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94 11/1 8-15면
  • 우리는 히틀러의 전쟁을 지원하지 않았다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우리는 히틀러의 전쟁을 지원하지 않았다
  • 깨어라!—1994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
  • 열심 있는 봉사
  • 히틀러가 정권을 잡다
  • 순응시키려는 압력
  • 아버지의 충절의 본
  • 내게도 시험이 시작되다
  • 시련과 투옥
  • 가혹한 수용소 생활
  •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함
  • 증거의 기회
  • 생활이 나아지다
  • 전쟁이 끝나갈 무렵
  •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
  • 담대하게 인내함
  •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전체주의 정권 아래서 살아남도록 도와주셨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7
  •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갚아 드릴 수 있을까?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9
  • 증오가 사랑으로 변하다
    깨어라!—1995
  • 나치 독일에서 충절을 고수함
    깨어라!—1993
더 보기
깨어라!—1994
깨94 11/1 8-15면

우리는 히틀러의 전쟁을 지원하지 않았다

프란츠 볼파르트의 체험담

나의 아버지 그레고르 볼파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 중에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복무하였고 이탈리아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모두 합쳐서 수십만 명의 오스트리아인과 이탈리아인이 살육당하였다. 그 끔찍한 경험은 종교와 전쟁에 대한 아버지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사제들이 군대를 축복하는 것을 보았으며, 반대편의 이탈리아 사제들도 똑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왜 가톨릭 신자인 군인들이 다른 가톨릭 신자들을 죽이도록 부추깁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전쟁을 벌여야 합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사제들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주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

전쟁이 끝난 뒤에 아버지는 결혼하여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경 근처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산악 지대에 정착하였다. 나는 1920년에 그 곳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가족은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상트마르틴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곳은 휴양지인 푀르트샤크 읍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 가족이 그 곳에 살고 있을 때, 여호와의 증인(당시에는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렀음) 봉사자들이 나의 부모를 방문하였다. 1929년에 그들이 전해 준 「확실히 도래할 번영」(Prosperity Sure)이라는 소책자는 아버지가 품고 있던 많은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 소책자는 이 세상이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보이지 않는 통치자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성서로부터 보여 주었다. (요한 12:31; 고린도 둘째 4:4; 계시 12:9)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목격하였던 끔찍한 일들은 사탄이 이 세상의 종교, 정치, 상업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일어나게 한 것이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찾고 있던 대답을 발견한 것이다.

열심 있는 봉사

아버지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 서적을 주문해서, 처음에는 친척들에게 나중에는 집집으로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스무 살밖에 안 된 이웃 청년 한스 슈토시어가 곧 아버지와 합세하여 호별 방문 봉사를 하였다. 오래지 않아 우리 친척 중 다섯 명, 즉 큰아버지 프란츠와 큰어머니 안나, 나중에는 큰아버지의 아들 안톤 그리고 고모 마리아와 고모부 헤르만도 증인이 되었다.

이 일은 우리가 살고 있던 상트마르틴이라는 작은 마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학교에서 한 학생이 가톨릭 교사에게 “로이게 신부님, 볼파르트가 숭배하는 새로운 신(神) 여호와는 누구예요?”

“아니야, 얘들아. 그게 아니란다” 하고 그 사제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새로운 신이 아니야.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란다. 만일 그들이 그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그 소식을 전파한다면 그건 아주 훌륭한 일이란다.”

아버지가 여러 차례 성서 서적과 샌드위치를 챙겨서 새벽 1시에 집을 나서던 일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예닐곱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탈리아 국경 근처에 있는 제일 먼 봉사 구역에 도착하곤 하였다. 가까운 구역에 갈 때는 나도 따라가곤 하였다.

아버지는 공개 봉사를 수행하는 중에도 가족의 영적 필요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우리 6남매를 데리고 「하느님의 거문고」 책으로 일 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의 시간에 우리 집은 관심을 가진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로 붐볐다. 오래지 않아 우리가 살던 작은 마을에는 26명의 왕국 선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형성되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다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고 곧 이어 그 곳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다. 1937년에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 참석자들은 앞에 놓인 시련에 대해 경고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박해에 대비하라고 우리 모두를 격려하였다.

