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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하느님의 돌보심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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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하느님의 돌보심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방법
  • 깨어라!—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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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5
깨95 7/1 22-25면

내가 하느님의 돌보심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방법

나는 1963년 5월 18일 아침, 평상시보다 훨씬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름답고 화창한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날이 나에게 왜 그렇게 특별한 날이었는지 설명하기에 앞서 나 자신에 대하여 약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1932년 5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한 가정에서 네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두 살 때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재혼하였다. 얼마 안 있어 우리 가족에 형제 자매가 여섯 명이 더 생겼다. 우리는 침례교인이었기 때문에 나는 한때 주일 학교 선생이 되려는 생각을 갖기도 하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류머티스성 관절염이 있어서 어린 시절을 아주 힘들게 보냈다. 아홉 살 때, 의사가 나에게 시간이 가면 상태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열네 살이 되자 나는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손, 발, 다리가 완전히 부자유하게 되었고, 고관절이 뻣뻣해져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손가락은 몹시 기형이 되어 글씨를 쓰거나 단지 물건을 집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나의 상태 때문에 더는 공립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열네 살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간호사들이 자기들을 돕도록 자질구레한 일을 시켜 주어 기뻤다. 나는 이 일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혼자서는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의사들은 나를 위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내 부모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3개월을 보낸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2년 동안,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얼마 동안 가정 교사에게 지도를 받았지만, 그 때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 오른쪽 발목에 류머티스열뿐 아니라 궤양이 생겨 다시 병원에 갈 필요가 있었다. 병원에서 열일곱 살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병원에 3개월간 있게 되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더는 개인 지도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가 되어 갈 무렵 나는 몹시 비참한 생각이 들어 대부분의 시간을 울며 보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에게 나를 도와 달라고 여러 번 기도하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

발목에 대한 치료를 더 받기 위해 필라델피아 종합 병원에 있을 때, 미리엄 켈룸이라는 한 소녀와 같은 병실에 있게 되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미리엄의 언니 캐서린 마일즈가 문병을 오면 캐서린은 나에게 성서에서 얻은 지식을 알려 주곤 하였다. 나는 퇴원한 후에도 어떻게 해서든 캐서린과 항상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불행하게도, 계모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25세 때 나는 한 언니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캐서린도 마침 다음 골목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하였고, 그는 「하느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는 책을 연구 보조 서적으로 사용하여 나와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언제나 신체 장애인으로 있을 것이 아니며, 언젠가 모든 악이 제거될 것이라는 점을 배워 참으로 기뻤다! (잠언 2:21, 22; 이사야 35:5, 6) 부활의 희망과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될 전망과 함께 이러한 진리가 나의 마음을 끌었다.—사도 24:15.

나는 즉시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캐서린의 남편이 나를 들어다가 그들의 차에 태워 왕국회관에 데리고 가곤 하였다. 집회에 가면 나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으로 인해 격려를 받았다.

장애물들을 극복함

유감스럽게도 언니와 형부가 이혼하는 바람에 나는 또다시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살아야 하였다. 계모가 여호와의 증인을 몹시 반대하였기 때문에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성서 연구를 몰래 해야 하였다. 계모는, 여호와의 증인은 일체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과 전화로 연구하거나 병원에 있을 때 연구하였다.

또 하나의 장애물은 이따금 계모가 음식을 주고 목욕을 시켜 주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여덟 달 동안이나 내 머리를 감겨 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또한 계모는 자기가 먼저 살펴보고 허락하지 않는 우편물은 일체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돌보고 계심이 분명하였다. 남동생이 내 우편물을 자기 집 주소로 받아보도록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련 덕분에, 나와 서신 교환을 하는 그리스도인 자매 패트 스미스가 계속 나에게 연락을 하여 성서적인 격려를 베풀어 줄 수 있었다. 남동생은 그 자매가 보낸 편지를 나에게 몰래 갖다 주었고, 내가 답장을 쓰면 그 편지를 몰래 가지고 나가곤 하였다.

1963년, 나는 다시 병원에 가야 하였고, 패트 스미스는 병원에서 나와 연구를 계속하였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순회 대회에서 침례받고 싶으세요?”

“네!”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나는 재활 준비 병동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 외출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순회 대회가 열리는 날 패트가 다른 증인들과 함께 나를 데리러 왔다. 형제들은 나를 들어 칸막이 너머로 넘겨 준 다음, 나를 내려서 침례받을 수 있도록 물 속에 넣어 주어야 하였다. 이제 나도 여호와의 종이 되었다! 그 날은 1963년 5월 18일, 결코 잊지 못할 날이었다.

요양원을 들락날락함

11월에 병원에서 퇴원해야 하였으나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곳에서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제한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양원에 들어갈 마련을 하였다. 요양원에서 나는, 증인들이 호별 봉사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또한 부고란을 읽은 다음 최근에 사망한 사람들의 친족에게 편지를 써서 위안이 되는 성서 구절들을 함께 적어 보냈다.

그러다가 1964년 5월, 나는 뉴욕 시로 이사가 큰언니와 형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형부가 나에게 처음으로 휠체어를 사 주었고, 나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뉴욕 시에 사는 동안 신권 전도 학교에서 첫 연설을 하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1965년 초, 필라델피아에서 온 몇몇 친구들이 자기들과 함께 두 주간을 보내자고 청하였다. 필라델피아에 머무는 동안 언니가 나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나를 더 이상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므로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시 요양원에 들어갈 마련을 하였다. 요양원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집회에 참석하고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 지금은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로 알려져 있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내가 봉사의 직무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사랑에 찬 돌봄을 받아들임

여호와께서 돌보고 계시다는 또 다른 증거는, 여호와의 증인의 필라델피아 서부 회중이 나에게 베풀어 준 도움이었다. 그들은 나를 그리스도인 집회에 데리고 가는 것은 물론, 내 봉사의 직무에 필요한 문구류나 기타 물품들을 공급해 주었다.

