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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나사렛 사람을 위한 독특한 큰 잔치
  • 깨어라!—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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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대한 행렬
  • 무엇이 군중을 그토록 흥분시키는가?
  • 큰 잔치의 기원
  • 우상 숭배로 볼 수 있는가?
  • 형상이 열성적인 신자들을 도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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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4
깨94 3/15 15-17면

검은 나사렛 사람을 위한 독특한 큰 잔치

「깰 때이다」 필리핀 통신원 기

이 정도로 큰 군중을 보기란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 곳 마닐라에서는 해마다 1월 9일이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 수십만 명의 독실한 가톨릭교인이 키아포 교회의 미란다 광장에 모여 검은 나사렛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검은 나사렛 사람이라고?’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릴지 모른다. 그렇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이 실물 크기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彫像)이 독특한 행렬의 초점을 이루는데, 「필리핀의 유산」(Filipino Heritage)이라는 책에 의하면, 그 행렬은 필리핀 즉 “아시아의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분명히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볼 만한 ·⁠·⁠· 대중 종교의 표현이다.”

거대한 행렬

교회 문이 열리자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군중은 환호하며 열광한다. 검은 나사렛 사람이 서 있는 수레를 끌어당기도록 두 개의 기다란 밧줄을 군중 속으로 던진다. 열성적인 신자들이 밧줄을 잡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밧줄을 잡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일부 사람들은 서로 팔을 맞잡고서 행렬이 지나갈 길을 터 주려고 애쓴다. 모든 남자가 맨발이며, 각자 티셔츠를 입고 머리나 목에 수건을 걸치고 있다.

교회 근처에 설치된 무대에서 방금 아나운서가 기다리던 군중에게 몇 가지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특히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여자는 주 행렬에 가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검은 나사렛 사람이 천천히 광장으로 끌려 나옴에 따라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상황이 몹시 난폭해지기 때문이다.

흥분한 숭배자들의 무리가 검은 나사렛 사람을 만지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앞으로 나와서 밀치고 떼밀며 서로 딛고 올라서기까지 한다. 수레에 타고 있는 몇 남자는 흥분한 군중으로부터 형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 중 다수를 아래로 밀쳐 내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동시에 올라서게 내버려 두면 받침대가 쓰러질 수 있다. 그렇게 조심을 해도 수레가 이따금 쓰러지는 일이 벌어지며, 아주 많은 사람이 형상을 만지려고 덤벼들기 때문에 수레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30분에서 1시간이 걸린다.

관중은 키아포의 좁은 거리에 줄지어 서서 검은 나사렛 사람이 천천히 그 지역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촛불을 치켜들고서 형상에 대한 신앙심을 나타낸다. 집에서 작은 형상을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다. 행렬 뒤에는 검은 나사렛 사람을 열렬히 신봉하는 다양한 집단을 표시해 주는 큰 깃발들이 따라온다.

군중 가운데서 일부 사람이 검은 나사렛 사람과 함께 받침대에 타고 있는 남자에게 수건이나 손수건을 던진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형상이나 십자가에 문지른 다음 도로 던진다. 그러자 감격한 신자가 그 수건을 자기 얼굴에 문지른다. 주 행렬의 뒤를 따라 형상들의 긴 줄이 이어지는데, 다수의 형상이 검은 나사렛 사람을 소형화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자들이 참여해도 안전하다.

그 동안 교회 안에서는 신자들, 특히 여자들이 다른 방법으로 검은 나사렛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교회 중앙 통로를 따라 성찬대까지 무릎을 꿇고 천천히 나아가는 사람들의 긴 행렬에 가담한다.

무엇이 군중을 그토록 흥분시키는가?

검은 나사렛 사람 조상은 무수한 기적의 근원으로 알려져 있다. 열두 살 된 알베르토는 검은 나사렛 사람이 언제나 자기가 기도로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응답해 주었기 때문에 조부모와 함께 그 큰 잔치에 간다고 말했다. 마우리치오는 죄도 용서받고 일상 생활의 긴장과 문제도 덜고 싶어 그 행렬에 가담했다고 말한다.