한편 16세가 된 나는 페인트칠하는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 페인트 기술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실업 고등 학교에 다녔다. 그 학교에서는 나치 정권을 피해서 독일을 빠져 나온 한 연로한 사제가 종교 수업을 맡고 있었다. 학생들이 그 사제에게 “하일 히틀러!” 하고 인사하자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된거죠?” 하고 물었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예수께서는 자기 추종자들 모두가 형제라고 하셨는데 왜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하”, “성부 각하”와 같은 칭호들을 사용하는지 질문하였다. (마태 23:8-10) 그 사제는 그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인정하면서, 자기도 주교에게 절하거나 손에 입맞추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동료 가톨릭 신자를 죽이러 나가는데 어떻게 교회가 그것을 축복할 수 있습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군!” 하고 그 사제는 소리쳤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교회는 전쟁에 가담해서는 안 되니까.”

1938년 3월 12일, 히틀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오스트리아로 진격해 들어왔고 곧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신속히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 사실, 일 주일도 안 되어 테오도르 인니체르 추기경을 포함한 오스트리아의 주교 여섯 명 모두가 열렬한 “충성 선언문”에 서명했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다가오는 선거 때 “우리 주교들이 독일 제국을 위해 투표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독일인으로서의 국민적 의무이다”라고 말하였다. (9면 참조) 빈에서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인니체르 추기경은 제일 먼저 나치식 경례로 히틀러에게 인사한 사람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 추기경은 오스트리아의 모든 교회에 스바스티카 기를 게양하고, 교회의 종을 울리며, 그 나치 독재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정치 분위기가 하룻밤 사이에 돌변한 것 같았다. 갈색 제복을 입고 스바스티카 완장을 두른 나치 돌격대원들이 갑자기 눈에 띄게 늘어났다. 교회는 전쟁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일전의 그 사제는 다른 몇몇 사제와 함께 “하일 히틀러!”라고 말하기를 거부하였다. 그 다음 주에 그 사제의 자리가 새로운 사제로 대치되었다. 새로운 사제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두 발꿈치를 딱 부딪치고 팔을 들어 경례하면서 “하일 히틀러!”라고 말하였다.

순응시키려는 압력

모든 사람이 나치의 압력을 받았다. 내가 “하일 히틀러”가 아니라 “구텐 탁”(안녕하세요)이라고 인사하면 사람들은 화를 냈다. 나는 열두 번 정도 게슈타포에 고발당하였다. 한번은 나와 함께 생활하던 페인트 기술자에게 돌격대원들이 몰려와서는 만일 내가 경례를 하지 않고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에 가입하지 않으면 강제 수용소로 가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나치 동조자인 그 페인트공은 내가 결국에는 태도를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좀더 참아 달라고 그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내가 일을 잘하기 때문에 잃고 싶지 않다고 설명하였다.

나치 점령 후 대규모 행진이 밤늦게까지 있었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구호를 외쳐댔다. 날마다 라디오에서는 히틀러, 괴벨스, 그 외 사람들의 연설이 울려 나왔다.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히틀러를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함에 따라, 히틀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복종은 더욱 철저해졌다.

아버지는 나에게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여호와께 헌신하여 침례받을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아버지는 이웃에 사는 한스의 여동생 마리아 슈토시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마리아는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마리아와 나는 결혼하기로 하였고, 아버지는 나에게 마리아를 영적으로 격려하라고 권하였다. 마리아와 나는 1939년 8월에 마리아의 오빠 한스한테 침례를 받았다.

아버지의 충절의 본

이튿날 아버지는 군 복무에 징집되었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겪은 고생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서 어떻게든 군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면담자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과거에 가톨릭 신자였을 때처럼 전쟁에 가담하는 일을 이제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추가 조사를 받기 위해 구금되었다.

1주 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빈으로 이송되었다. 아버지가 그 곳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우리 지역의 읍장은 다른 증인들이 히틀러를 지원하기를 거부한 데 대한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으므로 아버지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썼다. 그 결과, 아버지는 베를린으로 보내졌으며 얼마 뒤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아버지는 모아빗 감옥에 수감되어 밤낮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가족을 대표하여 아버지에게 우리는 아버지의 충실한 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아버지는 보통 때는 감정에 치우치는 편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가 눈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자기의 입장을 이해해 준 데 대해 무척 행복해하였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충실을 유지하라고 격려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왔다. 부활에 대한 아버지의 희망은 강하였다.

