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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속 제28부—“당신의 뜻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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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속 제28부—“당신의 뜻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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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61 4/15 157-160면

계속 제28부—“당신의 뜻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이다”

『당신의 뜻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책에세 제10장 『북방이 남방에게 대항한다』라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다니엘」서 11장에 있는바 『북방 왕과 남방 왕』사이에 발생되는 군사적 정치적 문제에 언급하고 있다. 상징적으로 말한 이 두왕은 시시로 변하였다. 북방 왕은 이 백년 이상이나 중동에 있는 「시리아」의 희랍 통치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러나 주전 64년에 「시리아」는 「안디옥」에다 도읍한 「로마」의 한 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이 북방 왕이 되었다. 「아구스도」 「가이사」황제는 주후 14년에 죽었다. 그리고 그의 이붓 아들 「디베리오」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다니엘 11전에는 그를 『비천한 자』라고 하였다. 「디베리오」가 통치하는 동안 『넘치는 물 같온 군대』가 그의 앞에서 완전히 없어지고 패하게 되었다.

64. 『언약의 왕』도 어떻게 그의 앞에서 『패하게』되었는가?

64 심지어 『언약의 왕』도 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언약의 왕은 「로마」의 정치적 대표자들이 직책에 세운 어떠한 「유대」인 제사장이 아니었다. 그는 온 땅의 모든 족속과 민족의 축복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인도할 분이 었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후 33년 「니산」월 14일 유월절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총독의 궁전에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었는데 「빌라도」는 「가이사」 「디베리오」를 대표한 자였다. 「유대」인 교직자들은 그 사람 앞에 예수를 황제에게 반역 죄로 고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때 「로마」총독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것이 아니라 . . .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로마」의 총독이 죄없는 예수를 놓아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 . . 「가이사」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외쳤다. 당시 불경죄(laesa majestas)에 의하여 「로마」 총독은 예수를 넘겨주어 형주에 달려 그 사람 앞에서 『패하게』하였다.—요한 18:36; 19:12-16; 마가 15:14, 18.

65. 불경죄의 법을 왜 확장시켰으며 그리고 「디베리오」 「가이사」는 왜 인기가 없었는가?

65 「디베리오」황제는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불경죄의 법을 더 확장하여 자기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공격까지 포함시켰다. 그리고 밀고 제도를 권장하였다. 나라는 마치 경찰국가 같이 되었고 그가 다스린 제국통치의 후반기에 와서는 하나의 공포정치가 되었다. 「로마」의 작가 대 「플리니」는 「디베리오」를 『가장 음침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음하고 의사가 통하지 않고 무엇을 감추기 좋아하는 사람이 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또 인기도 없었다.

66. 「디베리오」 「가이사」는 누구와 약조를 맺고 있었으며, 또 어느정도로? 그리고 그는 『적은 나라』를 가지고 어떻게 세력을 잡고 있었는가?

66 「디베리오」에 관하여 천사는 「다니엘」에게 더 예언하였다. 『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적은 백성을 거느리고 강하게 될 것이며』 (다니엘 11:23) 「디베리오」는 「로마」 의회와 헌법적으로 약조를 맺고 있었다. 그는 헌법상 원칙적으로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적은 백성』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나라』인가? 그것은 근위대였다. 이것은 주전 13년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황제의 친위대로서 만들어논 것이다. 그것은 「로마」군대의 총사령과의 호위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때까지 이 근위대는 「로마」 근방에 조그만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디베리오」는 이것을 고쳤다. 「디베리오」는 그가 귀여워하는 근위대장 「세자노」의 충고에 따라 이 근위대를 완전히 무장시켜 성벽에 진을 치고 항상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마련으로 그는 백성의 어떠한 폭행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근위대장의 세력이 매우 크게 되었다. 근위대는 그들의 특권을 기뻐하게되 었다. 드디어는 그들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져서 황제를 자리에 앉힐 수도 있고 또 그들의 뜻에 따라 쫓아낼수도 있었다. 약 만명 밖에 되지 않는 근위대를 가지고 「디베리오」황제는 세력을 잡고 있었다. 「로마」의 통치 밑에서 자기의 권세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자들을 문제없이 진압시킬 수 있었다. 그는 민회(民會)로 알려져있는 일반적 집회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67, 68. 그는 어떻게 기름진 곳으로 들어갔는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그의 조상들이 하지 않은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죽었는가?

