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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라!—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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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7
깨97 11/8 12-17면

닫혀 있던 세계를 연 인물

「깨어라!」 오스트레일리아 통신원 기

인간은 처음으로 달에 갈 때, 어디로 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갈 것인지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상과 교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519년에, 페르디난도 마젤란의a 소형 목선 다섯 척—길이는 대부분 약 21미터로 현대의 세미트레일러 정도 되었음—이 스페인을 떠났을 때, 그들은 미지의 세계로 항해를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완전히 단독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시대를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 용감한 항해 업적 가운데서도, 마젤란의 항해는 대(大)탐험 시대—용기와 두려움, 의기 충천과 비극, 하느님과 부(富)가 함께 뒤섞인 시대—의 기념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포르투갈 북부에서 페르디난도 마젤란이 태어날 당시인 1480년경으로 돌아가서, 닫혀 있던 세계를 연 그 비범한 인물과 그의 역사적인 항해에 관해 살펴보도록 합시다.

궁중 사환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뱃사람으로

마젤란 가문은 귀족 집안이기 때문에, 페르디난도는 관습대로 어린 소년일 때 왕궁에서 사환으로 일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 곳에서 페르디난도는 교육을 받는 것 외에도, 유명한 향료 제도(인도네시아)로 통하는 서부 항로를 찾은 후에 방금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같은 사람들의 업적을 직접 들어서 알게 됩니다. 얼마 안 있어, 어린 페르디난도는 자기도 머리 위에서 돛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며, 탐험되지 않은 대양의 물보라를 얼굴로 느낄 수 있는 날을 꿈꾸게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1495년에 페르디난도의 후원자인 주앙 왕이 암살당하고, 탐험이 아니라 부에 관심이 많은 마누엘 공이 왕위에 오릅니다. 어떤 이유에선가, 마누엘은 15세 된 페르디난도를 싫어하여, 항해를 하게 해 달라는 그의 요청을 여러 해 동안 묵살합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가 향료를 싣고 인도에서 돌아오자, 마누엘은 막대한 부의 냄새를 맡게 됩니다. 마침내 1505년에 마누엘은 마젤란에게 항해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립니다. 마젤란은 향료 무역에 대한 주도권을 아랍 상인들에게서 쟁탈하는 일을 돕기 위해 포르투갈 함대 소속으로 동아프리카와 인도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 후, 마젤란은 또 다른 군 원정대와 함께 더 동쪽에 있는 말라카로 항해하게 됩니다.

1513년에 모로코에서 있었던 작은 전투 중에, 마젤란은 무릎에 심한 상처를 입습니다. 그 결과, 마젤란은 남은 여생 동안 다리를 절게 됩니다. 그는 마누엘에게 연금 인상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마누엘의 적의는, 마젤란이 최근에 보여 준 영웅적인 행동과 희생과 용맹으로도 전혀 누그러지지 않습니다. 마누엘은 마젤란이 겨우 가난한 귀족으로 살 수 있을 만큼만 돈을 줘서 보냅니다.

마젤란은 그의 생애 중 가장 비참한 때인 이 시기에 오랜 벗이자 유명한 항해가인 주앙 데 리스부아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두 사람은 향료 제도에 당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토의하는데, 남서쪽으로 가서 엘 파소—남아메리카를 관통한다고 소문이 나 있던 해협—를 통과한 다음, 최근에 밸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통과하면서 발견한 대양을 횡단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대양 건너편 저 먼 곳에 향료 제도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젤란은 이제 콜럼버스가 하지 못한 일, 즉 동양으로 가는 서쪽 항로를 발견하게 되기를 갈망하는데, 그는 그 항로가 동쪽 항로보다 더 짧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재정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누엘의 격렬한 분노에 아직도 분개하고 있는 마젤란은 몇 년 전 콜럼버스가 직접 한 일을 하게 됩니다. 즉 스페인 왕에게 후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스페인 왕이 귀를 기울일 것인가?