아버지 외에도 수십 명의 다른 증인들이 모아빗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고위 관리들은 그 증인들을 설득해서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1939년 12월에 약 25명의 증인이 처형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버지가 죽기까지 충실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깊이 감사하였다.

내게도 시험이 시작되다

몇 주 후에 나는 근로 봉사를 하도록 소집되었는데 알고 보니 군사 훈련이 주된 일과였다. 나는 다른 일이면 몰라도 군 복무는 하지 않겠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내가 나치의 군가 부르기를 거부하자 장교들은 격분하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지급받은 군복 차림이 아니라 민간인 복장으로 나갔다. 담당 장교는 하는 수 없이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둬야겠다고 말하였다. 지하 감옥에서 나는 빵과 물만 먹고 근근이 연명해 나갔다. 나중에 기 경배 의식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면 총살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연병장에는 군 장교들 외에도 300명의 신병들이 있었다. 장교들과 스바스티카 기 곁으로 걸어가면서 히틀러식 경례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세 히브리인에 대한 성서 기록으로부터 영적인 힘을 얻고, 지나가면서 그냥 “구텐 탁”(안녕하세요)이라고 말하였다. (다니엘 3:1-30) 한 번 더 지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장교 네 명이 나를 지하 감옥으로 도로 데려가면서 내가 총살당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자네는 미소를 짓고 우리는 애를 태웠으니 말이야.” 장교들은 자기들도 나와 같은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며칠 후 베를린에 있는 히틀러 본부의 고위 관리인 알멘딩거 박사가 막사에 도착하였다. 나는 그의 앞에 불려갔다. 그는 법이 더 엄해졌다고 말하였다. “자네는 이 일로 무슨 일을 감수해야 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하고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도 불과 몇 주일 전에 동일한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베를린에서 온 또 다른 관리가 내 생각을 돌려 보려고 재차 시도하였다. 그는 내가 왜 하느님의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하는지 듣고 나서는, 내 손을 잡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의 생명을 구해 주고 싶네!” 옆에서 지켜 보던 장교들 모두가 매우 감동되었다. 그 다음에 나는 다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서 도합 33일간 거기서 지냈다.

시련과 투옥

1940년 4월, 나는 퓌르스텐펠트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며칠 뒤에 약혼녀 마리아와 동생 그레고르가 면회를 왔다. 그레고르와 나는 나이 차이가 1년 반밖에 나지 않았으며, 그는 학교에서 성서 진리를 옹호하는 확고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레고르가 여호와를 섬기는 일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며 박해에 대비하라고 남동생들을 격려하던 기억이 난다! 서로 격려했던 그 소중한 시간을 마지막으로 더는 살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후에 그라츠에서, 5년간의 강제 노동을 선고받았다.

1940년 가을, 나는 기차를 타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가게 되어 있었지만, 빈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곳의 상황은 비참하였다. 배가 고픈 것은 기본이었고 밤새 큰 벌레들에 물려 살갗에서 피가 나고 불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당시에 나는 어떤 이유에선가, 그라츠에 있는 감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 경우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는데, 게슈타포가 여호와의 증인을 하늘의 상을 얻기 위해 사형 선고를 받고 싶어하는 광신적인 순교자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라츠 대학에서 온 한 명의 교수와 여덟 명의 학생들 앞에서 이틀 동안 증거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14만 4000명만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 위해 하늘로 올려 갈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계시 14:1-3) 나의 희망은 낙원이 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시 37:29; 계시 21:3, 4.

이틀 동안 질문하고 나서 그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의 생각이 이치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네. 자네의 소원은 죽어서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로군.”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박해받는 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했고 무사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1941년 초, 나는 독일의 롤발트 강제 중노동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오르게 되었다.

가혹한 수용소 생활

프랑크푸르트와 다름슈타트 사이에 있는 롤발트에는 5천 명 가량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었다. 매일의 일과는 새벽 5시의 점호로 시작되었다. 장교들이 늑장을 부리며 죄수들의 명단을 새로 고쳐 적었기 때문에 점호를 하는 데는 두 시간 정도나 걸렸다. 우리는 부동 자세로 서 있어야 했는데 많은 죄수는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심하게 구타당하였다.