67 『그가 평안한 때에 그 도의 가장 기름진 곳에 들어와서 그 열조와 열조의 조상이 해하지 못하던 것을 행할 것이요, 그는 노략하여 탈취한 재물을 무리에게 흩어주며 모략을 베풀어 얼마 동안 산성들을 칠것인데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하리라.』 (다니엘 11:24) 이것은 「디베리오」가 의심이 많아서 근위대장 「세쟈노」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이며, 「세쟈노」 자신도 마지막에 의심을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

68 「디베리오」 황제는 「로마」의 각 도에 대하여 끊임없이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나라의 모든 백성이 「로마」 제국에 순종하였으며 매우 번영한 상태였다. 이런 일은 「아구스도」나 그전 통치자들 밑에서도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다. 정부가 엄격히 경제적이 었고 세금이 적었기 때문에 「디베리오」는 백성들이 도처에서 굶주리고 있을 때는 자비를 베풀수 있었다. 만일 나라의 대표자들 중 군대나 총독이나 다른 고관들이 자기 보다 못한 자를 억압하거나 사물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비행을 하면 나라의 직권으로 응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타리」와 그 다른 나라에서 강한 권력으로 치안을 확보하고 있었다. 통신 기관의 발전은 상업을 또한 촉진 시켰다. 더욱 엄격한 「로마」의 도덕과 더불어 황제는 「로마」 내외에 있어서 모든 일이 항상 잘 처리되는가를 살폈다. 법은 여러 면에서 발전되었다. 그리고 「가이사」 「아구스도」가 세운 개혁을 유지하며 또 개선하므로 사회적 도덕적 관계가 잘 보장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역사가 「다기두스」는 그를 『학식있는 음침한 자요 처음부터 위선자』라고 묘사하였다. 그는 폭군으로 생각되었다. 주후 37년 3월 중순이 지나서 그가 죽었으나 신격화하여 아무런 영광도 받지 않았 다. 그는 『한 비천한 사람』이었다.

69. 「클로디우스」는 북방 왕으로서 어떻게 제국을 더욱 발전시켰는가? 그리고 어느 황제 때 최대로 팽창하였는가?

69 「디베리오」를 계승한 사람은 흔히 「칼리굴라」라고 하는 「가이오」 「가이사」였다. 그 뒤를 주후 41년에 이은 사람은 그의 숙부인 「클로디우스」였다. 북방 왕으로서 「디베리오」가 「로마」제국의 발전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클로디우스」는 「아구스도」가 할려던 계획에 따라서 더욱 「로마」의 발전에 힘썼다. 한 권위자는 이처럼 말하였다. 「피호국들이 편입되었다. 영국 남쪽이 정복되고 「로마」풍이 서양에 불게 되었으며 토목 사업이 「로마」와 「이타리」에서 행하여졌으며 제국 관료주의 조직이 급진적으로 구성되었다.』a 또 한 역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클로디우스」 치하에서 중요한 확장이 있었다. 그는 주후 43년에 영국으로 성공적인 원정을 보냈다. 그리하여 영국 본토의 남부가 「브리다니까」도로서 「로마」에 편입되었다. 후에 영국군의 일선이 더욱 북쪽으로 밀려나갔으며 방어선에서 제지되었다. 「트라얀」(주후 98-117)은 동부에다 대 제국을 세울 야심을 가지고 영토를 탐내어 전쟁을 시작하여 「바사」의 「바르디아」인을 패배시키고 「아르메니아」와 「메소보다미아」와 「앗수르」를 도로서 제국에 편입시켰다. 이때 「로마」는 최대로 팽창하였었다. 그러나 「트라얀」이 동쪽에서 정복한 것을 그의 후계자들이 포기하였다.』b

70. 다니엘 11:25과 관련된 북방 왕은 누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의 통치 기간중 누구의 야심이 제국을 위태롭게 하였는가?