마젤란이 지도를 펴서 스페인의 젊은 군주 카를로스 1세에게 그의 주장을 펼치자, 카를로스 1세는 향료 제도로 가는 마젤란의 서쪽 항로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나타냅니다. 서쪽 항로가 있으면 포르투갈의 항로를 침범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마젤란은 향료 제도가 실제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스페인의 영토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토르데시야스 조약” 네모 참조.

카를로스는 설득됩니다. 그는 수리해서 원정에 사용하도록 낡은 배 다섯 척을 마젤란에게 주면서 마젤란을 그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페인으로 가져오는 향료로 인해 생기는 이익을 나눠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젤란은 즉시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러나 마누엘 왕이 간교하게 그 계획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1년 이상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함대는 역사적인 항해를 할 준비가 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 업적”

1519년 9월 20일, 산안토니오호, 콘셉시온호, 빅토리아호, 산티아고호—크기순—가, 마젤란의 기함이자 두 번째로 큰 배인 트리니다드호를 따라 남아메리카로 항해를 합니다. 12월 13일, 그들은 브라질에 당도하여 팡 데 아수카르 즉 슈거로프 산의 웅장한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리우데자네이루 만으로 들어가 배를 수리하고 식량을 얻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엘 파소 즉 또 다른 대양으로 통하는 찾기 어려운 통로를 찾아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향해 계속 남쪽으로 갑니다. 그러는 동안, 날이 점점 추워지고 빙산이 나타납니다. 결국, 1520년 3월 31일, 마젤란은 산훌리안이라는 추운 항구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합니다.

이 때까지 이 항해는 콜럼버스의 첫 번째 대서양 횡단보다 여섯 배나 긴 기간이 걸렸는데도, 해협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기는 산훌리안의 날씨만큼이나 얼어붙어 있는데다, 일부 선장들과 장교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은 몹시 집에 가고 싶어합니다. 폭동이 일어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젤란의 신속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조처로, 그 폭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주모자 중 두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항구에 낯선 배들이 있으니, 강인한—그리고 체격도 큰—원주민들이 호기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거인들 앞에서 난쟁이가 된 것처럼 느낀 방문객들은 그 땅을 파타고니아—“큰 발”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단어에서 유래—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 곳은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크기가 송아지만한 바다늑대와 물 속으로 헤엄쳐 다니며 물고기를 먹고 까마귀와 비슷한 부리를 가진,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거위’를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독자가 짐작한 대로 그것들은 물개와 펭귄입니다!

위도가 극지방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맹렬한 폭풍이 갑작스럽게 불어닥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정대는 겨울이 끝나기 전에 첫 번째 재난을 당합니다. 크기가 작은 산티아고호가 좌초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승무원들은 좌초된 배에서 구조됩니다. 그 후, 나머지 네 척의 배는, 쉴새없이 불어대는 차디찬 강풍의 위력에 휩쓸려 다니는 날개 달린 작은 나방처럼, 물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남쪽으로 10월 21일까지 힘차게 내려갑니다. 물보라와 진눈깨비 속을 헤쳐 나가면서도, 모두는 서쪽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엘 파소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나중에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지게 되는 해협으로 돌아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의 순간도 잠시뿐입니다. 산안토니오호가 그 해협의 미로 속에서 의도적으로 사라져 스페인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나머지 세 척의 배는 황량한 피오르드와 눈 덮인 봉우리들 사이로 항해를 강행하여 그 꼬불꼬불한 해협을 통과합니다. 그들은 남쪽에서 수없이 많은 불을 보게 되는데, 아마도 인디오들의 촌락에서 피어오르는 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을 티에라델푸에고 즉 “불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태평양에서 겪은 시련

끔찍한 5주가 지난 후, 그들은 대양으로 항해하여 나오게 되는데, 어찌나 평화로워 보이던지 마젤란은 그 대양을 태평양이라고 명명합니다. 그 사람들은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대포를 쏴서 자기들의 정복을 자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취감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겪은 그 어떤 고난보다도 더 심한 고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바다는 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작은 바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자, 사람들은 점점 더 허기를 느끼고 쇠약해지고 병들어 갑니다.

