “고문당하는 동안, 끝까지 인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태 복음 24:13이 생각나더군요. 그 내용에 힘을 얻었습니다. 맞는 고통은 단지 몇 초 동안만 느꼈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돕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이 다니엘 시대에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이 도우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끔찍한 밤에 살아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때리기를 마치더니, 이즈리얼과 필립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버려 두었다.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두 그리스도인은 의식을 되찾았다. 군인들은 이들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영창으로 끌고 갔다.
“벌써 시체 냄새가 난다”
그들은 맞아서 살갗이 벗겨졌으며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이즈리얼은 이렇게 기억을 떠올린다. “상처를 씻지 못하게 하더군요. 며칠 후 파리 떼가 쉴 새 없이 몰려들었습니다. 고문당한 것 때문에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한 주일이 지나서야 물 외의 다른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군인들은 그들을 채찍으로 각기 24대씩 때렸다. 군인들은 잔인스럽게도 그렇게 때리는 일을 “아침 식사” 혹은 “뜨거운 아침 차”라고 부르면서 즐겼다. 군인들은 정오마다 그들을 들로 데리고 나가 오후 1시까지 열대 뙤약볕에 세워두었다. 며칠간 그렇게 학대한 후, 부대장은 그들을 불러 신념을 버리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부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영창에서 죽을 거야. 아니 벌써 시체 냄새가 난다.”
필립은 이렇게 말하였다. “죽을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싸웠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겁니다.”
그들은 그런 끔찍한 시기를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 이즈리얼은 이렇게 말한다. “필립과 나는 시련을 겪는 동안 내내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시련이 시작될 때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실 테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군에 가담하지는 않을 거요.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손으로 총을 잡지는 않을 거요.’” 필립도 같은 결의를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함께 여러 성구를 떠올리며 이야기하였다.
새로 부임한 부대장은 약 백 명의 징집자들을 이베마로 이송하기로 하였다. 이베마는 지금의 이모 주인 음바노 지역의 훈련소다. 이즈리얼은 그 때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한다. “큰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고, 보충병들이 모두 트럭에 탔지요. 내 아내 준은 군인들에게 달려가서 우리를 데려가지 말라고 용기 있게 간청하였습니다. 아내는 소청이 거절되자 트럭 가까이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으며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 끝에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트럭은 떠났지요.”
동정심을 보인 외국인 직업 군인을 만남
다음날 오후에 군 트럭이 이베마 훈련소에 도착하였다. 그 곳 훈련소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스라엘 출신의 직업 군인이었다. 그는 필립과 이즈리얼이 몹시 맞아서 약해 있는 것을 보자 다가와서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군사 훈련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분노하며 그 곳에 있던 다른 군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비아프라는 이번 전쟁에서 질 게 뻔하다. 여호와의 증인을 괴롭히는 나라는 전쟁에서 반드시 진다. 여호와의 증인을 징집해 오면 안 돼. 전쟁에 가담하기로 동의하는 증인은 괜찮겠지만, 거절하는 증인은 내버려두어야 해.”
훈련소 의사는 두 증인에게 예방 접종을 받았는지 그리고 신체 검사 합격증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훈련소장은 징집병 모두를 받아주지 않았으며, 우무아차로 돌려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가서 하나님을 섬기시오”
후에 이즈리얼의 아내와 필립의 어머니는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여 우무아차 부대로 찾아갔다. 그들은 부대에 다가갈 때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다. 문에서 보초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 당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소. 사흘 전에 끌려간 무리가 되돌아왔소.”
바로 그날 필립과 이즈리얼은 부대에서 풀려났다. 부대장은 이즈리얼의 아내에게 “당신은 우리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 당신의 기도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이즈리얼과 필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가서 하나님을 섬기시오. 당신의 여호와께 계속 충절을 지키시오.”
이즈리얼과 필립은 회복되었고 그리스도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즈리얼은 2년간 전 시간 전파 활동을 하였으며, 계속 그리스도인 장로로 섬기는 일을 해왔다. 필립은 10년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섬겼으며 지금도 전 시간 전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필립 역시 회중의 장로다.
무기 살 돈을 기부하기를 거절함
제불란 은쿠말로와 폴리테 모가네는 둘 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젊은 전 시간 봉사자다. 제불란은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일단의 남자들이 우리 집에 와서 무기를 사기 위한 기부금으로 20랜드(약 5500원)를 내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들에게 저녁 때 다시 와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하였습니다. 일요일에는 일과가 꽉 짜여 있어서 그 문제를 바로 그 때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놀랍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날 저녁 열다섯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의 표정에서 그들이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중하게 소개한 후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반대 정당과 싸우는 데 사용할 더 크고 더 좋은 무기를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석유로 불을 끌 수 있을까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불가능할 거요’라고 대답하더군요.
“마찬가지로 폭력은 폭력과 보복 행위를 조장할 뿐이라고 우리는 설명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은 그 말을 언짢게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위협하는 투로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하고 그들은 퉁명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강제 기부금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거요. 돈을 내든지 따끔한 맛을 보든지 하시오!’