70 예언적 북방 왕의 활동을 미리 알고있던 여호와의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가 그 힘을 떨치며 용맹을 발하여 큰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남방 왕도 심히 크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울 것이나 능히 당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략을 베풀어 그를 침이니라 자기의 진미를 먹는 자가 그를 멸하리니(다른 군대가 넘쳐 들어올 것이요, 미표) 많은 자가 엎뜨러져 죽으리라.』 (다니엘 11:25, 26) 이 성귀에 해당되는 북방 왕은 「오렐리안」황제다. (주후 270-275) 그의 큰 문제의 하나는 「시리아」사막 「발무라」시에서 난 「세프티미아 · 세노비아」 여왕이었다. 옛 도시 「발무라」는 「로마」인과 「바사」의 「바르디아」인과 전쟁의 요지었으며 또 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전되었다. 「하드리아」황제가 주후 130년에 그 도시를 방문하고 그것을 「아드리아노폴리스」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 곳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중요한 군사적 요지가 되었다. 「바사」와의 전쟁으로 「발무라」는 얼마동안 정치적 요지가 되었으며 그 곳은 몇년 동안 「로마」가 동쪽에 가지고 있던 자매였다. 그 지역은 여왕 「세노비아」의 야심 때문에 「로마」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였다. 그 여자의 본래 이름은 「밧드 삽바이」였다. 그의 남편 「오대나도」왕은 동방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의 남편이(주후 266-267) 죽은 후 「세노비아」는 자기 남편 보다도 그의 입장을 높일려고 하여 「발무라」를 동방에서 「로마」제국의 뛰어난 도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여자가 이미 습득한 정부 행정 기술로 말미암아 정부의 행정을 꼭 잡았다.

71. 그 여자(세노비아)는 아들과 같이 「로마」 제국에 대하여 어떻게 남방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71 그 여자의 군대장관은 그의 남편의 친척인 「삽다」였다. 그의 지휘 밑에 「발무라」군대는 「로마」를 보호한다는 구실 밑에 주후 270년에 「애굽」을 점령하였다. 그러한 구실을 붙이게된 이유는 마침 그때 「나일」강 연변에 대한 「로마」황제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노비아」는 그 정복을 지휘하였으며 그 여자의 아들은 왕의 명칭을 가지고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는 여왕의 칭호를 갖게 되었다. 「발무라」군대로 된 주둔군은 소 「아시아」에서는 서쪽으로 「안구라」(지금 토이기의 「안카라」)까지 차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마즌편에 있는 구라파의 「비산틴」에 이르기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세노비아」는 여황제라고 까지 부르게 되었다. 「오렐리안」이 주후 270년에 「로마」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북방 왕이 되었다. 그때 그는 야심이 많은 여왕 「세노비아」가 「로마」제국 통일에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통치 2년에 그와 「세노비아」간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때 「세노비아」는 북방 왕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이사람에 대하여 그 여자는 남방 왕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여자는 사막 지대의 「아랍」인과 「애굽」인을 연합시키므로 세계적 거물이 되었다. 그 여자는 「메소보다미아」와 소 「아시아」 외에 「시리아」와 「애굽」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여자는 「아랍」인과 「아르메니아」인을 의지할수 있었으나 「시리아」 사람의 충성에 대하여 든든히 의지할 수 없었다.

