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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쇠퇴하는 예의 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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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4
깨94 8/1 3-6면

쇠퇴하는 예의 범절

여전히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예의를 팽개친 사람도 많다.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예법이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말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상류 사회 인사들은 지극히 사소한 예법까지도 준수하는 것을 다같이 재미로 삼았고, 여성들은 이를 대단한 소일거리로 삼았다. 갈수록 까다로운 의례가 고안되어 그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특권 의식이 생기고, 그 의례를 모르는 수준 낮은 사람들은 소외당하게 만들었다.”

예의 바름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예의 문제의 존경받는 권위자 에이미 밴더빌트는 그의 저서 「신 에티켓 전서」(New Complete Book of Etiquette)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최상의 행실 규범을 고린도 전서 13장에 나오는 인간애에 관한 성 바울의 아름다운 논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규범은 옷차림이나 겉치레 예의를 세세하게 따지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감정과 태도, 친절 및 타인에 대한 사려 깊음과 관련이 있다.”

에이미 밴더빌트가 언급한 내용은 고린도 전서 13:4-8(「신세」)에 나오는 성서 구절로서, 다음과 같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우쭐대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해를 입은 것을 유념해 두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인내합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보기가 얼마나 드문가! 어느 곳에서나 예의 범절을 갖춘다면 나무랄 데 없을 것이다! 그러한 예의를 가르치고 배우는 출발점은 그리스도인 가정이다. 가족이란 각 부품이 서로 밀착되어 있는 정교한 기계이다. 윤활이 잘되어야만 이 기계가 부드럽게 돌아갈 수 있다. 도움을 베풀고 정중하고 명랑하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다. 정중함과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널리 쓰이는 일상 표현—이를테면, “고마워요”, “좀”, “용서해 줘요”, “미안해요”—의 사용을 익힌다면 우리의 교제에서 해가 되는 마찰을 제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사소하지만 큰 뜻이 담겨 있다. 누구나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 그러한 말을 하는 데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지만, 친구를 살 수 있다. 우리가 가정에서 바른 예의를 매일 실천한다면, 가정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더라도 예의를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예의 바름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사려 깊음을 보이고, 그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예의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지적해 왔다. 한 저술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정중함이 부족하다. 개인주의가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이기심이란 너무나 무서운 것이어서 그것을 감추려고 우리는 공손함을 발명하였다.” 오늘날 “공손함”은 “약함”을 뜻하며, 다른 사람을 앞에 두는 것은 겁이 많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자아 제일주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된 것은 70년대의 자아 시대 때문이 아닌가? 한 대도시 신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상 예모가 더 이상 일상적이라고 묘사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런던의 「데일리 메일」지는,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들까지도 점점 호전적이 되어 가고 다른 아이의 물건을 존중하지 않으며 어른을 존경하지 않고 음탕한 말을 한다고 보도한다. 조사에 응한 교사의 대부분은 부모가 자녀를 망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반사회적 행위가 증가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한 조사에서 인터뷰에 응한 교사의 86퍼센트는 “명확한 가정 규범과 기대치의 결여”를 탓한다. 82퍼센트는 부모의 본(本)의 부재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결손 가정, 이혼, 동거 관계, 텔레비전 과다 시청, 무징계, 무제재—이런 것들이 한데 모여 결국엔 가정 파괴를 초래한다.

한 국민 학교 교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아이들간에 존중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동배에게 창피를 주거나 어른을 화나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요. ·⁠·⁠· 무례한 몸짓, 음탕한 말, 간단한 지시도 따르려 하지 않는 일 ·⁠·⁠· 경기에서 공을 독차지하려는 일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경을 보이죠. ·⁠·⁠· [반면에] 일부 가정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고 하지요.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귀염둥이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로 행동하지요. 다른 아이들은 새치기하지만 그 아이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립니다. ·⁠·⁠· [아이들에게] 존중심이 심어졌는지 않았는지의 차이입니다.”

다년간 경험이 있는 다른 국민 학교 교장은 이런 점까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더 노골적인 비열한 행동을 보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예전처럼 노는 것 같지 않아요. 몰려다니지요. 그들은 재빨리 약한 아이, 외톨이, 괜찮은 운동화나 청바지를 신거나 입지 않은 아이를 알아봅니다. 그런 애를 쫓아가서는 조롱하지요. 거기에는 악의가 서려 있습니다. 중단시키려고 해 봤지만, 잘되질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너무 거칠게 운전합니다. 도로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요.” 컬럼비아 대학교 조너선 프리드먼 교수의 말이다. 캐나다 왕립 은행의 「월간 회보」(Monthly Letter)는 “무자비한 도로 참살”에 관해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문제의 핵심은 시민답지 못한 행위이다. 문명의 구성 요소인 정중함, 사려 깊음, 관용, 인내, 인권 존중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뉴욕 타임스」지는 뉴욕 시 거리의 특징을 “운전자와 구급차의 대결”로 묘사한다. 이 도시에서는 구급차나 소방차 같은 비상 차량에 길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운전자가 늘고 있어, 위독한 환자나 부상자에게 구급차가 가지 못하거나 그런 사람을 신속히 병원으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사망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 응급 의료반 반장 엘런 시벨리는 브롱크스 구(區) 펠럼 파크웨이에서 운전하던 중, 심박동 정지 연락을 받고 가던 구급차에 길 비켜 주기를 거부했던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불량배였는지 비켜 주지 않더군요. 하지만 그는 집에 도착했을 때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지요. 심장 마비를 일으켰던 건 그의 어머니였고, 구급차는 그의 어머니에게 가려던 것이었지요.”