1970년에, 여호와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었는데, 그 해에 나는 그리스도인 자매이자 은퇴한 간호사인 모드 워싱턴의 집에 들어가 살도록 마련되었다. 그는 당시 70세가 다 되었지만, 더 이상 나를 돌볼 수 없게 될 때까지 그 후 2년 동안 나를 기꺼이 돌보아 주었다.

모드 워싱턴과 함께 사는 동안, 필라델피아 리지 회중의 형제들은 내가 틀림없이 모든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도와 주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일 주일에 세 번씩 나를 데리고 3층이나 되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여야 하였다. 내가 집회에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렇게 충실히 수고해 준 사람들에게 나는 참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1972년, 워싱턴 자매가 나를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자 나는 나 자신의 아파트를 하나 구입하기로 결심하였다. 리지 회중 그리스도인 자매들의 자기 희생적인 도움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조정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위해 먹여 주고, 씻겨 주고, 내 개인적 필요를 돌보기 위한 마련을 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장을 봐 주고 기타 필요한 일을 돌보아 줌으로써 도와 주었다.

매일 아침 자매들이 일찍 도착해서 내가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혀 주었다. 내가 휠체어에 타도록 도와 준 다음 그들은 아파트의 조그만 구석 창가로 나를 밀어다 주었다. 나는 거기에 앉아 전화를 사용하고 편지를 써서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였다. 나는 내 아파트의 이 곳을 낙원 구역이라고 불렀다. 그 곳을 신권적인 그림으로 많이 장식해 놓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밤에 와서 나를 침대에 뉘어 놓을 때까지 나는 하루 종일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곤 하였다.

1974년, 건강 때문에 다시 입원할 필요가 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의사들은 수혈을 받도록 압력을 가하려고 하였다. 일 주일가량 지나서, 내 상태가 개선되자 그 의사들 중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아, 두 분이 기억나요. 두 분은 나에게 수혈을 받도록 설득하려고 하셨지요” 하고 나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을 줄을 우리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그들은 대답하였다. 나는 그 의사들에게 부활에 대한 성서의 약속과 지상 낙원에 대하여 증거할 기회가 있었다.—시 37:29; 요한 5:28, 29.

혼자서 살게 된 처음 10년 동안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아프지 않는 한 결코 집회에 빠지지 않았다. 궂은 날씨에는 친구들이 내 다리를 담요로 감싼 다음 덮개로 덮어서 젖지 않게 해주었다. 이따금 순회 감독자가 나를 보러 왔다. 그는 방문 도중, 내가 전화를 사용하여 성서 연구를 사회할 때 “동석”하곤 하였다. 나에게 참으로 기쁜 시기였다.

악화되는 상황에 잘 대처함

1982년, 나는 더 이상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집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17년간 계속해 온 파이오니아 봉사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나는 몹시 슬퍼서 자주 울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돌보고 계심이 분명하였다.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나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회중 서적 연구 집회를 갖도록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마련에 나는 지금도 매우 감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서 내 책상으로도 갈 수 없기 때문에, 가슴에 종이를 올려 놓고서 쓰는 연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쓴 것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많이 연습한 결과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얼마 동안은 다시 편지를 써서 증거할 수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기쁨을 느꼈다. 불행하게도, 나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더는 봉사의 직무의 이 부면에도 참여할 수가 없다.

1982년 이래, 몸은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없지만, 지역 대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대회 기분을 내려고 노력한다. 한 그리스도인 자매가 가슴표를 가지고 와서 내 가운에 달아 준다. 또한, 나는 텔레비전을 켜서 필라델피아 재향 군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를 보면서, 그 곳에서 지역 대회가 열리는 동안 내가 앉아 있곤 했던 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보통, 내가 대회 프로그램 전체를 들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프로그램을 녹음해 준다.

결코 포기하지 않음

이전에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때만큼 많이 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에 깨어 있다. 파이오니아를 하여 수많은 관심자가 성서 연구를 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 왔다. 지난 22년간 혼자 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방해받지 않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유를 누려 왔다. 집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또한 나 자신의 인간성을 바로잡기 위해 부지런히 힘쓸 필요를 느껴 왔다. 자진해서 나를 돕는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내 말이 언제나 은혜로운 것이 되지 못한 때가 이따금 있었다. (골로새 4:6) 이 면에서 개선하도록 도와 달라고 나는 여호와께 끊임없이 기도한다. 여러 해 동안 사랑을 가지고 나를 인내심 있게 대해 온 사람들이 나타낸 참을성 있고 용서하는 영에 대하여 정말로 감사한다. 그들의 사랑에 찬 도움은 축복이며, 나는 그 축복에 대해 그들과 여호와께 감사한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몸으로는 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딱 한 번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그 동안 아파트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으나—나는 여전히 기쁘고 행복하다. 물론 이따금 우울해질 때가 있지만, 여호와께서는 내가 그러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신다. 지금은 왕국회관으로 전화선을 연결해 집회에서 진행되는 내용을 듣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기도를 통해 여호와께 의뢰하고 그분을 신뢰해 왔기 때문에, 나는 결코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다. 그렇다. 나는 여호와의 돌보심으로부터 유익을 얻어 왔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설레스트 존스의 체험담.

[24면 삽화]

나는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이 곳을 낙원 구역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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