72. 북방 왕이 왜 격동하지 않으면 않되었는가? 그리고 남방 왕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였는가? 싸움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72 전쟁을 좋아하는 「애굽」과 「시리아」의 여왕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렐리안」황제의 힘과 마음을 격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그 여왕으로서는 북방 왕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크고 강한 군대를 소집하고 「삽다」와 「삽다이」 두 장군을 지휘관으로 명하였다. 「오렐리안」은 먼저 「프로보」로 말미암아 「애굽」을 회복하였다. 다음에 그는 소 「아시아」와 「시리아」로 대 원정을 행할 준비를 가추었다. 「세노비아」는 그의 두 장군과 함께 「에메사」(지금 홈스)에서 대패되어 「발무라」로 후퇴하였다. 이 도시는 사막으로 말미암아 잘 방어되었으나 「오렐리안」은 견고하고 잘 준비된 이 도시를 포위하여 그 포위를 오래 계속하였다. 포위로 인하여 「세노비아」의 용기가 꺾기게 되었다. 그 여자와 그의 아들은 도시를 탈출하여 「바사」로 도망쳐 구원을 청하였다. 「로마」인들이 그들을 「유브라데」강 둑에서 잡았다. 포위당한 「발무라」인들은 낙담하여 주후 272년에 항복하여 도시를 내놓았다. 「오렐리안」은 「세노비아」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 여자를 「로마」로 데려다가 주후 274년c에 제국의 수도를 일주하는 대 승리 행진에서 그의 큰 자랑거리가 되게 하였다. 그후 그 여자는 여생을 「로마」의 부인으로 보내게 하였다.

73. 음식을 같이 먹는 자들이 어떻게 북방 왕을 멸망케 하였는가?

73 여왕 「세노비아」가 북방 왕으로서 강한 「로마」군 앞에 서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여왕을 정복한 「오렐리안」 황제도 음모자들 앞에 서지 못하였다. 「로마」의 원로는 그에게 「로마」 제국의 회복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는 「로마」 황제 중에서 처음으로 왕관을 쓴 사람이다. 기념비에는 그에 대하여 주 또는 신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의 승리의 해가 끝날 무렵에 그는 「바사」에 대항하여 원정을 떠났다. 그가 소 「아시아」로 들어가는 해협을 건널 기회를 「드레이스」에서 였보고 있는 동안에 그의 음식을 함께 먹는 자들 가운데서 악한 꾀를 내어 그에게 반항하여 그를 꺾었다. 그는 자기 비서인 「에로스」를 불러서 어떤 비행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에로스」는 명부에다 이 장교들을 포함하여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서 날조하므로서 어떤 장교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음모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 명부를 본 그들은 그의 암살을 생각하게 되었다.

74. 그 후에 계속된 북방 왕에 관하여 어떻게 『그 군대가』 넘쳐 들어 옴으로 많은 자가 엎뜨러져 죽었는가?

74 북방 왕은 「오렐리안」 황제로서 끝나지 않았다. 다른 황제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또 한 때는 한 제국 내에서 서부의 황제 동부의 황제가 있었다. 이 황제들 밑에 있었던 북방 왕의 군대는 예언된 바와 같이 북쪽으로 부터의 야만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많은 군대가 쓰러졌다. 야만인들이 성공적으로 처들어 온 4세기 까지는 이러한 침입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고쓰」족 혹은 「게르만」민족은 무장한 「로마」의 군대가 더는 강군이라고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 「로마」의 일선을 뚫고 침공에 침공을 가하였던 것이다. 6세기 초에 「게르만」민족은 「로마」 제국을 서부에서 흩어버리고 「게르만」(독일) 왕들은 「이타리」 「영국」 「가울」 「서바나」와 북「아프리카」에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 제국의 동쪽에는 위협하던 「훈」족이 「콘스탄티노플」(비산틴)을 함락시키고 방향을 서쪽으로 돌렸다.