「뉴욕 타임스 인터내셔널」지는 예절 협회라는 영국 단체에 대해 말하였다. 그 단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호전적으로 무례해졌으며, 뭔가 조처가 취해져야” 했기 때문에 결성되었다. 「이브닝 스탠더드」지의 칼럼에서, 한 방송 작가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때 교양 수준이 높았던 나라가 무례한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한 보험 회사는 “전체 도로 사고 47퍼센트의 원인을 거슬러 가 보면 무례한 행동에 이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텔레비전이 예의 범절의 침식에 지대한 역할을 했는데, 어린이와 십대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옷 입는 방식, 말하는 방식, 인간 관계를 다루는 방식, 반복해서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을 볼 때, 텔레비전이 교사 역할을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가 허구적인 얄팍한 프로그램으로 규정식을 삼는다면, 우리의 예의 범절은 결국 우리가 보는 인물들의 뻔뻔스럽고 불경스러우며 빈정대는 태도를 반영하게 될 것이다. 부모는 멍청하게, 자녀는 똑똑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세상은 큰 소리로 고압적으로 호령하거나 말을 가로막는 데서 만족감을 찾으며, 오만하고 난폭하며 잘난 체하고 약올리며 도전적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예전에는 대중 사회가 무례한 행실에 눈살을 찌푸렸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배척당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오명을 쓰지 않고도 무례한 행동을 자행할 수 있다. 누가 반대했다가는 말로나 신체적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 일부 청소년은 시끄럽게 몰려다니면서 상스러운 말과 음란한 몸짓으로 분위기를 잡아서, 그 무례한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기분 상하게 하는데, 이 모두가 자기들의 도전적인 반항에 이목을 끌고 뻔뻔스럽게 무례함을 과시함으로 성인들에게 충격을 주자는 속셈으로 의도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거친 태도는 약자의 위장된 힘이다.”

인간의 행실을 다루기 위해 인간이 편찬한 법은 도서관을 메울 정도지만, 그래도 인류가 필요로 하는 지도를 베풀지 못했다. 아직도 법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줄어도 되는가? 사회가 좋아질수록, 법이 덜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한 가지 법만 있다면 어떤가? 예를 들면 이런 법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 7:12.

이 법에 순종한다면 현재 겪는 문제의 대부분이 제거되겠지만,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더 중요한 이러한 법이 부가되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 12:30.

오늘날의 사회는 이 두 가지 성서의 요구 조건을, 성서에 들어 있는 다른 모든 지침과 함께 불필요한 것으로 묵살한다. 성서는 예레미야 8:9에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리라] ·⁠·⁠·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그들은 또한 우리가 지도를 받는 데 필수적이라고 전통적으로 인정해 오던 진실한 가치관에 대해 대중의 합의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신도덕은 각 개인이 선택하는 어떤 대체 생활 양식도 허용하는 넓은 길—예수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밝히신 넓은 길—이며, 많은 사람이 그 길로 들어서고 있다.—마태 7:13, 14.

완전한 본

“아버지 품속에 있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받을 만한 뛰어난 모범이시다. (요한 1:18) 사람들을 대하실 때, 그분은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동정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힘차고 단호하셨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결코 거칠거나 불친절하지 않으셨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마음 편히 지내는 그분의 비범한 재능”에 관해 평하면서 「나사렛 출신의 남자」(The Man From Nazareth)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공개 석상에서나 사석에서나 한결같이 그분은 남자와 여자를 대등하게 대하시면서 교제하셨다. 그분은 천진 난만한 어린이들을 편하게 대해 주셨고, 삭개오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독직 관리에게도 이상할 정도로 편하게 대해 주셨다. 마리아와 마르다같이 집 안에 들어앉아 있는 고상한 여자들도 기탄 없이 그분과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매춘부들 역시 그분이 자기들을 이해해 주고 벗이 되어 줄 것으로 확신하는 양 그분을 찾았다. ·⁠·⁠· 일반 사람들을 속박하는 신분 경계를 이상할 정도로 의식하지 않는 그분의 태도는 그분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랫사람을 대하실 때 언제나 예의를 갖추시는 분으로, 자신의 요구에 종종 “부디” 혹은 “청컨대”라고 부가하셨다. 벗인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부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리고 또한 “[“부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창세 13:14; 15:5, 「신세」 참조) 모세에게 능력의 표적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디”, 「신세」] 네 손을 품에 넣으라.” (출애굽 4:6) 여러 해 후에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미가를 통해서 변덕스러운 자기 백성에게까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미가 3:1, 9)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공손한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는가?—에베소 5:1.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배척하는 성서적 지침이나 교훈을 대신해서 어떤 지침이나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는가? 이어지는 기사에서 이 점을 고려할 것이다.

[4면 삽입]

일상 예모가 더 이상 일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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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는 그의 어머니에게 가려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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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태도는 약자의 위장된 힘이다”

[3면 사진 자료 제공]

Left: Life; Right: Grand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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