강인한 이탈리아 사람인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계속 일지를 적습니다. 그는 이렇게 씁니다. “1520년 11월 28일 수요일, 우리는 ·⁠·⁠·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식량도 공급받지 못한 채 3개월 20일을 태평양에서 보냈다. ·⁠·⁠· 우리는 푸석푸석하고 벌레가 우글거리고 쥐가 똥을 싸 놔서 악취가 나는 오래 된 비스킷만 먹고 살았으며 ·⁠·⁠· 누렇게 돼서 악취가 나는 물을 마셨다. 우리는 또한 황소 가죽과 ·⁠·⁠· 나무 톱밥 그리고 한 마리에 값이 반 크라운이나 하는 쥐를 먹었는데, 그것마저 충분치가 않았다.” 그리하여, 돛이 상쾌한 무역풍을 한껏 받아 배의 용골이 맑은 물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감에 따라, 사람들은 괴혈병으로 쓰러져 부패해 갑니다. 1521년 3월 6일에 그들이 마리아나 군도에 당도할 무렵에는 19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섬 주민들의 적대감 때문에 약간의 신선한 식품만 겨우 얻어 가지고 항해를 계속합니다. 3월 16일, 그들은 마침내 필리핀을 보게 됩니다.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휴식을 취해 건강과 기력을 되찾습니다.

비극—좌절된 꿈

종교심이 깊은 마젤란은 그 곳에서 많은 원주민들과 그들의 통치자들을 가톨릭교로 개종시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은 또한 그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마젤란은 부족간의 분쟁에 말려들어 활과 총을 믿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라고 믿고는 단지 60명으로 약 1500명의 원주민을 공격합니다. 승리는커녕, 마젤란과 그의 몇몇 부하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마젤란의 나이는 약 41세입니다. 충성스러운 피가페타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귀감이요 빛이요 위로자요 진정한 인도자를 죽였다.’ 며칠 후에는, 안전한 배에서 구경만 한 약 27명의 직급이 높은 선원들이 한때 우호적이었던 추장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마젤란은 그가 익숙해 있었던 환경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약간 남쪽에는 향료 제도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그가 1511년에 전투를 벌인 말라카가 있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의 생각처럼, 만일 그가 말라카 전투가 있은 다음에 필리핀으로 항해해 간 것이라면, 그는 지구를 실제로 한 바퀴—물론, 한 번의 항해로 한 것은 아니지만—돈 것입니다. 마젤란은 동쪽과 서쪽 모두에서 필리핀에 도달한 것입니다.

귀항 길에도 재난이 닥치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의 수가 너무 적어 세 척의 배로 항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콘셉시온호를 침몰시키고 나머지 두 척의 배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향료 제도로 항해해 갑니다. 그런 다음, 그 두 척의 배에 향료를 가득 싣고 서로 헤어집니다. 그런데 트리니다드호의 승무원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잡혀서 수감됩니다.

그러나 빅토리아호는 이전에 폭동에 가담했던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의 지휘로 빠져 나갑니다. 그들은 한 군데만 제외하고는 모든 항구를 피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 항로로 항해합니다. 하지만 전략상, 식량을 얻기 위한 정박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1522년 9월 6일—떠난 지 3년 만—에 그들이 마침내 스페인에 당도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병으로 수척해진 18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해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데 엘카노는 영웅입니다. 믿어지지 않게도, 빅토리아호에 실려 있는 26톤의 향료는 전체 원정에 들어간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충분합니다!

길이 기억될 마젤란의 이름

여러 해 동안 마젤란은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폭동에 가담했던 선장들이 낸 소문에 영향을 받아 마젤란이 거칠고 무능한 사람이었다고 말함으로 그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마젤란을 반역자로 낙인찍습니다. 안타깝게도, 마젤란이 죽자 그의 항해 일지는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그 일지로 인해 비행이 폭로될 사람들이 없애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꺾일 줄 모르는 의지를 가진 피가페타—세계 일주 항해를 한 18명 가운데 한 사람—와 5명가량의 다른 원정대원들 덕분에, 우리는 비극적이었지만 비범했던 이 항해에 대한 기록을 약간이나마 가지고 있습니다.