75. 「로마」 제국은 드디어 어떻게 두 황제를 가지는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애굽」은 어떻게 영국의 통치 밑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75 「콘스탄틴」 황제(324-337)는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의식에 대하여 나라의 인정을 주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주후 325년에 「비산틴」에서 4백리 좀 못되는 소 「아시아」의 「니고메디아」에 있는 「니게야」 종교회의에 까지 참석하였었다. 그는 주후 330년 5월 11일에 그 곳에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세우고 그것을 신 「로마」 혹은 「콘스탄티노플」로서 바쳤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의 「로마」 제국 만이 있었다. 나중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395년 1월 17일에 죽은 후에 제국은 드디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갈라지고 말았다. 「호노리오」는 서쪽을 받고 「아르가디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쪽을 받았다. 「애굽」은 「콘스탄티노플」에 정복되어 「로마」 제국의 동쪽 부분의 한 도가 되었었다. 「헤라클레스」가 동쪽의 황제가 된 주후 641년에 「애굽」의 수도 「알렉산드리아」가 「마호멧도」 교도인 「사라센」에게 함낙되었다. 그리하여 「애굽」은 「모하멧드」의 후계자 즉 「갈리프」의 한 도가 되었다. 1516-1517년에 「애굽」은 「토이기」의 한 도가 되어 「파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14년에 세계 제1차 대전 폭발 되었을 때 「애굽」은 「토이기」에 속하여 있었고 「케디브」 혹은 총독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게르만」 민족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압바스 파샤」 총독은 그 해 12월 18일에 면직되고 특히 「스에즈」 운하를 지킨다는 견해 밑에 「애굽」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76. 동부 「로마」 제국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종말을 가져왔는가?

76 1448년에 즉위한 「콘스탄틴」 P 12세는 동쪽의 마지막 황제였다. 「마호멧」 교도들은 여러번 「콘스탄피노풀」을 탈취할려고 하였다. 수 세기 동안 시도한 후에 그들은 드디어 성공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토이기」 술탄 「마호멧」 2세로 말미암아 53일간 포위되었었다. 그리하여 1453년 5월 29일에 함낙되었다. 이것이 함낙됨에 동부의 「로마」 제국은 결정적으로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77. 어느 대주교때 종교적 정치 체재가 발생하였는가? 언제부터 동부 제국과 서부 제국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게 되었는가?

77 「로마」 제국의 서쪽에 있어서는 종교적 정치체제가 「로마」 「가톨릭」 대 주교로부터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이 처음 발생된 것은 특히 법황 「레오」 1세로부터며 그는 5세기에 법황제도를 최초로 세운 사람이다. 때가 지나매 법황은 서부「로마」 제국의 황제의 왕관을 자기 스스로 씨울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이 발생된 것은 「레오」 3세가 주후 800년 「크리스마쓰」 날에 「로마」에서 「프란킷쉬 챨스」 대왕을 서부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왕관을 씨웠을 때였다. 「레오」 3세는 말하기를 『「챨스」 황제는 하나님께서 왕관을 씨웠으며 그는 위대하고 화평의 황제며 생명과 승리의 황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정치적 통치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스리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한 근대 역사가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챨스」 대왕이 대관한 것은 왕권을 박탈한 것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정부가 아직 그 제국에 있어서 아직 합법적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d 그때 왕위를 박탈한 여황제 「이레네」(780-802)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왕위에 좌정하고 있었더라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 때부터 다 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동부 제국과 서부 제국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게 되었다. 「챨스」 대왕은 자기 훈장에다 독수리의 머리를 한개 더 붙여서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이 결합한 것을 표시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각주]

a 백과사전 「브리다니카」 23권 651면 b.

b 『문명으로 향하는 길』 「핵겔」과 「시그만」저서(1937) 198면 1항.

c 참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C · T · 럿셀 저서(1891) 33, 34면.

d 『문명으로 향하는 길』 「헤켈」과 「시그만」저서 275면 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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