마우리치오가 처음에 그 큰 잔치에 가담했을 때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는 해마다 형상을 끌어당기는 밧줄을 잡을 수 있었다. 다섯 번째에는 수레 위에 실제로 올라서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친구 몇 명의 도움으로 그는 올라서서 자기 수건으로 검은 나사렛 사람의 발을 문지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재빨리 군중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꼭 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험이지만, 대개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한다.

큰 잔치의 기원

검은 나사렛 사람은 원래 한 멕시코 인디언이 조각한 것으로(필리핀이나 중국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 17세기에 큰 배에 실어서 마닐라로 옮겼다고 한다. 장인들이 검은 나무로 조각했든가 아니면 형상에 짙은 갈색을 칠해서 그 형상을 독특하게 만들었는데, 그 빛깔은 멕시코 사람이나 필리핀 사람의 얼굴 색과 같다. 검은 나사렛 사람은 18세기에 마닐라의 대주교 바실리오 산초의 요청에 따라 키아포에 안치되었는데, 그는 그 형상에 축복을 하였다. 그 다음 19세기 초, 교황 비오 7세가 그 형상에 축복을 하였다.

그러나 192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형상을 꺼내어, 키아포 지역 큰 잔치의 절정을 이루는 종교 행렬의 일부로 삼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 행렬은 계속되었다.

우상 숭배로 볼 수 있는가?

보통 때는 검은 나사렛 사람이 교회 입구 근처의 창문 안쪽 자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창문은 바로 삼풍 우토스 즉 십계명이 열거된 두 석판 사이에 있다. 일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이 모순되는 상황으로 보일지 모른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출애굽 20:4, 5, 「공동번역」) 독실한 가톨릭교인들이 섬기고 있는 검은 나사렛 사람은 새긴 우상이 아닌가?

대부분의 가톨릭교인은 그 형상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 「신 가톨릭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형상에게 하는 숭배는 결국 그것이 대표하는 인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가야 할 동일한 형태의 숭배를 그를 대표하는 형상에게 할 수 있다.” 필리핀의 많은 가톨릭교인도 그와 같이 말한다. 즉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라 형상이 대표한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리를 잠시 검토해 보자.

사실 그러한 상대적 숭배는 가톨릭교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방 종교들은 여러 세기 동안 같은 식으로 추리해 왔다. 예를 들어 4세기의 교부 락탄티우스에 의하면, 그러한 이방인들은 “우리가 형상 그 자체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형상으로 대표되는 자, 그 형상을 헌납받은 자를 경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이것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하느님의 계명이 그들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 그러한 추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효화하려는 것인데 과연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무튼 대다수의 우상 숭배자들이 그런 식으로 추리한다면 그 계명들은 과연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 송아지를 세우고 그것에 절하였던 일을 상기해 보라. 그 백성은 자기들이 하는 짓이 결코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송아지가 여호와를 대표하였던 것이다. (출애굽 32:4, 5)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일을 기뻐하셨는가? 우리는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는도다].”—출애굽 32:7, 8.

유의할 만한 또 다른 질문은, 형상을 공경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하는 점이다. 성서는 이 점에 관해 결코 완곡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들 지각이 없고 철이 없는 것들, 눈은 닫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마음은 어두워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들. ‘·⁠·⁠· 그 나무 토막 앞에 엎드리자’ 하고 말하는 생각도 없고 지각도 없고 철도 없는 것들.”—이사야 44:18, 19, 「공동번역」.

형상이 열성적인 신자들을 도울 수 있는가?

한 가톨릭 사제는 이렇게 썼다. “키아포의 검은 나사렛 사람 배후의 힘에 신뢰를 두는 사람들은 말굽 편자나 토끼의 발을 신뢰하는 사람들보다 확실히 더 신뢰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그러한 형상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누구 하나 곤경에서 구해 주지도 못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그것들은 “사람에게 복을 내리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신다.—이사야 46:7; 예레미야 10:5; 「공동번역」.

검은 나사렛 사람을 만져 보려는 기대에서 서로 딛고 올라서는 독실한 가톨릭교인들이 “하느님께 대한 열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로마 10:2, 「공동번역」)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검토해 봄으로 정확한 지식을 얻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격려하는 바이다.—야고보 1:27, 「공동번역」.

[16면 삽화]

수건이나 손수건을 조상에 문지르려고 모여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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