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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찰, 제2권
통-2 “하맛”

하맛

(Hamath), 하맛 사람 (Hamathite)

하맛이라는 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 시리아에 있던 가나안 사람들의 작은 왕국의 수도였다. 그 도시 주위의 기름진 경작지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그 도시의 일반적인 이름은 에피파니아였는데, 이 이름은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가 지은 것이었다. 오늘날 그 도시는 원래 이름의 단축형인 하마로 불린다.

[1116면 지도]

지도: 하맛

하맛은 여러 개의 중요한 무역로가 지나가는 곳에 오론테스 강을 끼고 위치한 도시였는데 이곳은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81킬로미터, 다마스쿠스에서 북쪽으로 약 190킬로미터, 알레포에서 남쪽으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하맛은 헷 사람들이 세운 도시로 때때로 묘사되지만, 헷 사람들의 친척뻘이며 대홍수 후의 70가족 가운데 하나인 하맛 사람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두 가계의 조상들인 헷과 하맛은 각각 함의 아들 가나안의 둘째와 열한째 아들로 언급되어 있다.—창 10:6, 15-18; 대첫 1:8, 13-16. 헷 사람들 참조.

“하맛 어귀” 하맛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는 기원전 16세기에 이스라엘의 정탐꾼 12명이 남쪽에서 “하맛 어귀”까지 올라간 일에 관해 알려 주는데, 자주 반복하여 나오는 이 “하맛 어귀”라는 표현은 그 도시 자체의 성문이 아니라 그 도시의 통치하에 있던 영토의 남쪽 경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민 13:21) 여호수아는 북쪽으로 이곳까지 정복을 추진하였다. (수 13:2, 5; 판 3:1-3)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하맛 어귀까지”(수 13:5)라는 표현을 “레비하맛(하맛의 사자)까지”로, 따라서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구약」(Vetus Testamentum), 라이덴, 1952년, 114면 참조.

이 경계(또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그곳은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 경계이자(민 34:8; 왕첫 8:65; 왕둘 14:25; 대둘 7:8), 다마스쿠스와 접경하고 있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렘 49:23; 겔 47:15-17; 48:1; 슥 9:1, 2) 어떤 사람들은 그곳이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에 뻗어 있는 코엘레시리아 골짜기(베카라고도 불림)의 남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곳이 발베크와 리블라의 중간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곳은 그보다도 북쪽으로, 홈스와 바다 사이에 길이 지나가는 곳에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겔 47:20.

이스라엘과의 관계 하맛 왕 도이(도우)는 자기 아들 요람(하도람)을 보내어 다윗 왕이 그들의 공동의 적인 하닷에셀을 쳐부순 것을 축하하게 하였다. 하맛은 당시 독립된 왕국이었다. (삼둘 8:3, 9, 10; 대첫 18:3, 9, 10) 하지만 솔로몬의 통치 중에 하맛 왕국은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 같은데, 솔로몬이 그 지역에 창고 도시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대둘 8:3, 4) 하맛은 솔로몬이 죽은 뒤에 독립했으며, 기원전 9세기에 여로보암 2세가 일시적으로 그곳을 다시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두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왕둘 14:28) 이 무렵 그곳은 “인구가 많은 하맛”으로 묘사되었다.—암 6:2.

기원전 8세기에 하맛은 세계 제패를 위해 파죽지세로 나아가는 아시리아 사람들에 의해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을 포함한 이웃 나라들과 함께 황폐되었다. 아시리아는 포로들을 맞바꾸어 새로운 곳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하맛 사람은 사마리아 주민을 대치하도록 끌려왔고, 사마리아 주민도 하맛과 그 밖의 장소들로 옮겨지게 되었다. (왕둘 17:24; 19:12, 13; 사 10:9-11; 37:12, 13) 하맛 사람들은 그 후 사마리아의 산당들에 자기들의 신 아시마의 형상을 세웠는데, 이 무가치한 신이 아시리아 사람들에 대항했을 때 무력함이 증명되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왕둘 17:29, 30; 18:33, 34; 사 36:18, 19.

현존하는 한 설형 문자 비문(대영 박물관 21946)에 의하면, 기원전 625년 갈그미스 전투가 있은 후(렘 46:2),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는 도주하는 이집트 사람들을 하맛 지방에서 따라잡고 멸절시켰다고 한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연대기」 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 A. K. 그레이슨, 1975년, 99면) 그보다 몇 년 전에는 이 지역에서 파라오 느고가 여호아하스 왕을 사로잡은 일이 있었다. (왕둘 23:31-33) 그 후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을 때, 시드기야와 그 밖의 포로들은 하맛 지역에 있는 리블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다른 귀인들과 함께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왕둘 25:18-21; 렘 39:5, 6; 52:9, 10, 24-27)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때가 되면 자신이 하맛 땅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포로가 된 자신의 백성 가운데 남은 자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사 11: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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