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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는 사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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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는 사망이 없을 것이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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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0
파60 8/1 143-144면

“다시는 사망이 없을 것이다”

단지 자기에게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사망에 의하여 데려가졌을 때에만 우리는 큰 공허감을 느끼며 무엇인가를 상실 했다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힌다. 한편 가슴아픈 슬픔에 싸인다. 정말 사망은 반갑지 못한 것 만을 초래케 한다. 이렇게 볼때 사망이란 우리의 벗이 될 수 없다. 벗이란 고통과 타격을 주지 않으며 영영 사라지지 않는 그러한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벗이 아니라 오히려 무서운 우리의 원수인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은 단지 새로운 생명에의 첫 길에 지나지 않다고 확신하려고 노력한다 할 지라도, 너무나도 뚜렷한 이 사실 자체를 변경시킬수는 없다. 죽음은 참혹하게도 남녀 노소의 중대한 생명을 뺏는다. 이로 인하여 사랑하는 자가 없어지는 그 자체는 그리고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사랑스럽게 포옹해 준다거나 말을 건너준다거나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거이라는 비통한 이 현실은 인간의 존재와 무서운 최후를 끝없이 느끼게 할 것이다.

보통 모든 사람의 욕망이란 이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하며 가능한 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래오래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사망이 다시는 없는 때를 볼수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해 보라. 다시는 묘지에 가야 하거나 사랑하는자를 잃은 일에 대하여 애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우리의 발밑 땅속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표말뚝을 보고 가슴아픈 경험을 갖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며 같은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가 온다는 것은 하나의 공상이 아니다. 이 사실은 매일 아침 해가 솟아오른 것처럼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신뢰할수 있는 약속이며 이것을 성취시킬 능력있는 분께서 하신 약속이다. 이 약속을 그의 말씀인 계시록 21:4에서 찾아볼수 있으며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사야」의 책 가운데에도 역시 같은 뜻이 기록되어 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매,』—이사야 25:8.

이 놀라운 약속은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여호와의 왕국이 현재의 악한 조직제도를 씻어버리고 의로운 신세계를 대치하였을 때 성취될 것이다. 그왕국의 통치 아래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불가피의 운명이 되어 왔던 사망은 다시는 세력을 갖지 못하게 될것이다. 사망은 종결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의 가치가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순종하는 인간들 위에 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동물이나 새들이나 물고기가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원히 산다는 약속이 그들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죽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한정하게 살도록 목적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에는 이성없는 짐승은 『본래 잡혀 죽게』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 후 2:12) 그러므로 『다시 사망이 없고』라는 약속은 단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그런데 만일 죽음이 다시 없는 세상에서 반역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도 그의 생명이 계속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죽게 된다. 죽음의 종말은 사람이 악하게 된 경우에도 멸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시록 20:14) 이 성구에서 우리는 확실히 알수 있다. 즉 불못에 의하여 상징된 죽음은 인간에게 언제나 있을수 있는 일이며 불가피의 것이 아니다. 최고 주권자에게 순종하는 한 그분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불못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못에 던지움으로써 제거되는 사망은 바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온 죽음이다. 신세계에서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행으로 인하여 죽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아니라.』한 말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죄를 말한 것이다.—고린도 전 15:26.

「아담」으로 인한 죽음의 종결은 또한 「하데스」(음부)의 종말 즉 인간의 보통 무덤의 종말을 의미한다. 사망은 출생되는 모든 인간의 불가피한 장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망은 사람들을 그리로 더는 이끌어 드릴수 없을 뿐만아니라 죽어있는 사람을 보존하는 일도 그치게 될 것이다. 부활에 의하여 인간의 보통 무덤 속에 들어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기억에 보존되어 있는 자들은 인간 생명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예수께서 이 사실을 약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 5:28, 29.

이 약속은 애통하는 자들에게 위안과 소망을 준다. 이 사실은 죽음이 가져다 주는 무서운 운명감을 없애고 이미 죽어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다시 소생될 때가 오기까지는 그들은 계속 무의식 상태에 처하여있다. 예수께서 잠자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한 11:11) 예수께서 「나사로」를 깨워서 다시 의식을 회복하게 한 것처럼 그의 1,000년 통치 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깨울 것이다. 만일 이들 부활된 자들 중에 반역의 길을 걸어 하나님에 의하여 거슬린 자로서 판단을 받게 된자가 있다면, 그는 또다시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못으로 상징되어 있는 영원한 죽음인 것이다.

이처럼 「아담」으로 말미암은 죽음이 종말되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순종하는한 무한정하게 살수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땅위에 인구가 너무 많아질 것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사망에 종지부를 찍고 죽은 자들을 일으킬 수 있으신 분께서는 인구가 너무 많아지는 것을 막을수도 있으시다. 우리는 사망이 다시는 있지 않을 앞날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기대할수 있다. 이것을 약속하신 분은 거짓말을 할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때는 바로 오늘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 기간내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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