제불란은 이렇게 회상한다. “일이 매우 곤란해지기 시작한 순간에 우두머리되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입장을 설명하였고 그는 주의 깊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자기의 정치 신조에 정성을 바치는 것을 예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들 조직의 훈련된 한 군인이 포로로 잡혀 가서 신분을 타협하도록 강요받을 경우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 군인은 자기 신념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대답하더군요. 그 대답에 대해 칭찬을 해주자 흐뭇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 우리의 경우를 예시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를 주었음을 몰랐던 거지요.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과 다르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의 지지자들로서 우리의 ‘헌법’은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성서는 모든 형태의 살인을 정죄하므로, 우리는 무기를 살 돈을 한푼도 기부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지요.
“이런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더 많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결국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눈 결과가 좋게 되기를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겠지요.
“우리가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설명한 후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우두머리는 그 무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양로원을 지을 돈이 필요했다면, 혹은 우리 이웃 사람들이 병원에 갈 돈이 필요했다면 이 사람들은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돈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데 돈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나로서는 그들의 신조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들 모두는 일어섰습니다. 그들과 악수를 하였으며, 그들이 참아 준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을 잃을 듯한 위태로운 상황이 당당한 승리로 끝났던 것입니다.”
사제가 폭도를 선동하다
폴란드의 증인 예지 쿨레샤는 이렇게 말하였다.
“열심과 왕국 권익을 첫째로 두는 일에 관한 한, 아버지 알렉산데르 쿨레샤는 따를 만한 본을 세웠습니다. 아버지는 야외 봉사, 그리스도인 집회, 개인 연구와 가족 연구를 정말 신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도, 혹한도, 강풍도, 더위도 아버지를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겨울에 아버지는 성서 출판물을 넣은 가방을 메고 폴란드의 외딴 구역들로 스키를 타고 가서 며칠씩 지내며 증거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난폭한 게릴라단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갖가지 위험한 일을 겪었습니다.
이따금 사제들이 증인에 대한 반대를 선동하여 폭도를 몰고 왔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을 조롱하면서 돌을 던지거나 때렸습니다. 그러나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을 인내한 것을 행복해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몇 해 동안 당국은 이 나라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혼란 상태와 파괴 행위가 있었습니다. 낮에는 경찰과 비밀 경찰이 지배하였지만, 밤에는 게릴라와 여러 폭력배가 득세하였지요. 도둑과 강도가 횡행하였고, 살상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무방비 상태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쉽사리 표적이 되었고, 특히 사제들이 선동한 일부 그룹들은 주로 증인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선조의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증인들의 집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쳐들어와서는 창문을 깨고 가축을 훔쳐가고 옷과 식품과 출판물을 못쓰게 만들었지요. 성서를 우물 속에 빠뜨리기도 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순교
“1946년 6월 어느 날, 우리가 함께 모여 자전거를 타고 외딴 구역으로 가기 전에 젊은 형제 카지미에시 콩지엘라가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속삭이듯 말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만 구역으로 보내고 함께 가지 않길래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듣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전날 밤에 콩지엘라 가족이 잔혹하게 구타당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심하게 다친 형제 자매들을 보살피려고 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벽과 천장에 온통 피가 튀어 있었어요.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붕대를 감았고, 시꺼멓게 멍이 들고 퉁퉁 부어 있었으며 갈비뼈와 손발이 부러졌더군요.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가족의 어머니인 콩지엘라 자매도 몹시 구타당하였어요. 아버지는 그 가족을 돕고 있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아버지는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나는 매우 건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45세였고 아픈 적이 없었다] 그런 저는 하나님을 위해 고통을 당할 특권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연로한 자매에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는 자기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해가 진 후 우리는 3킬로미터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장한 사람 50명의 무리가 우리 집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빈첸치우크 가족도 끌려왔으므로 우리 아홉 명이 그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도 여호와의 증인이오?’ 우리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런 다음 도살자 같은 그 패거리 중 두 사람이 차례로 아버지를 구타하면서 아버지에게 성서를 읽는 일과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교회에 가서 죄를 고백할 것인지를 알기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가 당신을 주교로 임명하겠소’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조롱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신음 소리도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양처럼 조용히 고문을 인내하였습니다. 날이 밝고 종교적 폭한들이 떠난 지 15분 후, 죽도록 맞은 아버지는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떠나기 전에 나를 다음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나는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맞으면서 여러 차례 의식을 잃었습니다. 구타당하여 몸은 허리 위로 시꺼멓게 멍들었습니다. 우리는 여섯 시간 동안 학대를 당하였습니다.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충실한 아내의 지원
“나를 포함하여 22명의 증인은 두 달 동안 10평방 미터도 안 되는 어두운 감방에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그 기간이 끝나갈 무렵 음식 할당량이 줄었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작은 빵 조각 하나와 씁쓸한 커피 한 모금만 받았습니다. 누군가 밤에 심문을 받으러 불려 나가기라도 해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일지언정 누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활동 때문에, 다섯 차례 수감되어 모두 8년을 복역하였습니다. 나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수감자로 여겨졌습니다. 내 신상 기록부에는 이런 취지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활동을 다시 하려는 욕망을 버리게 하려면 쿨레샤를 심하게 고문해야 함.’ 하지만 풀려날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인 봉사에 전념하였습니다. 당국자들은 아내 우르슐라와 어린 두 딸의 생활에도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10년 동안 법 집행관은 아내가 힘들여 번 봉급 일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 몫은 내가 성서 출판물을 지하에서 편집하는 것에 대해 매긴 세금이라고 말했습니다. 생활 필수품으로 생각되는 것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압수당하였습니다. 그 모든 고통스러운 나날 동안 나와 함께 참을성 있게 인내하면서 언제나 내게 진정한 지원을 해준 용감한 아내를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곳 폴란드에서 영적 승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바르샤바 근처 나다진에 합법적으로 워치 타워 협회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박해를 겪은 후, 이제 10만 8000명 이상의 증인이 1348개 회중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왜 그토록 순교자가 많은가?
