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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활이 있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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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2
파62 6/1 205-220면

부활이 있는가?

예수의 사망시에 죽은 자로부터 부활이 있었는가? 많은 성경 주석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태 27:52, 53에 기초하여 그렇게 믿는다. 개역 표준판 (「로마 가톨릭 콘프레이터니티」역도 거의 동일하다.) 에서 이 귀절들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무덤들이 또한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사체들이 많이 일어났고 그의 부활 후에 무덤으로부터 나와 그들은 거룩한 성읍에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로마 가톨릭」의 「성서에 관한 주석」에 의하면 앞 귀절에서 말한 지진은 사체들의 출구를 준비하기 위하여 암석의 무덤을 쪼개 열었으며, 이 사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까지 부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나 신교 역본에서 말하는 것은 실제로 성귀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자.

이 귀절들에 관하여 가장 저명한 신교 성경 주석자 중의 하나인 「아담 클라크」에 의하면 『52절과 53절에서 말한 기록을 설명하는 것은 힘이 든다. 어떤 이는 이 두귀절이 「나사렛」 복음으로부터 소개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다른 이는 단순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지진으로 인하여 매장되었던 몇개의 사체들이 내던져저서 눈에 띄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후까지 계속 땅위에 있었다. 그리고 성읍의 많은 사람들은 보았다. 금요일에 무덤이 열려졌으나 다음 일요일까지 사체들이 생명으로 일으켜지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내는 것은 힘이 든다. 그곳은 극단적으로 애매하다.』

다른 성경 주석자 「제크스」박사는 이 귀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문제는 우리의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고 있다. . . .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이것에 관하여 질문을 일으키는 것은 좋을 것이다.』 다른 성경 주석자들도 흡사하게 표현하였다.

이 두귀절에서 말한 사건이 실제로 요한복음 5:28, 29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죽은자의 부활의 시작이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의 무덤에 있는 모든 자들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거나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기록은 이들이 『성인』 혹은 『거룩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그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왔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랬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그의 생명의 부활 이래 계속 사시는 것 같이 오늘날까지 그들도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계시 1:1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것을 해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므로 이들 거룩한 자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시기 이전에 끝없는 생명의 전망으로 부활될 수 없었다.—고린도 전 15:20; 골로새 1:18.

어떤 이들이 말한 것 같이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신 직후에도 생명으로 부활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자들은 『그 날에』 즉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에 부활될 것이며 그들의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되신지 여러 해 후까지도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가까운 장래에 성취되어야 할 것이었다.—디모데 후 4:8; 데살로니가 전 4:16.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이전의 거룩한 자들인 이들은 하늘이 아니라 지상의 생명으로 운명이 예정된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 하드라도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되셨을 때에 그들의 부활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그들이 생명으로 부활되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자들인 『우리』가 아니라도 온전함을 받은 것이 될 것이다.—히브리 11:39, 40.

몸의 부활은 없다.

이 외에 비록 소위 사도 신경이 인간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 어디에도 우리는 죽은 자의 몸의 이르킴을 받았다는 것을 읽지 못한다. 『죽은 자』는 맞는다. 그러나 『죽은 몸들』은 아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부활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합한 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인품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자들의 부활에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명백한 이치에 유의하라.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 . .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 . .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 .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 . .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석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린도 전 15:35-38, 42-44, 50.

성경은 첫째 부활에 있어서나 혹은 다음 부활에 있어서도 인간 육체의 이르킴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여기의 몸이 이르킴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들 부활 중 어느 것의 시작도 될 수 없었다. 기껏해서 아마 갓 죽은 충성스러운 「유대」인의 얼마가 단지 임시 부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활은 예수의 친구인 「나사로」와 다른 그러한 사람들이 경험한 부활과 별다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假定)도 다음의 질문들의 견지로 보아 거절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무덤이 열렸다면 예수께서 부활되시어 무덤으로부터 나오시고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까지 성도들의 몸이 왜 기다렸어야 하였는가? 예수께서 이르킴을 받으셨을 때에 지진이 있었다. 그들은 왜 그 지진을 기다릴 수 없었는가? 누구에게 이 몸들은 나타났는가? 그들의 부활이 3일후에 자기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의 부활과 경쟁적인 것이었는가? 그들의 나타난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에 주의를 돌렸으며 이야기 하였는가? 그들의 부활이 예수의 부활을 높이거나 혹은 이에 더하거나 혹은 그의 부활을 확증하였는가? 그런 이상한 사건을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의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게다가 사도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한 고린도 전서 15장의 그의 논의 가운데서 그들의 부활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그러한 것은 일반 상식일 것이며 「바울」은 그 사실을 말하였을 것이다.