아침 식사로는 밀가루와 톱밥으로 만든 빵과 감자를 받았는데, 감자는 종종 썩어 있었다. 다음에 우리는 습지로 일하러 갔는데, 농사를 짓기 위해 도랑을 파서 토지에서 물을 빼내는 일을 하였다. 변변한 신발 하나 없이 습지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발이 스펀지처럼 퉁퉁 부어 오르곤 하였다. 한번은 내 양쪽 발에 괴저처럼 보이는 것이 생겨서 발을 잘라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였다.

정오가 되면 우리는 작업장에서 실험용으로 이것저것을 섞어 만든, 소위 수프라는 것을 받았다. 순무나 양배추로 맛을 낸 것인데, 어떤 때는 병든 동물의 시체를 다져서 섞어 주기도 하였다. 입과 목구멍이 불붙은 것처럼 화끈거렸고, 많은 사람의 몸에 커다란 종기가 났다. 저녁에는 더 많은 “수프”를 받았다. 치아를 잃는 죄수가 많았지만, 나는 치아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소나무 조각이나 개암나무 가지를 씹곤 해서 치아를 하나도 잃지 않았다.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함

믿음을 깨뜨리려는 시도로, 경비원들은 다른 증인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나를 격리시켰다. 성서 서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암기하고 있던 성구들, 이를테면,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잠언 3:5, 6(「신세」 참조)이나,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유혹당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는 고린도 첫째 10:13과 같은 성구들을 머리에 떠올리곤 하였다. 이러한 성구들을 정신에 되새기고 기도로 여호와께 의지함으로 강화되었다.

때때로 다른 수용소에서 이감 온 증인을 볼 수 있었다. 말할 기회가 없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불끈 쥔 주먹을 쳐들어서, 굳게 서도록 서로를 격려하였다. 가끔 마리아와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한 편지에서는 사랑하는 동생 그레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전쟁이 끝나갈 즈음에 받은 또 다른 편지에서는 마리아의 오빠 한스 슈토시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후에, 한 죄수가 우리 막사로 옮겨 왔는데, 그레고르를 알고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모아빗 감옥에서 그레고르와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 죄수를 통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알 수 있었다. 그레고르는 단두대에서 처형되도록 선고받았는데, 그의 충절을 깨뜨리려고 사형 집행 전의 관례적인 대기 기간을 4개월로 연장했다는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타협시키려고 온갖 압력을 가했는데, 그의 손과 발에 무거운 쇠사슬을 채워 놓았고 먹을 것도 거의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끝—1942년 3월 14일—까지 충실을 유지하였다. 그 소식은 나를 슬프게 하였지만,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도록 강화시켜 주었다.

얼마 후에 두 남동생 크리스티얀과 빌리발트, 두 여동생 이다와 아니가 교화원으로 사용되던 독일 론다우의 수녀원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동생들은 하일 히틀러 경례를 거부했기 때문에 심하게 구타당하였다.

증거의 기회

나와 같은 막사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범과 일반 범죄자들이었다. 나는 종종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증거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카펜베르크에서 온 요한 리스트라는 가톨릭 사제였다. 그는 영국 방송에서 들은 내용을 자기 신도들에게 말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요한은 고된 육체 노동에 익숙지 않아서 무척 고생하였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작업 할당량을 완수하도록 도와서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주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 원칙을 고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된 것이 수치스럽다고 말하였다. “자네는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을 겪고 있는데 말이야” 하고 그는 말하였다. 약 1년 후에 석방될 때 그는 나의 어머니와 약혼녀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지켰다.

생활이 나아지다

1943년 말에 카를 슈툼프라는 새로운 수용소장이 부임하였는데, 키가 크고 백발이었으며, 우리 수용소의 상태를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 저택에 페인트칠을 할 계획이었는데, 내가 페인트공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일을 내게 맡겼다. 호출을 받고 그 때 처음으로 습지 작업에서 벗어났다.

소장의 아내는 남편이 내가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에 거기에 갇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도 내가 왜 수감되었는지 이해하기를 어려워하였다. 너무나 야위어서 불쌍했는지 소장의 아내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가 일감을 더 많이 마련해 준 덕분에, 나는 건강이 호전될 수 있었다.