현 20세기 여호와의 증인의 충절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여러 권의 책으로 엮을 만하다. 말라위와 모잠비크 같은 곳에서, 파시즘이 지배하던 스페인에서, 나치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동유럽에서, 2차 세계 대전중의 미국에서 수천 명이 순교를 당하거나 투옥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강간, 약탈을 당하였다. 질문이 생긴다. 왜 그런 일을 당하였는가? 완고한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성서로 훈련받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존중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 죽이는 일을 배우기를 거절하며 어떤 정치 활동에도 가담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 15:17-19에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계적으로 이 모든 박해를 당하면서도, 여호와의 증인의 수는 증가하였다. 1943년에 54개 나라와 지역에서 12만 6000명이었으나 1993년에는 229개 나라와 지역에서 약 4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증인은 죽음에 직면해서도 승리를 맛보았다. 증인은 여호와께서 다되었다고 선언하실 때까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독특한 교육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이사야 6:11, 12; 마태 24:14; 마가 13:10.
[각주]
a 충절이란 “엄격한 도덕 규범이나 윤리 규범에 확고 부동하게 고착하는 것”이다.—「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제3판.
[6면 네모와 삽화]
독일에서 있은 순교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있는 다른 모든 증인 앞에서 23세 된 증인 아우구스트 디크만을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구스타프 아우슈너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디크만 형제를 총살한 다음 우리에게 말하기를, 믿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문에 서명하지 않을 경우 모두 총살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한 번에 30명에서 40명씩 모래 채취장으로 끌고 가서 우리 모두를 총살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친위대는 서명하든지 아니면 총살당하든지 하라는 통지서를 우리 각자에게 전해 주었다. 단 하나의 서명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갈 때의 그들의 우울한 표정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들은 공개 처형으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총탄보다 여호와를 불쾌하시게 하는 일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더 이상 공개적으로 총살하지 않았다.”
[9면 네모와 삽화]
최종 대가
이따금 죽음에 직면하여 거두는 승리에는 최종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관련될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탈 주 북부의 은셀레니 회중에서 보내 온 한 편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알려 준다.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사랑하는 형제 모세스 니아무수아를 잃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 형제는 자동차 용접 수리공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정치 그룹이 그에게 사제품 총을 용접해 달라고 하였을 때,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 2월 16일에 그 그룹은 정치적 시위 운동을 벌이면서 반대 그룹과 싸웠습니다. 그들은 싸우고 돌아오던 바로 그날 저녁에 니아무수아 형제가 쇼핑 센터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왜 죽였을까요? ‘네가 우리 총을 용접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동지가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형제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라고 그 회중 서기인 두마쿠데 형제는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11면 네모와 삽화]
폴란드에서 있은 순교
1944년, 독일군이 서둘러 철수하면서 폴란드 동부의 한 읍 근처에 전선이 그어졌을 때, 점령군 당국은 주민들에게 탱크 방어용 참호를 파라고 명령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일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다. 젊은 증인—침례받은 지 불과 두 달밖에 안 된 증인—스테판 키에릴로는 강제로 끌려가 작업자들 틈에 있게 되었으나 담대하게 동일한 중립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충절을 깨뜨리려는 수단이 총동원되었다.
그들은 스테판의 옷을 벗기고 습지에 있는 나무에 묶어 두어 모기와 여러 곤충에 시달리게 하였다. 그는 그런 어려움과 그 밖의 고문들을 인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고위 장교가 그 무리를 시찰하기 위해 왔을 때 누군가 장교에게 그의 명령에 결코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스테판은 참호를 파라는 명령을 세 번이나 들었으나 삽을 드는 일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총살을 당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수백 명은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순교는 여호와께서 공급하실 수 있는 크나큰 힘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7면 삽화]
아나니 그로굴
[10면 삽화]
예지 쿨레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