이 난문의 이치적 해결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의 신 세계역」에 질문된 귀절들을 참조하는 것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직역하였을 때에 이것은 문자 그대로 보다 사상을 명백하게 하는 것을 앞세웠다. 이것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억의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거룩한 자들의 몸들이 내 던져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억의 무덤 사이에서 나와 거룩한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었다.』 이 번역으로부터 그것이 『잠자는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의 죽음에 따른 지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몸들이 내던져진 것임이 명백하다.

그렇다고 「신 세계역」 만이 이 귀절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독일어」에는 매우 흡사하게 기록되었다. 『무덤들은 열려진체였다. 그리고 매장된 자들의 많은 몸들이 똑바로 딩굴러졌다. 이 자세로 그들은 무덤으로부터 내던져졌으며 그 도시로 돌아가는 중에 그 곳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보여지게 되었다.』—마태 27:52, 53.

이와 매우 흡사한 한 사건이 1949년에 「에쿠아돌」에서 일어났다. 거기에서는 보통 죽은 자들은 선반 위에 선반이 있고 납골소 위에 납골소가 있는 넓은 지하 매장소에 매장한다. 지진으로 납골소가 깨져 열리고 많은 시체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들은 한때 온역이 시작되지 않도록 막기 위하여 매장되었어야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말한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로 대명사 『그들』이 『몸들』에 적용될 수 없었다는 것에 유의하자. (마태 27:53, 개역 표준판) 왜냐하면 희랍어의 모든 대명사들은 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남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몸들』은 중성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거룩한 자들』에 적용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성귀는 거룩한 자들이 이르킴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몸이 이르켜졌다. 즉 내던져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 나가서, 가장 오래된 사본들까지도 이 성귀에 관하여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시내산 사본은 『그리고 기억의 무덤이 열였다』와 『들어갔다』는 말을 빼놓았다.

가장 오래된 사본에서 발견되는 이들 성귀들이 일으키는 모든 문제들과 그들의 모순된 판독 그리고 그들의 여러 가지 변화를 보고 택일하기를 전체적으로 거절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귀절들은 「마태」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것이 아니라 초기 필생들의 손으로 부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여기에서 사용된 『부활』(개역 표준판)이라는 특정된 희랍어 『에거시스(égersis)』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의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서 더욱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복음서 중에서 여기에서만 『성인들』 혹은 『거룩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오순절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귀절들이 「나사렛」 위경 복음에서 발견되고 다른 정경 복음 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귀절들을 더 의심하게 한다. 이것을 후에 그가 희랍어로 번역하였다. 부수적으로, 어떠한 사람들은 이 「나사렛」의 복음서가 「히브리」어로 된 「마태」 본래의 복음서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연대 없이 시작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의 정경 복음서에 매우 밀접하게 흡사하다.

우리는 마태 27장 52절과 53절이 애매하다는 사실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 사실 그들은 전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 중에서 가장 번역하기에 어려운 귀절들 중에 들어있다. 그들의 애매함 때문에 아무도 그들은 어떻게 언급되어야 한다고 독단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애매함이 존재하는 곳의 성귀 번역을 다스릴 것은 성서적 비평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애매함으로 좌절되기 때문이다. 보다도 본래의 기록자가 뜻하였던 의미의 성경 해석 혹은 주석이 다스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 번역자가 언급하는 방법은 그가 성서의 다른 부분을 이해하는데 달려있는 것이다. 상기한 성서적 사실은 그들이 성경의 남어지와 일치하기 위하여 어떻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를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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