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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찰, 제1권
통-1 “벳-스안”

벳-스안

(Beth-shean), 벳-산 (Beth-shan)

원래 가나안 사람들의 주요 요새 도시 가운데 하나. 이곳은 요르단 골짜기에서 이스르엘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베이산(베트셰안)이라는 이름에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곳의 고대 유적은 그 인근의 텔엘후슨(텔베트셰안)에 있다. 벳-스안 지역의 땅은 해수면보다 약 120미터나 낮은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급격하게 고도가 낮아져 5킬로미터쯤 떨어진 요르단 강변에서는 해수면보다 약 275미터나 낮아지게 된다. 이러한 내리막 경사지의 언저리에 있는 큰 둔덕 위에 세워진 벳-스안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벳-스안의 서쪽에는 얄루드 강(나할하로드)이 흐르는 평탄한 골짜기 평야가 있는데, 이 평야는 물이 넉넉하고 비옥하며 서북서쪽으로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이스르엘에 이르기까지 완만하게 고도가 높아진다.

[881면 삽화]

이 둔덕 위에 세워졌던 벳-스안은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벳-스안은 또한 지중해 연안에서 요르단 골짜기까지, 이어서 다마스쿠스와 아라비아까지 뻗은,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는 도로가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성읍이었다.

벳-스안에서 행해진 고고학 발굴 조사에서는 여러 겹 또는 여러 층의 고대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유적은 그 연대가 아브라함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1권, 959면 도해 참조) 기원전 두 번째 천년기의 중반 무렵, 벳-스안은 투트모세 3세가 므깃도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이집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 같다. 고고학적 증거는 이곳이 몇몇 파라오의 통치 기간에 이집트의 전초 기지였음을 알려 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였을 때(기원전 1473년-1467년경) 벳-스안은 잇사갈에게 분배된 영토 내에 있었지만 므낫세 지파의 소유로 할당되었다. (수 17:11; 대첫 7:29) 므낫세 사람들은 벳-스안을 비롯하여, 그 골짜기에 있는 성읍들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는데, 그들은 철낫이 달린 병거를 가진 가나안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는 그들의 사령관인 여호수아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쫓겨나지는 않았지만 결국 강제 노역을 하게 될 정도로 정복되었다.—수 17:12, 13, 16-18; 판 1:27, 28.

벳-스안은 사울 왕의 통치 때 블레셋 사람들의 소유였다. 사울이 그 인근에 있는 길보아 산에서 패한 후, 승리를 거둔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무기를 “아스도렛 형상들의 집”에 두고 그의 머리는 다곤의 집에 두었으며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는 벳-산(벳-스안) 성벽에 매달았는데, 아마도 도시의 광장을 향하여 성벽 안쪽에 매단 것 같다. 이곳으로부터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요르단 강 맞은편의 야베스-길르앗에 사는 용감하고 대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시체들을 가져왔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마도 밤중에 그 도시로 침투해 들어갔을 것이다.—삼첫 31:8-13; 삼둘 21:12; 대첫 10:8-12.

위의 내용과 일치하게, 텔엘후슨에서 행해진 발굴 조사에서는 두 개의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스도렛(아슈토레트)의 신전으로 여겨지며, 그보다 남쪽에 있는 다른 신전은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다곤의 신전으로 생각된다. 아스도렛의 신전은 기원전 10세기경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증거에 의하면 그 이전에는, 한 석비에서 “벳-산의 주인[바알] 메칼”이라고 부르는 바알 신의 숭배 역시 행해졌던 것 같다.

이 도시는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복되었다. 이 일은 틀림없이 다윗의 통치 때에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 때 벳-스안은 왕실에 물자를 공급하는 12개의 지구 가운데 하나에 포함되었다. (왕첫 4:12) 왕국이 나뉘어진 후 파라오 시삭(이집트 사람들은 셰숑크로 부름)은 르호보암 왕 제5년(기원전 993년)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 (왕첫 14:25) 이집트의 카르나크에 있는 한 벽의 돋을새김에는 시삭이 원정에서 승리하여 벳-스안을 비롯한 여러 성읍을 정복한 일이 묘사되어 있다.

마카베오 시대에는 벳-스안의 이름이 이미 스키토폴리스로 바뀌어 있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곳을 데카폴리스에서 가장 큰 도시로 언급한다.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III, 446 [ix, 7]) 스키토폴리스는 그러한 데카폴리스 곧 열 개의 도시 가운데 유일하게 요르단 강 서쪽에 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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