때가 되자, 역사는 재평가를 내렸으며, 오늘날에는 마젤란이라는 이름이 합당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한 해협이 마젤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마젤란운(雲)—마젤란의 선원들이 최초로 묘사한 남쪽에 있는 두 개의 흐릿한 은하—과 마젤란 우주 탐사선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대양—태평양—의 이름도 마젤란이 지었습니다.

실로, “447년 후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까지는 인간이 한 여행 가운데 그토록 중요성을 띤 것은 없었다”고, 리처드 험블은 「마젤란의 항해」(The Voyage of Magellan)라는 책에서 기술합니다. 그 항해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항해로 인해 콜럼버스의 생각과는 달리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의 일부도 아니고 아시아에서 가깝지도 않다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 둘째로, 그 항해가 끝났을 때 날짜가 하루 차이가 남으로 인해 날짜 변경선의 필요성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 저술가인 이자크 아시모프가 말한 바와 같이 그 항해로 인해 땅이 구체라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점과 관련하여, 마젤란은 성서 자체가 2250년 동안 이야기해 오던 것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이사야 40:22, 「신세」 참조; 비교 욥 26:7) 닫혀 있던 세계를 연 이 종교심 깊은 인물이 그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틀림없이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각주]

a 그의 포르투갈어 이름은 페르낭 데 마갈량이스였다.

[14면 네모]

토르데시야스 조약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들 두 나라 앞에 광대한 세계가 펼쳐지자, 조약을 통해 새로운 땅에 대한 무역권과 주권을 나누어 갖기로 동의하였다. 따라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감독 아래 오늘날의 브라질을 통과하는 경선(經線)을 그었다. 이 선의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포르투갈의 소유가 되고, 나머지는 스페인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양극(兩極)을 통과하여 지구 반대편에 이르도록 이 선을 연장해 보면, 향료 제도는 사실상 스페인의 영토에 속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젤란이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에게 짐작으로 말한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태평양이 실제보다 훨씬 작았다고 생각한 널리 퍼져 있던 개념에 근거하여 그처럼 솔직하게 말하였기 때문에 마젤란은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젤란은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믿음은 스페인 왕의 후원을 요청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15면 네모와 삽화]

초기 선원들이 겪은 시련

특히, 좀더 긴 탐험 항해의 경우—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음—직급이 낮은 선원들의 생활은 결코 즐거운 항해가 아니었다. 여기에 언급된, 선원들이 처했던 상황은 단지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 애처로울 정도로 비좁은 숙소와 프라이버시의 부족

• 선장의 기분에 따라 잔인한 형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 비타민 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과 죽음

• 난파로 인한 죽음, 굶주림, 갈증, 햇볕이나 비바람에 노출되는 일, 원주민

• 더럽고 부패한 식수로 인한 이질이나 장티푸스

• 세균이 득실거리는 부패한 음식으로 인한 식중독

• 굶주린 쥐에게 물려서 걸리는 서교증(鼠咬症)

• 더러운 몸과 옷에 우글거리는 이를 통해 걸리게 되는 발진티푸스

•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할 때, 살아서 집에 돌아갈 가능성은 반반 정도였다

[자료 제공]

Century Magazine

[16, 17면 네모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마젤란의 항해, 1519-22년

⇦••• 항로 □ 출발점이자 종료점

마젤란 해협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죽임을 당했다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의 마지막 항해 구간

[자료 제공]

마젤란: Giraudon/Art Resource, NY; 세계 지도: Mountain High Maps® Copyright © 1995 Digital Wisdom, Inc.; 아스트롤라베: Courtesy of Adler Planetarium

[16면 삽화]

페르디난도 마젤란

[16면 삽화]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한 배인 “빅토리아호.” 이 배는 마젤란의 배 다섯 척 가운데 네 번째로 큰 배였으며 승무원 수는 45명이었다. 이 배의 길이는 약 21미터였다

[17면 삽화]

항해 도구: 모래 시계로 시간을 재고, 아스트롤라베로 배가 위치한 곳의 위도를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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