1943년이 끝나갈 무렵, 수용소의 죄수들이 최전선에서 싸우도록 차출되었을 때, 나는 슈툼프 소장과 좋은 관계를 가진 덕분에 살아 남았다. 나는 전쟁에 가담해서 유혈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그에게 설명하였다. 나의 중립 입장이 그를 난처하게 했지만, 그는 내 이름을 차출자 명단에서 빼 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1945년 1월과 2월에는 미군기가 저공 비행을 하면서 전쟁이 끝나간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내 생명을 구해 주었던 슈툼프 소장은 나에게 민간인 옷을 마련해 주고 자기 저택에 숨겨 주었다.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 나는 엄청난 혼란을 목격하였다. 예로서, 전쟁 무기를 든 어린이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미국인들 앞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어쩌다가 친위대 장교와 마주치게 되면 내가 왜 총을 들고 있지 않는지 수상하게 여길 것이 두려워서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얼마 후에 우리 수용소는 미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1945년 3월 24일, 그 수용소는 백기를 달고 항복하였다. 나는 슈툼프 소장이 최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수용소 부속 건물에 남겨 둔 증인이 나 외에 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서로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정말 기뻤다! 슈툼프 소장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미군 장교들에게 가서 그 소장을 위해 직접 증언하기도 하고 서면으로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사흘 뒤에 풀려났다.

놀랍게도 나는 약 5천 명의 죄수들 가운데 제일 먼저 풀려났다. 5년간이나 갇혀 있던 터라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지켜 주신 여호와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독일은 그로부터 약 6주 후인 1945년 5월 7일이 되어서야 항복하였다.

석방되고 나서, 나는 즉시 그 지역에 있는 증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성서 연구 집단을 조직하였고, 그 다음 주에는 수용소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페인트공 일자리를 얻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

7월에는 오토바이를 살 수 있었고 곧 이어 집으로 돌아가는 긴 여행을 시작하였다. 주요 도로에 있는 많은 다리가 폭파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여행은 여러 날이 걸렸다. 드디어 집이 있는 상트마르틴에 도착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다가 밀을 추수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았다. 마리아도 마침내 나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그 행복한 재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도 낫을 내던지고 달려왔다.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는 96세의 나이에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또렷하며 여전히 여호와의 충실한 증인이다.

마리아와 나는 1945년 10월에 결혼하였고, 그 때부터 여러 해 동안 함께 즐거이 여호와를 섬겨 왔다. 우리는 딸 셋과 아들 하나 그리고 손자녀 여섯을 보는 축복을 누렸으며, 그들 모두가 여호와를 열심히 섬기고 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수십 명이 성서 진리를 옹호하도록 돕는 만족감을 맛보았다.

담대하게 인내함

청소년에 불과했는데도 어떻게 두려움 없이 죽음에 직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여러 번 받은 적이 있다. 충성을 지키기로 결심하면 여호와 하느님께서 인내할 힘을 주신다는 점을 확신하라. 기도를 하면 여호와께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아주 신속히 배우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도 죽기까지 충실을 유지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 나 역시 충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호와의 백성은 유럽에서만 전쟁에서 편을 들지 않은 것이 아니다.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 중에 히틀러의 한 고위 관리가 강제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한 일에 대해 심문받던 일이 기억난다. 그는 오려 낸 신문 기사를 주머니에서 꺼냈는데, 그 기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에서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이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실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하느님께 충절을 유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담대히 따른다. 나는 이 날까지도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상트마르틴의 우리 작은 회중에 있던 14명의 성원들을 종종 생각한다. 그들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히틀러의 전쟁을 지원하기를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이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영원 무궁토록 삶을 즐기기 위해 다시 돌아올 때, 그 재연합은 참으로 웅대할 것이다!

[8면 삽화]

나의 아버지

[8, 9면 삽화]

아래와 왼쪽: 독일 제국을 지지하는 투표를 하고 있는 인니체르 추기경

오른쪽: 여섯 명의 주교가 ‘독일 제국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선언한 “충성 선언문”

[자료 제공]

UPI/Bettmann

[10면 삽화]

1939년에, 나는 마리아와 약혼하였다

[13면 삽화]

우리 가족.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레고르(참수당함), 아니, 프란츠, 빌리발트, 이다, 그레고르(아버지, 참수당함), 바르바라(어머니), 크리스티얀

[15면 삽화]

마리아와 나의 현재 모습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